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1)
"미스터 최. 갑자기 왜 그런가?"
"아…… 아닙니다."
최기석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풀먼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갈색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가슴이 시큰 아렸다.
"제가 껴들 일은 아니지만 풀먼 교수님. 응급실에 가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기침이 너무 심하신데."
"하하하. 벌써 내 생각을 해 주는 겁니까? 고맙긴 한데 그 정도는 아니에요."
"제가 봤을 때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요즘 부쩍 숨쉬기 불편하고, 기침도 자주 나지 않습니까? 가슴도 아프시고요."
"그걸 미스터 최가 어떻게 알죠?"
풀먼이 놀란 토끼 눈을 했다.
"방금 기침을 너무 심하게 하셔서 제 나름대로 예측해 봤습니다."
"뭐. 증상을 꼬집어서 맞춘 건 대단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요새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뿐이니까."
"풀먼. 나도 미스터 최의 말에 동감하네. 의사일수록 오히려 제 몸을 챙겨야 하는 거야."
"하지만……."
"내 말 들어. 집무실을 나가는 대로 응급실 진료를 보게. 이건 지시야. 알겠나?"
"과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풀먼이 수긍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최기석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가 자신의 질환을 깨닫는 순간 인생이 송두리째 변할 것이기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최기석은 두 사람과 대화를 마친 후 기숙사로 돌아갔다.
풀먼이 진료받는 것을 지켜보려 했지만, 풀먼이 거절하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안타깝지만 그의 입장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갔다.
가족도 아니고 오늘 처음 본 레지던트가 진료를 쫓아다닌다고 하면 부담스러운 게 당연하다.
'어쩔 수 없지.'
기숙사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모건에게 빌린 차에 올라탔다. 송명진이 차를 몰고 브랜치에 갔기에 당분간 스승의 차는 사용할 수 없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과거 인연을 맺었던 한인 식당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김치 볶음밥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늦은 시간이라서 손님은 한 테이블밖에 없었는데 한국인 모자로 보였다.
"아이고, 선생님 오셨습니까?"
주방에 있던 김태환이 달려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요새 바빠서 통 못 왔네요."
"그럴 수도 있죠. 워낙 바쁜 게 병원 일 아닙니까? 그건 그렇고, 오늘은 송 과장님이 안 보이네요?"
"몇 주 전 부속병원에 가셨어요. 아마 이번 주 중으로 복귀하실 겁니다."
"그렇군요. 일단 앉으시죠. 메뉴는 그걸로 해 드릴까요?"
"네. 부탁드립니다."
최기석은 자리에 앉아서 TV를 응시했다. 오랜만에 보는 한국 예능 프로그램이 신기하기만 했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도 TV를 거의 안 봤지만 말이다.
"두진아. 맛있니?"
"응, 맛있어. 근데 엄마는 안 먹어도 돼?"
"엄마는 너 레슨 받고 있을 때 잔뜩 먹어서 괜찮아."
등 뒤에 있는 모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TV를 보던 최기석은 어느새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었다.
꾸르르르륵.
"엄마. 밥 먹었다면서 왜 배에서 소리가 나?"
"너무 많이 먹어서 체했나 보다."
"이건 배고플 때 나는 소리잖아. 또 거짓말했구나. 나 배부르니까 이거 먹어."
아이가 그릇 미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정말 괜찮아. 우리 아들이 맛있게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다시 한 번 그릇 미는 소리가 들렸다.
"라면 불겠다. 빨리 먹어."
"……알았어."
"그건 그렇고 두진아. 손가락 아픈 건 좀 어떠니?"
"괜찮아. 이젠 하나도 안 아파."
"아픈데 숨기면 안 되는 거 알지? 뭐든지 참으면 참을수록 병이 되는 법이야."
"응."
잠깐의 대화 끝에 침묵이 찾아왔다.
최기석은 물병이 있음에도 일부러 정수기에 가서 물을 떠 왔다. 그러면서 열 살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최 선생님. 음식 나왔습니다."
