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239화 (238/407)

첩첩산중 (4)

"뭔데, 말해 봐."

"구조 팀별로 처치한 환자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편하게 출력해 줄까?"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레지던트에게 자료를 받아서 구급차로 돌아왔다.

서류를 훑으면서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집중해서 살핀 것은 환자의 중등도.

즉 환자의 응급한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인데, 이 중증도는 의사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중증도가 가장 높은 의사는 바로 자신이었다.

그동안 자살시도 환자, 감전사고 환자, 화재 환자 등, 만만치 않은 환자들만 치료했다. 이에 비해 다른 의사들은 CPR은 필요하지만, 외상 처치도는 비교적 낮은 환자를 치료했다.

이것이 가리키는 사실은 단 하나.

응급실에서 환자를 의도적으로 분배하고 있다는 뜻이다.

최기석은 자료를 꼼꼼하게 살핀 후 한쪽에 밀어 두었다.

파커는 대체 무슨 생각일까.

* * *

다음 날 오전.

최기석은 꼭두새벽에 일어나 수술 동영상을 살폈다.

일주일 전에 촬영한 성인 모야모야병 수술 동영상이다.

같은 영상을 다섯 번이나 살핀 후 트레이닝 룸에 입장했다. 그리고 각각 집도의와 제1보조와 제2보조의 역할을 한 번씩 맡아서 수련에 나섰다.

장장 세 시간에 걸친 수련임에도 날카로운 집중력을 유지했다.

오늘은 베라의 모야모야병 수술이 있는 날.

소아 수술이자 무수혈 수술로 진행되는 만큼, 만반의 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더군다나 수술을 통해 킹 메이커 임무의 일부 조건을 완수할지도 모르고 말이다.

"후아……."

수련이 끝나고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최기석은 곧바로 기숙사를 나서 신경외과 VIP 병실을 찾았다.

얼마 전, 뇌종양 수술을 마친 VIP 환자는 경과가 좋았다.

우선 수술 후 아무런 후유증을 앓지 않았다.

감마나이프 치료를 통해 절제하지 않았던 종양의 크기를 확 줄였다.

그래서 며칠 경과를 살핀 후 퇴원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최기석은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환자의 경과를 확인하고, 신경외과 병동으로 돌아왔다.

드르르르륵.

문을 열고 한 병실로 들어갔다.

"닥터 최.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최기석은 베라의 부모인 티나와 월리,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누며 베드 옆에 섰다.

이른 아침임에도 베라는 깨어 있었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올려다보다가 방긋 웃었다.

그러더니 그를 잡고 싶다는 듯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바깥에서 이 모습을 봤으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베라의 이 사랑스러운 모습은 어쩌면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서…… 선생님. 의사 선생님."

"그래. 선생님이 오늘 베라 안 아프게 수술해 줄게."

최기석은 손을 뻗어 베라의 손을 잡았다.

앙증맞은 손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아이구, 우리 베라. 이제 의사 선생님도 알아보네. 대견하다, 대견해."

베라의 말에 티나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최기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수혈 수술에 대한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습니까?"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수혈은 시킬 수 없네요."

그의 질문에 윌리가 고개를 저었다.

예상했던 답변이었기에 최기석은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단지 수술 직전이기에 심경의 변화가 있지 않을까 찔러봤을 뿐이다.

"두 분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대신 저번에 이야기한 대로 진행하는 건 문제가 없겠죠?"

"네. 그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늘 수술 잘 좀 부탁드립니다."

부부의 시선이 최기석에게 집중되었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기석은 병실을 나온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수혈 환자의 경우 그것마저 거부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런데 최기석은 매일 끈질기게 부부를 설득해서 그것에 대한 허락을 받아 냈다. 덕분에 수술 중 변수가 발생하더라도 한고비는 넘길 수 있었다.

최기석은 그것에 대해서는 루카스에게조차 말하지 않을 작정이다.

터벅. 터벅.

복도를 걷던 중 한 병실 앞에서 걸음이 우뚝 멈췄다.

새로운 인턴이 ABGA를 하고 있었다. 알렌 테스트에서 이어진 채혈이 깔끔하게 끝났다.

'당분간 처치 걱정 없겠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새 인턴은 환자들 수액줄을 뽑아서 쫓겨난 미카엘과 정반대였다.

환자들에게 상냥해서 CS 평점도 높았고, 처치도 잘했다.

그동안 신경외과에서 있었던 잡음을 없애기 위해 인사팀에서 에이스를 배정한 듯싶었다.

"보고 계셨어요?"

병실에서 나온 인턴이 쑥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네. 처음부터 끝까지요. 잘하던데요?"

"미스터 최에 비하면 아직 멀었죠."

"처치 끝났으면 커피라도 한잔할까요?"

"네, 좋습니다."

최기석은 새로운 신경외과 인턴 오스틴과 휴게실에 자리 잡았다.

에너지 음료를 마시면서 대화가 이어졌다.

"미스터 최,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자살시도 환자를 구한 일이 있고, 총기 사건에도 휘말렸다죠? 거기에 올해 신규 레지던트 중 최초로 조기 진급에 성공했다고 하던데."

"경력이 화려하죠?"

최기석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남들은 의사 생활하며 한 번 겪어볼 일을 이미 수차례나 경험했다.

"네, 그래도 닥터 최를 닮고 싶지는 않네요. 전 조용한 병원 생활을 하고 싶거든요."

"이해합니다. 신경외과 일은 어때요?"

"할 만한 것 같습니다. 솔직히 일은 전에 있었던 순환기내과 쪽이 더 힘들었어요."

"하긴 환자야 내과 쪽이 훨씬 더 많으니까. 전공은 결정했어요?"

"일단 외과 쪽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턴 로테이션이 끝날 때쯤 한 곳을 정하려고요."

