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237화 (236/407)

첩첩산중 (2)

"더 좋은 소식이요?"

"네. 그게 사실은……."

라빈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사실 나도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차기작 캐스팅이 들어왔습니다."

"벌써? 차기작이요?"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들썩거렸다.

라빈이 신경정신과 치료 중이라는 기사가 뜬 후, 그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알았다.

그럼에도 차기작이 들어오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나보다 더 놀라는군요."

"솔직히 너무 뜻밖이라서요. 라빈이 아직 연기할 상황이 아니라는 건 그쪽도 알 텐데."

"네. 아주 잘 알고 있더군요. 그런데 그쪽에서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했어요. 감독 이야기를 들어 봐도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고 말이에요."

"혹시 어떤 영화인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닥터 최가 비밀만 지켜 준다면 못할 것도 없죠."

"물론입니다."

최기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라빈이 설명에 나섰다.

그의 차기작 이름은 병든 마음.

풋내기 신경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며 겪는 갖가지 애환을 담은 영화다.

여기서 라빈의 역할은 신경정신과 교수.

주인공을 가르치는 멘토 역할에 낙점되었다고 한다.

"어때요? 괜찮은 것 같지 않나요?"

"라빈이 맞기에 딱 좋은 역할이네요. 예전에 촬영했던 굿월헌팅 같은 느낌도 들고요."

"나도 굿월헌팅이 가장 먼저 떠올랐어요. 아무래도 나는 다른 사람 가르치는 역할이 제일 잘 맞는 것 같더군요. 죽은 사람의 사회 때도 그랬고요."

"동감입니다."

최기석은 라빈과 차기작에 대한 대화를 이어갔다.

아이처럼 들뜬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무척 즐거웠다.

라빈은 과거처럼 감정을 연기하지 않고, 느끼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은 시나리오를 가다듬는 중이라는 군요. 내 치료가 끝나는 대로 촬영에 들어간대요."

"잘됐네요. 라빈에게도 동기부여가 돼서, 대신 차기작 때문에 치료를 소홀히 받으면 안 됩니다."

"그건 걱정 말아요. 인간 라빈 윌리엄스가 완전해야, 배우 라빈 윌리엄스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지금은 아니까."

"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그건 그렇고 닥터 최. 애인은 있습니까?"

"네. 한국에서 교재 중인 사람이 있습니다.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요? 그거 아쉽군요."

라빈이 테이블에 놓인 커피를 마시고 말을 이었다.

"괜찮은 배우가 있어서 소개해 주고 싶었거든요. 외모야 말할 것도 없고, 마음씨까지 착한 친구여서."

"마음만 받겠습니다."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슬슬 방 구경이라도 할까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소파에서 일어나 집 안을 돌아다녔다.

방을 훑으면서 최기석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선 집이 넓고 방이 많았다.

세련된 인테리어와 각종 가구들로 눈이 즐거웠다. 마치 호텔 스위트룸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여기가 내 연기 방입니다."

"연기 방이라면……."

"말 그대로 연기를 연습하는 방이죠. 방음 장치를 해 놔서, 소리를 질러도 바깥에서 안 들립니다."

라빈이 주먹으로 벽을 가볍게 두드렸고, 최기석은 방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방에는 각종 의상과 소품들이 놓여 있었다.

한쪽에는 연기파 배우들이 출연한 작품의 DVD와 이를 볼 수 있는 간이 상영실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라빈이 연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닥터 최는 모르겠지만, 이것들은 허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부 돈으로 구입한 것들이니까요. 허름한 쪽방에 있더라도, 아니 쌀쌀한 야외에 있더라도, 연기 연습을 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죠. 사실 사람을 키우는 건 도구가 아니라 시간이에요."

터벅. 터벅.

라빈이 진열대로 이동해서 DVD를 꺼냈다. 그리고 이를 물끄러미 내려 보다가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최기석은 그가 죽은 사람의 사회란 DVD를 쥔 것을 보고 대충 상황을 알아차렸다.

"라빈, 괜찮아요."

"미안합니다. 갑자기 얼마 전 일이 떠올라서. 사실 이 작품 때문에 목매달고서 죽을 생각이었거든요. 닥터 최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

"힘든 시간을 보냈으니, 그럴 수 있습니다."

최기석이 어깨를 토닥거리자 라빈이 끝내 눈물을 흘렸다.

"추태를 보이고 말았군요. 이러려고 여기에 들어온 건 아닌데."

"아니요, 전 오히려 라빈 눈물이 반가웠습니다."

"진심입니까?"

"네,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다는 게 느껴졌거든요. 라빈은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할 겁니다."

라빈에게 격려를 걸어 주자 그의 얼굴이 다소 환해졌다.

"고마워요. 닥터 최. 덕분에 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닥터 최를 만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이 방에서 끝나고 말았겠죠. 정말 고맙습니다."

라빈이 그의 두 손을 붙잡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띠링!

[레전드 아이템, 또 다른 삶을 획득하셨습니다.]

[백만 P.

P를 소모하여 아이템 해방이 가능합니다. 해방 전까지 아이템의 효과는 알 수 없습니다.]

'백만 P.

P?'

최기석은 속으로 혀를 찼다.

보유 중인 또 다른 레전드 아이템 시간을 넘어서.

이것을 해방하는 데 필요한 P.

P가 오만이다. 그런데 새로 얻은 레전드 아이템은 스무 배가량의 P.

P가 더 필요했다.

대체 이 아이템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기에…….

"닥터 최, 괜찮아요? 갑자기 왜……."

