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234화 (233/407)

구조 팀에서 (5)

"의사는 생각보다 피곤한 직업이군요.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써야 하다니……."

"안 그래도 요새 피곤해 죽겠습니다. 여기 눈 밑에 다크써클 보이나요?"

"네. 아주 잘 보입니다. 누가 보면 판다인 줄 알겠어요?"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냉랭했던 분위기가 다소 밝아졌다.

"그건 그렇고 할 말이란 게 뭡니까? 사람 대 사람으로 하고 싶은 말이라는 거요."

"사실 카터가 전과한 후에야 카터의 피아노 연주를 들어봤습니다. 제가 몰랐을 뿐이지 정말 대단한 피아니스트라는 걸 깨달았죠."

"그래요.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꽤 괜찮은 피아니스트였었죠."

카터가 과거형을 강조했다.

"그런데 동영상을 보던 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순한 영상 대신 카터의 연주를 직접 듣고 싶다는 생각이요. 실제로 들으면 더 대단할 것 같아요."

"닥터 최도 알겠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지금 내 꼴로는……."

카터의 시선이 본인의 손가락으로 향했다.

"설마 한 손으로 연주해 달라는 건 아니겠죠?"

"아닙니다. 전 두 손 연주가 듣고 싶어요. 카터가 전심전력을 다 하는 연주를 말입니다."

최기석이 말을 이었다.

"오늘 재활치료 하는 과정을 잠깐 지켜봤습니다. 저 역시 손을 쓰는 외과의라서 카터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충분히 상상이 가더군요."

"……."

"이건 순전히 제 욕심입니다만, 카터가 재활치료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아……."

최기석의 말에 카터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내 인생은 끝났어요. 난 그저 반푼이일 뿐이에요. 재활치료로 완벽히 낫는다는 보장도 없고."

"네. 잘 압니다. 제가 이래라저래라 할 입장이 아니라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참견을 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에요. 하지만 저는 봤습니다."

"뭐를 말입니까?"

"치료받는 도중 마비가 일어나지 않은 손으로 건반 두드리는 시늉을 했던 걸요."

최기석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테이블 아래로 내려간 그의 손은 여전히 피아노를 원하고 있었다.

"피아노, 포기하고 싶은 게 아니죠?"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카터가 시선을 피했다.

"지금 재활하지 않으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겁니다."

"그건 알지만……."

"카터.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도움을 줄 수도 있어요."

최기석의 말에 카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홀에 있던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울려 퍼졌다.

"혹시 이 곡 압니까?"

"당연히 알죠."

최기석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호수와 하늘이 떠오르는 밝고 따스한 연주곡.

카터의 자작곡이자 지금의 그를 있게 해 준 Sweet Weather.

뉴튜브에서 처음 주목받았고 나중에는 CM송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얻었다.

"이 곡을 작곡했을 때 난 찢어지게 가난했죠. 지금의 아내랑 사귀고 있었는데 돈이 없어서 항상 집에서 데이트했어요."

"……."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나는군요. 그때는 피아노와 아내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카터가 먼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닥터 최. 내가 정말 재활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피아노의 신이 있다면 분명 카터를 도울 겁니다. 저는 그렇게 믿어요."

"후우…… 그럼 해 봅시다. 몇 달, 몇 년이 걸리더라도."

카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띠링!

카터와 라포를 형성하였습니다.

NEW [라포 2단계 - 믿음]

최기석은 알림을 확인하고 미소 지었다. 드디어 카터가 마음의 문을 열었다.

"솔직히 그동안 무서웠습니다. 재활치료를 한다 해도 전과 똑같아진다는 보장이 없고, 혹시 복귀하면 예전만 못하다는 이야기를 들을까 봐요."

"……."

"그래도 이겨 내 보겠습니다. 피아노 없는 내 인생은 상상하기조차 싫으니까요."

"네. 잘 생각했어요."

최기석은 카터와 대화하는 중에 스킬을 사용했다.

[격려 스킬을 사용하셨습니다.]

[격려받은 대상의 감정이 밝아집니다.]

[면역력, 저항력, 재생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라포 2단계에 보너스를 얻었습니다. 삶에 대한 의지가 더욱 확고해집니다.]

[재생의 빛 스킬을 사용하셨습니다.]

