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첩산중 (6)
그날 오후.
최기석은 의국에서 처방을 입력하고 있었다.
외래를 통해 환자 두 명을 더 받아서 할 일이 늘어났다.
오더를 끝낸 후 최종적으로 잘못된 것이 없는지 살폈다. 간혹 약물의 종류나 용법을 착각하는 경우가 있었다.
"됐다."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기지개를 켰다.
등줄기가 찌르르 울리면서 온몸에 시원한 기운이 퍼졌다.
이걸로 오늘 업무는 종료다.
드르르륵.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빠진 찰나, 래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미스터 최, 진짜 멋있었어!"
"뭐가?"
"뭐긴 뭐야, 오늘 있었던 모야모야병 수술이지. 끝나갈 때쯤 보기 시작했는데 완전 최고더라."
래리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네가 세컨드라는 이야기에 걱정 많았는데, 바보 같은 짓이었어."
"칭찬 고맙다. 수술 전부터 루카스 과장님하고 다른 스태프들이랑 연습했는데,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지."
이번 수술은 무수혈 수술이라서 점 때문에 제약이 많고 위험도 많았다.
특히 마지막에 혈관을 개통하고, 출혈이 발생했던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등골이 서늘했다.
"근데 수혈 문제는 어떻게 된 거야? 그걸로 말이 많던데."
"자가수혈이라서 문제없어. 수술 전부터 환자의 피를 조금씩 모아 뒀거든."
"보통 무수혈이면 자가수혈도 인정 안 하잖아."
"그거 설득하느라 엄청 애먹었다. 머리 희끗희끗해진 거 안 보여?"
그의 농담에 래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러다가 조만간 레온도 추월하겠는걸?"
"그럴지도?"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당직의인 클레어가 의국으로 들어왔다.
인수인계를 끝낸 최기석은 곧바로 소아 중환자실을 찾았다.
베라는 중환자실 왼쪽 끝에 있는 무균실에 누워 있었다. 그래서 에어 샤워를 한 후 무균실로 들어갔다.
수액을 맞은 채 곤히 잠든 베라.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수술에 성공했다.
물론 수술로 병이 완벽하게 낫는 것은 아니지만, 적절한 치료와 경과관찰을 이어간다면 베라의 삶은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최기석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베라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상태는 비응급, 경과는 양호.
원내 감염 같은 변수가 아니라면, 곧 퇴원할 수 있으리라.
"안녕하세요. 선생님."
"베라는 괜찮은 건가요?"
중환자실을 나오는데 티나와 윌리를 마주쳤다.
"방금 경과를 보고 오는 길입니다. 현재로썬 베라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수술을 받아 주지 않으셨다면 베라는……."
부부가 고개 숙이며 감사를 표했지만, 최기석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이번 수술이 위험했던 이유.
그것은 두 사람이 끝까지 무수혈 수술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무수혈 수술만 아니었다면 베라가 위험할 일도, 스태프들이 진땀을 빼야 할 이유도 없었다.
비록 자가수혈은 허락했다지만 이들을 곱게 보기 힘들었다.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대단하신 거죠. 이 세상에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윌리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선생님, 매튜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매튜라면…… 뇌종양외과 과장님입니다."
"그런가요? 그 사람이 수술 끝나고 와서 오늘 수술에 대해서 꼬치꼬치 묻더군요. 정말 우리가 자가수혈을 허락했는지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꼬투리를 잡으려는 매튜의 움직임.
최기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닥터 최가 자가수혈이 가능한지 물었고, 저희가 허락했다고요."
"선생님, 혹시 수술 중 수혈한 피에 다른 사람 피가 섞인 것은 아니겠죠?"
잠자코 있던 티나가 껴들었다.
"의무기록을 발급받아 보면, 수술 전에 채혈한 혈액량과 수술 중 수혈한 혈액량이 일치한다는 걸 아실 겁니다."
