레전드 (2)
다음날 오전.
오프를 맞이한 최기석은 느지막하게 병동을 찾았다. 그리고 복도를 돌며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환자를 살폈다.
적어도 오늘은 병동에서 문제가 터질 일은 없을 듯싶었다.
"좋은 아침."
복도 맞은편에서 마주친 래리가 손을 흔들었다.
"좋은 아침. 오전 회의 때 별 이야기 없었지?"
"없었다고 봐야지. 사소한 트러블 하나만 빼고."
"사소한 트러블?"
"루카스 과장님하고 매튜 과장님이 불꽃 튀는 말싸움을 벌였어. 보통 의견충돌이 있으면 루카스 과장님이 웃으면서 넘어가잖아. 그런데 오늘은 달랐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시더라."
"……."
"그거 때문에 스태프들 완전히 뒤집혔다니까. 루카스 과장님이 변했다고."
"좋은 변화지."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정치력에 대해 언급했던 보람을 느꼈다.
환자 중심 성향의 의사들이여. 그대들도 독해질 수 있나니!
"그나저나 너는 여전하네. 어떻게 그동안 오프 동안 한 번도 안 빠지고 출근하니? 사람 맞아?"
"네. 사람 맞습니다. 로봇도 아니고, 외계인도 아닙니다."
그의 장난스러운 대답에 래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그렇고 오늘 회의 때 풀먼 교수님 소개했지?"
최기석이 화제를 돌렸다.
"오프인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오늘부터 근무하는 척추신경외과 교수님인데."
"어제 루카스 과장님 집무실에서 먼저 봤거든. 교수님은 지금 어디 계셔?"
"아마 척추신경외과 외래에서 진료실 정리하실걸? 내일부터 당장 외래진료 보니까."
"땡큐. 수고해."
최기석은 래리와 헤어진 후 2층에 있는 신경외과 외래를 찾았다.
긴 복도를 따라 뇌종양 클리닉, 뇌혈관 클리닉, 뇌전증 클리닉, 소아신경외과 등이 줄지어 자리 잡고 있었다.
각 과별로 대기 중인 환자들이 넘쳐 나는 상황.
신경외과가 유별나게 환자가 많다기보다는 본래 메이죠 클리닉은 환자가 넘쳐 나는 곳이다.
사전 예약을 해도 진료를 보려면 한 달이 넘어가기 일쑤다.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어제 인사드렸던 기석 최라고 합니다."
"어서 와요, 미스터 최. 그런데 아침부터 무슨 일입니까?"
"외래에 잠깐 일이 있어서 왔다가 들러봤습니다."
짧은 인사가 끝나고, 긴 침묵이 흘렀다.
최기석은 풀먼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들썩거렸다.
그의 질환에 대해 이야기하러 왔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지금까지의 태연한 모습을 보면 어제 응급실 진료를 보지 않은 것도 같은데…….
"미스터 최. 할 말이 있으면 뜸 들이지 말고, 편하게 말해 봐요."
"저기…… 교수님. 혹시 어제 기침 감기 진료는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기침 감기라……."
풀먼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그는 고개를 떨어트린 채 이마에 손을 얹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두 사람은 입 한 번 뻥끗하지 않았다.
마치 먼저 입 여는 사람이 지는 것처럼.
"으…… 응급실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어제 아주 끔찍한 경험을 했어요."
풀먼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미스터 최. 내가 중증의 폐암이라고 하더군요. 그것도 폐암 4기랍니다. 믿을 수 있겠어요?"
"……."
"퍼킹! 말도 안 돼. 내가 폐암이라니. 도대체 왜!"
풀먼이 참았던 울분을 토해 냈다.
사실 어제는 기침약이나 타고 가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응급실을 찾았다. 하지만 응급실 레지던트는 약 처방만 하는 것을 꺼리며 엑스레이와 피 검사만 해 보자고 했다.
풀먼은 귀찮아하면서도 이를 수락했다.
문제는 거기서 일어났다.
엑스레이 검사 결과 폐에서 이상 소견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호흡기내과 레지던트가 엑스레이를 판독한 결과 폐암 진단이 나왔다.
황당하지 그지없는 일이다.
기침 감기가 별안간 폐암으로 발전했으니까.
이어진 CT 검사에서 풀먼은 결국 폐암 4기 진단을 받았다.
한편 최기석은 풀먼의 하소연을 차분하게 들어주었다.
어제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그가 폐암에 걸렸음을 미리 알았기에…….
폐암은 침묵의 살인마다.
폐암이 상당 부분 진행이 됐더라도 증상이 아예 나타나지 않을 수 있었다.
폐암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는 공인된 방법조차 정립되지 않은 상황이고 말이다.
"교수님께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꿈이라고 말해 줘요, 미스터 최. 내가 처한 이 상황이 전부 꿈이라고 말해 줘요."
풀먼이 간절한 눈빛을 보냈고, 최기석은 차마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부푼 꿈을 안고 본원으로 왔을 풀먼이다.
그런데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폐암 4기라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참담함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혹시 루카스 과장님께는 말씀드리셨습니까?"
"아니요. 당장 나부터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을 과장님께 말할 순 없죠. 원래 미스터 최에게도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갑자기 울컥해서……."
"당연히 그러실 겁니다. 저는 교수님 마음 이해합니다."
"이해한다고요? 날?"
풀먼이 날카로운 눈빛을 쏘았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아마 지금 같은 눈빛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에요. 내가 미안해요. 폐암이라는 사실을 안 다음부터 예민해져서……."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에게 사과했다.
"호흡기내과 쪽에서는 별말 없었나요?"
"당장 입원해야 한다더군요. 조직검사를 해 보고, 치료계획도 세워야 한다고."
"……."