"아, 죄송합니다. 병원 일이 떠올라서요."

"방 구경은 이쯤하고, 슬슬 점심이라도 하죠. 와이프 음식 솜씨가 좋으니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네."

최기석은 라빈과 1층으로 내려갔다.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기숙사에서 옷을 갈아입은 후 응급실로 향했다.

라빈과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구조 팀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상점을 모아서 조기 진급하는 것.

그것이 현재 가장 시급한 과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응급실에 도착하자 구조 팀 의사들이 게시판에 몰려 있었다.

게시판에 저번 주 구조 실적이 붙어 있었다.

실적의 지표는 크게 세 가지인데 출동 횟수와 처치 정확도, 환자 회복률이다. 실적을 내림차순으로 정리했기에 의사 간 격차를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과연 파커답다고 할까.

"이번에도 미스터 최가 일등이네."

"과장님이 밀어주는 거 아니야? 어떻게 계속 일등을 할 수가 있지?"

"야! 저기 미스터 최 온다. 입 다물어."

구조 팀 의사들이 최기석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뒷담화를 할 거면, 안 들리게 하던가.'

최기석은 쓴웃음을 지으며, 게시판 앞에 섰다.

실적 2위가 니콜라이, 3위가 모건이며, 나머지 의사들은 비슷비슷한 수준을 보였다.

"다들 실적표는 마음에 드나?"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파커가 팔짱 낀 채 서 있었다.

"과장님. 죄송합니다만 굳이 실적을 공개해야 할까요?"

한 수련의가 용감하게 나섰다.

"안 될 이유가 있나?"

"처치에는 다양한 변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몇 가지 기준으로 평가하는 건 부당한 것 같습니다. 여기 있는 출동 횟수만 해도 그렇습니다."

"……."

"출동을 많이 했다고 꼭 좋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출동을 많이 할수록 의사가 피곤해져서 의료의 질이 떨어질 수 있고요. 환자 회복률 같은 경우 운이 많이 작용합니다. 우리는 어떤 환자가 걸릴지 모르니까요."

말을 마친 수련의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변명은 끝났나?"

"과장님, 이건 변명이 아니라……."

"자네 말이야, 저번 주 실적이 꼴찌였어. 구조 팀 의사 중 제일 밑바닥이었다고."

파커의 지적에 수련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본인 실력에 자신 있다면, 실적 공개에 반대할 필요가 없잖아. 안 그래?"

"……."

"아니면 자네는 스스로가 부끄럽나? 다른 동기들보다 뒤처졌다는 사실이?"

"그……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레이놀드. 지금은 증명의 시대야. 자네가 직접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은 자네를 거들떠보지도 않아. 그래서 내가 자네의 말을 변명이라 한 거고."

파커가 실적표를 가리키며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이런 지표들이 있어야 역설적으로 자네들이 인정받을 수 있어. 평가 기준이 없다면, 대체 누가 좋은 의사인지 알 수 있겠나? 대답해 보게."

"……."

"마음은 이해하지만 받아들여. 이번 주 실적에서 일등을 차지하라고, 그러면 누가 자네에게 뭐라고 하겠나."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레이놀드가 바짝 기합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만치 않네.'

최기석의 시선이 파커에게 고정되었다.

사실 그 역시 레이놀드와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줄 세우기, 이것은 의사라는 직업과 어울리지 않았다.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일에 어떻게 실적을 따질 수 있을까.

이런 논리라면 응급환자는 수술조차 못 받고 사망해야 하리라.

'참자, 참아.'

최기석은 입을 꾹 다물었다.

레이놀드 편에서 파커와 토론하고 싶었지만 끝내 참아 냈다.

파커와 대립각을 세운다고 해서 얻을 이득이 없다.

예전의 그였다면 거친 말싸움 끝에 파커에게 미움을 샀겠지만 말이다.

"미스터 최, 저번 주는 아주 좋았어."

파커가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하라고."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파커가 화제를 돌렸다.

"얼마 전 뇌종양 수술 보조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

"써전이 부족해서 퍼스트를 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아셨는지……."

"자네에게 관심이 많거든. 뭐, 스토커는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 없고."

파커가 농담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신경외과에서 수련한 지 얼마 안 된 걸로 알고 있는데, 정말 대단하군. 더군다나 제1보조로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내다니……."

"매튜 과장님이 잘 이끌어 주신 덕분입니다."

"글쎄. 그 친구가 일처리를 잘했으면, 이 꼴이 나지는 않았겠지."

파커의 말이 의미심장했다.

최기석은 그와 대화를 주고받다가 주차장으로 향했다.

구조 1팀 동료들과 인사하고, 처치 도구를 챙기는데 콜폰이 울렸다.

"구조 1팀입니다."

[베이커 스트리트에서 감전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환자는 두 명이고, 현재 의식불명 상태라고 해요. 곧바로 출동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다들 출동 준비하세요!"

그의 외침에 동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위이이이잉.

사이렌 소리와 함께 구급차가 메이죠 클리닉을 벗어났다.

최기석은 환자 상태를 예상하며 치료계획을 세웠다.

저번에 출동으로 느낀 것이지만, 구조 팀이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치료는 한정되어 있었다. 아무리 처치 도구를 넉넉하게 챙긴다고 해도, 수술까지 가능한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바이탈 유지와 외상처치.

그는 이 두 가지가 구조 팀 업무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도로를 질주하던 구급차가 멈춰 섰다.

타다다다닥.

최기석은 응급함을 한 손에 들고 전신주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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