"다행이네요. 혹시라도 다른 사람 피가 섞였으면, 어쩌나 생각했었는데."
"이봐요, 티나."
최기석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베라의 생명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 피가 섞이지 않는 게 중요합니까?"
"그…… 그야 둘 다 중요하죠."
"방금 했던 말은 후자에 더 가까웠던 것 같은데요?"
최기석의 지적에 티나가 얼굴을 붉혔다.
"어쨌든 수술은 잘 끝났잖아요. 베라도 무사하고, 수혈 문제도 없었고요. 다 잘된 거라고요."
"결과가 좋다고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베라가 다른 병으로 수술할 상황이 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겁니까?"
"……."
"……."
그의 지적에 부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지금부터라도 뭐가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정하는 게 좋을 겁니다. 베라와 두 분의 문제는 아직 진행 중이니까요."
최기석은 냉기를 폴폴 날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베라가 무사한 것에 감사해도 모자란 판국이다.
그런데 실은 다른 사람 피가 섞이지 않았나 걱정하고 있었다니…….
열불이 나서 자신도 모르게 부부를 쏘아붙였다.
지이이이잉.
가운 안에서 떨리는 콜폰, 최기석은 번호를 확인하고 통화를 연결했다.
"네, 과장님."
[미스터 최, 바쁜가?]
"아닙니다. 일과 끝나고 기숙사에 들어가려던 참입니다."
[여유가 있다면, 잠깐 봤으면 좋겠는데.]
"그럼 곧바로 집무실로 가겠습니다."
최기석은 그길로 루카스의 집무실을 찾았다.
"어서 오게. 이리 앉아."
루카스가 웃으며 그를 맞아주었고, 최기석은 그에게 인사하며 맞은편에 앉았다.
"급하게 불러서 놀랐지? 사실 특별한 건 없고, 소소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불렀다네."
"소소한 이야기를 하신다니 안심이 됩니다. 오늘 워낙 큰일이 있어서요."
"하하하. 분명 그랬지."
루카스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오늘 수술에서 자네의 공이 가장 컸어. 자네가 환자의 피를 미리 확보하지 않았다면 수술은 실패했겠지. 그런데 말이야, 예비 혈액이 있으면 집도의에게 먼저 보고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죄송합니다. 기왕이면 자가수혈 없이 수술이 끝났으면 해서 끝까지 숨기고 있었습니다."
"보기와 달리 음흉한 구석이 있군."
"네. 비록 과장님에 비하면 한없이 짧은 의사 생활을 했지만, 그동안 한 가지 배운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타인에게 제가 가진 것을 다 보여 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는 정반대로군. 이유가 있나?"
"제 밑천을 타인에게 전부 노출한다면, 상대가 저를 공격할 수 있으니까요. 오늘 자가수혈 건을 예로 들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최기석이 말을 계속했다.
"만약 제가 자가수혈로 환자의 피를 모았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알았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이 경우 상대가 나쁜 마음을 먹고, 그 혈액을 빼돌릴 수 있습니다."
"……."
"그렇게 되면 제 계획에는 차질이 생기겠죠?"
"확실히 그건 그래."
"반대로 제가 자가수혈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관련된 계략에 당할 이유도 없어지는 겁니다."
"……."
"사전에 준비한 혈액에 대해서 과장님께 말씀드리지 않은 이유, 그것은 혹시나 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절대로 과장님을 기만하거나 속이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크하하하.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야."
루카스가 갑자기 배를 붙잡고 웃었다.
그의 웃음이 메아리처럼 집무실에 퍼졌다.
"자네한테 이런 식으로 배움을 얻을 줄은 몰랐어, 그동안 내가 너무 순진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아닙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겸손하기는……. 하여간 미스터 최에게 세컨드를 맡기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군. 고마워. 오늘 일은 평생 잊지 않을 거야."
그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알림이 머리를 스쳤다.
띠링!
[킹 메이커 임무의 일부 조건을 완수하셨습니다.]