한국과 달리 미국 의사들 대부분이 외과의를 꿈꾼다.

일은 고되지만, 보상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언제쯤 외과의 위상이 올라갈 수 있을까.

최기석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날이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오스틴과 대화를 나누는데 갑자기 휴게실 문이 열렸다.

그 주인공은 바로 신디.

뇌신경외과 펠로우이자 오늘 있을 모야모야병 수술의 제1보조를 맡은 여의사다.

"미스터 최, 여기 있었네요."

"좋은 아침입니다. 신디."

"오스틴, 미스터 최와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잠시 비켜 주겠어요?"

"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오스틴이 떠나면서 회의실에는 최기석과 신디만 남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요?"

"웬만하면 이런 이야기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신디가 그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신디와는 일주일 전부터 모야모야병 케이스 스터디와 집도연습을 함께해 왔다.

항상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모습을 보여 주었던 그녀이거늘, 오늘은 어째서 위축된 모습을 보이는 걸까.

"그게 사실은요……."

"……."

"오늘 수술할 때 도움을 좀 받아야 할 것 같아요."

"그거야 당연하죠. 제가 세컨드인데."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제가 어제 손목을 좀 다쳤거든요. 살짝 삐끗한 줄 알았는데 통증이 심해서요."

신디가 입술을 깨물며 사정설명을 했다.

그녀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휴게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신디, 이번 수술에서 빠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나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에요. 짐이 될 바엔 차라리 빠지는 게 좋을 것 같다고요. 하지만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아요."

"……."

"손목을 차라리 일찍 다쳤으면 모르겠지만, 스태프들하고 호흡을 다 맞춘 상태잖아요. 미스터 최도 알다시피 루카스 과장님이 저를 엄청나게 신뢰하고 있고."

"신디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건 뇌혈관 수술입니다. 소아 수술이고, 무수혈 수술이죠. 문합 중에 동맥이라도 잘못 건드리면 끝장이에요."

"알아요, 다 안다고요. 하지만 이제 와서 대타를 구할 수 있겠어요?"

신디의 질문에 최기석은 침묵을 지켰다.

부상을 입은 신디가 수술에 들어가는 건 못마땅하지만, 대체 인력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손목 통증은 얼마나 심하죠?"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데, 포셉이나 니들홀더를 쥐면 욱신거려요.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이 심해지고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최기석은 스테이션에서 비타민제를 챙긴 후 휴게실로 돌아왔다.

"이거 드세요."

"이게 뭔데요?"

"잘 듣는 진통제입니다."

신디는 비타민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물과 삼켰고, 최기석은 적절한 타이밍에 그녀에게 페인킬러를 사용했다.

[페인킬러 스킬을 사용하셨습니다.]

[환자의 육체적 통증을 70퍼센트 감소시킵니다. 근본적인 치료가 아닌 단순 통증 경감이기에 증상을 가릴 수 있습니다. 지속효과는 일주일입니다. 일일 사용 가능 횟수 (1/2)]

"우와! 미스터 최. 이건 무슨 약이에요? 먹자마자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데요?"

신디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손목을 돌렸다.

"한국에서 챙겨온 특수한 약이에요. 효과가 아주 좋죠."

최기석은 대충 둘러대고 말을 이었다.

"지금이야 괜찮지만, 수술하다 보면 다시 아플 수 있어요. 그때는 어떻게 할 건가요?"

"제가 신호를 보낼 테니까 그때 미스터 최가 대신 처치해 주세요. 이러면 괜찮지 않을까요?"

"좋습니다."

최기석은 신디와 대화를 마친 후 휴게실을 나왔다.

오전 회의와 회진이 어떻게 끝났는지 모를 정도로 훌쩍 지나가 버린 시간.

이제 모야모야병 수술이 코앞이다.

* * *

그날 오전, C로젯 수술용 참관실.

평소에는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던 참관실이 스태프들로 가득 찼다.

루카스의 모야모야병 수술을 보기 위해 모인 신경외과 및 타과 스태프들이다.

환자의 목숨이 달린 수술에서 경중을 따지는 일이 어불성설이기는 하지만 오늘은 그 의미가 남달랐다.

현재 신경외과는 헤드 치프가 공석인 상황.

만약 루카스가 이번 수술에 실패한다면, 헤드 치프 자리는 매튜에게 넘어갈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생각보다 쉽게 풀릴지도.'

매튜는 가장 앞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응시했다.

루카스의 집도 실력은 의심치 않았지만, 소아 뇌혈관 수술을, 그것도 무수혈로 한다는 것은 폭탄을 안고 수술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표정이 좋아 보이는군."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응급의학과 과장 파커가 그의 옆자리에 앉고 있었다.

"그래 보이나?"

"암, 그렇고말고. 잘하면 손을 안 쓰고도 헤드 치프 자리에 앉게 생겼으니까 말이야."

"그거야 두고 볼 일이지."

매튜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까 자네도 표정이 좋아 보이는 걸?"

"내가?"

"모르는 척하지 마. 이번 수술 세컨드가 미스터 최라는 걸 알고 온 거잖아. 수술이 실패하면 나뿐만 아니라 자네 계획에도 청신호가 들어오겠지."

"정확히 알아봤군."

파커가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 생각에는 이번 수술 성공률이 어떤가?"

"많이 잡아서 이십 퍼센트."

"집도의가 루카스인데 너무 짠 것 같군."

"루카스라서 이십 퍼센트로 잡은 거야. 다른 녀석이었으면 십 퍼센트도 안 돼."

"그럼 기대해도 좋겠군. 자네가 헤드 치프가 될 확률이 팔십 퍼센트라는 소리니까."

파커의 말에 매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때마침 문이 열리고 모야모야병 스태프들이 로젯 안으로 들어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