김태환이 제육볶음이 담긴 접시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더 드시고 모자라면 말씀해 주세요."
"사장님. 저 잠시만 시간 좀 내주세요."
"네? 갑자기 왜?"
최기석은 의아해하는 김태환을 데리고 모자와 거리를 벌렸다.
"저분들은 어떤 분들인가요?"
"아, 두진이하고 두진이 엄마 진희 씨요? 두진이는 한국에서 천재 피아니스트로 유명해진 친구예요. 최연소에, 그것도 아시아 최초로 미국 버클리 음대에 전액장학금 받고 입학했으니까요."
"두진이가 몇 살이죠?"
"우리나라로 치면 열두 살입니다. 어리지만 대견한 친구죠. 피아노에 대한 열정만으로 미국 생활을 버티고 있으니까요."
"말씀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자리로 돌아와 제육볶음을 먹기 시작했다.
모자의 사연을 들은 후 음식이 입에 잘 넘어가지 않았다.
평소라면 한 그릇 먹고, 한 그릇을 더 시켰겠지만, 오늘은 있는 양도 소화하기 힘들었다.
"두진아, 다 먹었어?"
"응. 배불러."
"그럼 가자."
모자가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최기석은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메이죠 클리닉에서 레지던트 수련 중인 최기석이라고 합니다. 혹시 근처 카페에서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네? 왜요?"
임진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제가 두 분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한 소리 마세요. 한국 사람에게 사기당하는 건 이제 지긋지긋하니까."
"두진 엄마. 최 선생님은 그런 분 아니야."
주방 정리를 하고 있던 강윤정이 밖으로 나왔다.
"최 선생님은 내가 대상포진을 앓았을 때, 발 벗고 나서서 치료해 주신 좋은 의사 선생님이에요. 그렇게 냉랭하게 굴 필요 없어."
"……정말 믿어도 되나요?"
"날 믿는다면 최 선생님을 믿어도 좋아요."
강윤정의 말에 임진희가 날카로웠던 모습을 누그러트렸다.
"잠깐이라면 시간 내볼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나가실까요? 사장님. 잘 먹었습니다."
최기석은 음식값을 계산하고, 모자와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임진희는 팔짱을 낀 채,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표정을 지었고, 김두진은 불안한 표정으로 손을 만지작거렸다.
"일단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아까 했던 말을 다 듣고 말았습니다."
"그래서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두진이는 치료가 필요합니다."
최기석의 말에 임진희가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치료요?"
"네. 두진아. 아까 엄마한테 솔직하게 말 안 했지?"
"……."
"너 손가락 많이 아프잖아. 계속 참으면 앞으로 피아노를 못 칠 수도 있어."
"혀……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김두진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의사 선생님이니까."
최기석이 메이죠 클리닉의 직원증을 테이블에 올려놓자 두 사람이 신기하다는 듯 사원증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본 사람이 호의를 베푼다고 하니 의심 가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왜인 줄 아십니까?"
"아니요. 모르겠어요."
"두진이 어머니께 돈을 빌려 달라고 하지 않을 거니까요.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최기석의 농담에 임진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두진아. 형한테 손 좀 줘 볼래?"
"괜찮아. 선생님 말씀대로 해."
임진희의 허락을 받은 후에야 김두진이 손가락을 내밀었다.
최기석이 손가락을 몇 번 만지작거리다 김두진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억지로 참을 필요 없어. 너 아픈 거 다 아니까."
"아니에요. 전 안 아파요."
"어머니께는 거짓말하지 말라고 해 놓고, 정작 너는 거짓말을 하는구나. 안 그래?"
그의 지적에 김두진이 급하게 손을 빼고 시선을 피했다.
"두진 어머니. 두진이는 방아쇠 수지 증후군을 앓고 있습니다. 손가락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에게 주로 발생하는 질환이죠. 방치하면 통증이 심해지고, 나중에는 수술까지 받아야 합니다."
"……."
"지금 당장 치료가 필요합니다."