[루카스의 킹 메이커]
- 루카스와 4단계 라포 형성(4/4) 완료!
- 루카스의 감탄(1/1) 완료!
- 매튜의 평판 4단계로 감소(매튜의 현재 평판: 7), 진행 중.
알림은 확인한 최기석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이어 시스템에 필요한 임무 조건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사실 이게 가장 큰 고비기는 하지만 말이다.
매튜의 평판을 깎으려면 대체 어떤 방법을 써야 할까.
분명 허접한 뒷담화 따위로는 의미가 없을 텐데 말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루카스가 화제를 돌렸다.
"미스터 최,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매튜는 지금 전쟁 중이야. 헤드 치프 자리를 두고 경쟁하고 있지."
"……."
"이런 부탁하기는 뭐하지만, 자네가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어. 아무래도 내 순진한 마인드로는 매튜를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아서 말이야."
"좋습니다."
"흐음…… 너무 흔쾌히 허락하는군. 이럴 경우 의심하는 게 정상이겠지?"
"네."
최기석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가 미약하게나마 정치력에 눈뜨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저기 과장님? 의심했다고 끝이 아닙니다. 질문을 더 하셔야죠."
"아…… 그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자네가 적이라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앞이 깜깜해져서 말이야.
"그럴 때는 이유를 물어보세요. 왜 나를 돕느냐고."
"그럼 자네가 나를 도우려는 이유는 뭔가?"
"저는 환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뛰어난 의료 솜씨를 가진 과장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와 성향이 비슷한 루카스 과장님이 헤드 치프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음…… 그렇군."
"과장님. '그렇군'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최기석의 지적에 루카스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계속 질문을 하셔야 해요. 상대방의 속을 떠봐야 하는 겁니다. 이후에는 상대의 상황과 처치를 보면서 그 사람이 정말 나한테 원하는 게 뭔지, 믿어도 되는지를 판단하셔야죠."
"후우…… 어렵네, 어려워. 차라리 무수혈 수술을 한 번 더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
"미스터 최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는 대충 이해했어. 앞으로는 나도 조금씩 생각을 바꿔 봐야지."
"네. 분명 도움이 되실 겁니다."
최기석은 대답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환자 중심 성향의 의사들도 노력을 통해 성공 중심 성향 의사들의 계략을 배울 수 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문득 처세에 밝으면서 환자까지 생각할 줄 아는 의사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똑. 똑. 똑.
갑작스레 노크 소리가 들렸다.
루카스가 들어오라고 말하자 키가 크고, 말쑥한 남자가 집무실에 들어왔다.
"과장님, 안녕하십니까? 먼저 온 손님이 있었군요."
"아, 풀먼. 오랜만이야. 이쪽은 신경외과에서 수련 중인 기석 최라고 해. 미스터 최, 이쪽은 내일부터 우리 과에서 일할 척수신경외과 교수 풀먼이라고 해."
"만나서 반갑습니다."
"잘 부탁해요."
최기석과 풀먼이 악수를 했다.
통성명이 끝난 후 세 사람이 소파에 앉았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이제 부속병원 생활에 염증이 난 건가?"
"그런 셈이죠. 아무래도 시설 면이나 인력 면에서 부족한 게 사실이니까요."
"그래도 자네가 와 준다니 든든하군. 분명 케인도 좋아할 거야."
"전 벌써부터 무서운데요? 케인 과장님이 얼마나 부려먹을지 잘 아니까요. 콜록, 콜록."
풀먼이 입을 가리고 기침했다.
그런데 기침 시간이 길고, 기침을 할 때마다 폐 끓는 소리가 들렸다.
"기침 감기에 걸렸나? 응급실 진료라도 받아 보는 게 어때?"
"괜찮습니다. 이 정도야, 뭐."
풀먼이 끄떡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고, 최기석은 그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아…….'
순간 돌처럼 굳어 버린 몸.
최기석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계속 눈을 비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