"하지만 난 치료받기 위해 본원에 온 게 아니에요. 내가 본원에 온 건 새로 개발한 척추 수술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라고요. 그런데 입원이라니……."
풀먼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미스터 최가 나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
최기석은 그의 질문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풀먼의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없음을 알았기에.
"제가 감히 한 말씀 드리자면…… 우선 마음이 아프시더라도 주변 분들에게 폐암에 걸리셨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내 아내와 내 딸, 그리고 병원 스태프들에게도요? 오 마이 갓."
풀먼이 상상조차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폐암을 숨기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용기를 내셔서 지인들에게 알리고, 미래를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는 그게 맞겠죠. 하지만 난…… 난……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
"미스터 최.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지만, 이제는 혼자 있고 싶군요."
"알겠습니다. 교수님. 오늘 하신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최기석은 무거운 마음으로 진료실을 나왔다.
본인이 폐암 4기 선고를 받았다면 어떤 기분일까.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진료실을 나온 후 곧바로 신경과 외래진료실을 찾았다.
대기 중인 환자 중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어제 식당에서 만난 김두진과 임진희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네. 안녕하세요."
최기석은 인사를 나누며 두 사람 앞에 섰다.
"어제 원무팀에 이야기해서 진료비 감면 신청을 했습니다. 오늘 진료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해요. 최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감히 메이죠에서 진료 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거예요."
"두진이 같은 아이가 재능 꽃피우지 못하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돕는 게 당연하죠."
그의 시선이 문득 김두진에게 고정되었다.
"두진아. 나중에 형이 결혼할 때 피아노 연주는 네가 해 줘야 한다. 알았지?"
"네. 약속할게요. 꼭이요!"
김두진이 미소를 띤 채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최기석은 그와 손가락을 걸었다.
잠시 후 진료를 끝낸 두 사람이 복도로 나왔다.
표정이 전보다 한결 밝아 보였다.
"선생님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직 초기 단계라서 수술은 필요 없다고 했어요. 평소에는 약 먹으면서 뜨거운 찜질을 해 주고, 일주일에 두 번씩 물리치료를 받자고 하네요."
"손을 쭉 펴고, 자주 주물러 주는 것도 좋대요."
임진희의 말에 김두진이 한마디 덧붙였다.
"다행입니다. 그럼 회복 기간에 대한 이야기는 들으셨나요?"
"짧게는 이주, 길게는 한 달 정도 걸린다고 했어요. 그동안은 무리하면 안 된대요."
"그렇군요. 두진아. 너 이 기회에 푹 쉬어 둬."
"싫어요. 그래도 전 연습할 거예요."
김두진이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의사 선생님 말을 듣고도 그럴 거야?"
"손만 안 움직이면 되잖아요. 전 상상으로 피아노를 칠 수 있다고요. 실제로 치는 거랑 크게 다르지 않아요."
김두진의 말에 최기석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천재 피아니스트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수납하러 가시죠.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휴우…… 괜히 떨리네요."
최기석은 두 사람과 외래를 벗어나 진료비 결제하는 것을 도왔다.
직원 혜택으로 금액이 꽤 줄어들었다.
"어머! 이렇게 많이 할인될 줄은 몰랐는데."
"제가 말씀드렸죠? 최대한 부담이 덜 되게 만들어 드린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올 걸 그랬어요."
임진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저기, 두진아. 형이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잡담을 나누며 1층 홀을 걷는 도중 최기석의 발걸음이 멈췄다.
"뭔데요?"
"지금 치료 중이라는 건 알지만 저기 있는 피아노 잠깐만, 아주 잠깐만 연주해 줄 수 있을까?"
"좋아요!"
김두진이 번개처럼 피아노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의자를 고쳐 앉은 후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단순한 행동임에도 그가 무언가 보여 줄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다.
뚜두두두둥.
연주가 시작되었다.
김두진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피아노로 춤을 추었다. 손가락은 건반 위에 기름을 칠한 것처럼 흘러갔고, 연주하는 멜로디를 따라 온몸이 격동적으로 흔들렸다.
마치 음악과 한 몸이 된 모습이다.
피아노에서 흐르는 음색은 처음에는 거칠고 긴장된 느낌을 풍겼다.
멜로디를 듣는 내내 가슴이 답답할 정도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긴장이 풀리고, 따뜻하고 푸근한 느낌의 연주가 이어졌다.
화창한 봄날에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김두진의 연주에 몸과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따따라~ 딴딴딴~
경쾌한 연주 속에 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피아노 근처로 몰려들었다.
이윽고 사람들이 연주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의 연주는 듣는 사람을 가만있지 못하게 만들지 않는 마력이 있었다.
짝. 짝. 짝. 짝.
삐이이익~
연주가 끝나자 청중들이 박수갈채와 휘파람을 보냈다.
"병원에서 치니까 쑥스럽네요."
김두진이 그의 곁에서 혀를 쏙 내밀었다.
연주할 때 보였던 카리스마는 온데간데없고, 개구쟁이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두진이 진짜 멋있는데? 이렇게 잘 칠 줄은 몰랐어."
"헤헤. 진짜요?"
그의 칭찬에 김두진이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최기석이 김두진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휠체어 한 대가 접근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카터.
교통사고로 신경외과에 입원했다가 신경과에서 재활치료 중인 유명 피아니스트다.
최기석이 무리해서 연주를 부탁한 이유.
그것은 카터에게 김두진을 소개해 주기 위함이었다.
"닥터 최가 말한 친구가 이 친구예요?"
"네. 아시아에서는 최연소로 버클리 음대에 입학한 두진 킴입니다."
"허허. 그동안 영재를 많이 만나 봤지만 이런 친구는 처음이군. 두진."
카터의 시선이 김두진에게 고정되었다.
"방금 친 곡, 혹시 자작곡이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