"말씀은 알겠지만 당장 치료비를 마련할 방법이……."
임진희의 목소리가 모깃소리처럼 작아졌다.
"괜찮아요! 나 참으면서 피아노 칠 수 있으니까."
"두진아."
"의지로 안 되는 건 없어요. 난 할 수 있어요."
김두진의 목소리가 커졌다.
어머니를 위해 나서는 아이의 모습이 최기석을 아프게 만들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필사적이랄까.
사실 아무리 응석 부려도 모자랄 때인데.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메이죠 클리닉에서 일하는 의사입니다. 지인이 치료받을 경우 치료비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부담이 덜 할 겁니다."
"그렇다면…… 애 아빠하고 상의해 볼게요."
임진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에 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최기석은 모자가 미국에서 힘겨운 생활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금전적인 문제뿐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말이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가고, 임진희가 화제를 돌렸다.
"최 선생님.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사실 예전에 한국 사람에게 사기를 당한 적이 있거든요. 그다음부터 한국 사람이면 의심부터 하게 됐어요."
"괜찮아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타지에서 우리를 배려해 준다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그럴 줄 몰랐어요."
임진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엄마, 괜찮아. 내가 있잖아. 내가 피아노로 성공해서 그 사람들 보란 듯이 좋은 집 사 줄 게."
"그래, 고맙다. 우리 아들."
"근데 엄마 전화 온 거 아니야?"
김두진이 검지로 임진희의 백을 가리켰다.
"남편에게 전화가 왔네요. 잠시만요."
임진희가 자리를 비우면서 테이블에는 최기석과 김두진만 남았다.
혼자 남은 게 어색한지 김두진은 그의 시선을 피한 채 피아노 치는 시늉을 했다.
"두진이는 피아노가 좋니?"
"네.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아니, 엄마 아빠 다음으로요."
"나이 많은 형이랑 누나들이랑 수업 듣는 게 힘들지는 않고?"
"시비 거는 사람들이 있지만 참을 수 있어요. 엄마도 아빠도 나 때문에 많이 참고 있잖아요."
김두진의 시선이 문득 한곳에 고정되었다.
한 커플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형이 사 줄까?"
"괜찮아요. 참을 수 있어요."
"두진아. 그렇게 참을 필요 없어."
최기석은 김두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 아이스크림을 시켰다.
그런데 아이스크림이 나와도 김두진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왜 그래? 안 먹을 거야?"
"네. 참을 수 있어요."
김두진이 고집스럽게 구는 통에 최기석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먼저 숟가락을 들고 맛있게 아이스크림을 퍼먹었다.
꿀꺽.
김두진의 목젖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두 눈이 아이스크림에 집중되었다.
"이야! 너무 맛있다. 내가 다 먹어 버려야지."
"혀…… 형. 하…… 한 입만 먹는 건 괜찮죠?"
"마음대로."
최기석이 아이스크림을 크게 떠먹자 김두진이 숟가락을 들었다.
뒤늦게 아이스크림을 먹는 김두진.
최기석은 아닌 척하며 아이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어때?"
"……."
"두진아?"
"너무 맛있어요."
김두진이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예전부터 너무 먹고 싶었는데…… 엄마가 돈 없어서 힘든 거 아니까 아무 말도 못 했는데."
"……."
"너무 맛있어요."
김두진이 고개를 떨어트린 채 굵은 눈물을 흘렸다.
최기석은 아이의 옆자리에 앉아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오로지 피아노만 보고 시작한 외국 생활.
김두진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넌 잘해 왔고 앞으로도 잘할 거야. 그럼 그런 의미로 남은 아이스크림은 두진이가 다 먹는 거다?"
"네."
아이스크림이 동날 무렵 임진희가 카페로 돌아왔다.
"선생님. 이제 와서 염치없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부탁드립니다. 두진이를 치료해 주세요. 치료비는 저희가 마련해 보겠습니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최기석은 모자와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콧잔등이 시큰했다.
"밤늦게 전화 드려서 죄송합니다.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최기석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