- 재활 치료를 받을 경우 환자의 재활 속도 및 경과를 1.5배 상승시킵니다.

- 재활의 범위는 물리적인 부분과 정신적인 부분을 포함합니다.

- 레벨이 오를수록 재활 속도 및 경과 상승폭이 증가하며, 재활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3퍼센트 확률로 특수능력을 얻습니다.

- 지속시간은 7일입니다.

스킬을 받은 카터는 더욱 밝아졌다.

신경질적이었던 이전과 달리 종종 미소를 짓기도 했다.

라포를 더 쌓아서 정언명령까지 걸어 준다면 재활에 한층 속도가 붙으리라.

최기석은 카터와 대화를 마치고 병동으로 돌아왔다.

의국에서 밀린 처방을 내리고 있는데 니콜라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미스터 최. 지금 회의실로 가봐."

"왜?"

"매튜 과장님이 널 찾아."

"과장님이? 왜?"

최기석이 되물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킹 메이커 임무로 매튜와는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그의 호출이 반가울 리 없었다.

"자세한 건 나도 몰라. 회의실에 스태프들 모인 거 보면 수술 때문인 것 같은데?"

"알았어."

최기석은 곧바로 회의실을 찾았다.

니콜라이의 말대로 스태프들이 자리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의료의 신 납셨네. 주인공 아니랄까 봐 제일 늦게 오는 것 봐."

신경외과 레지던트 2년 차 칼이 빈정거렸다.

"보자마자 비웃는 이유가 있습니까?"

"새삼스럽게 모르는 척하기는."

"매튜 과장님이 부르셨다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다른 건 아무것도 몰라요."

"확실해?"

"제가 거짓말할 이유가 있습니까?"

최기석이 당당하게 나서자 오히려 칼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칼의 설명이 이어졌다.

스태프들이 회의실에 모인 이유.

그것은 삼십 분 앞으로 다가온 뇌종양 수술의 최종 브리핑을 위해서다.

"오늘 스크럽 일정은 다 끝났어요. 저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아……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네. 그럼 과장님이 너한테만 이야기 안 했다는 거야?"

"아까부터 계속 말했지만 전 아무것도 들은 게 없습니다. 자세하게 말해 주세요."

"너, 이번 수술 제1보조잖아."

칼의 말이 뒤통수를 강타했다.

최기석은 돌이 된 것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매튜가 호출했다기에 회의실로 왔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뇌종양 수술 제1보조가 됐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난생처음 겪는 상황이라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우와. 진짜 몰랐나 보네."

"어떻게 수술 당일에 퍼스트(제1보조)를 바꿀 수 있죠? 그것도 당사자에게는 한마디도 안 하고?"

"매튜 과장님 왜 그러신데? 이런 적 처음이잖아."

스태프들 역시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이런. 당했다!'

뒤늦게 매튜의 의도를 파악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자신을 엿 먹이기 위해 이런 상황을 만든 게 분명했다.

사전에 공부하지 못하도록 수술 당일에 보조로 뽑은 점, 제2보조가 아닌 제1보조라는 중책을 맡긴 점.

이 두 가지만 봐도 함정의 냄새가 솔솔 풍겼다.

칼이 보자마자 빈정거린 이유도 지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신경외과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녀석이 제1보조를 한다니 배알이 꼴렸으리라.

드르르륵.

때마침 문이 열리고 매튜가 안으로 들어왔다.

곧바로 최기석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뒷자리에 앉았다.

"미스터 최. 곧 있을 수술 이야기는 들었겠지?"

"네. 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를 수술 보조로, 그것도 퍼스트로 세운다고 들어서 놀랐습니다."

"아…… 그거? 다 자네를 위해서야."

매튜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자네는 레온 다음 가는 기대주잖아. 이런 돌발 상황도 경험해 볼 필요가 있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자 병원 일 아닌가."

'뻔뻔한 자식.'

최기석은 하마터면 생각을 입 밖으로 낼 뻔했다.

"과장님의 뜻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이 수술 보조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유는?"

"사전에 공부했다면 모를까 뇌종양 수술에 대한 제 지식과 경험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환자를 위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뭘 모르는 모양이군. 자네가 보조로 들어가는 게 환자를 위한 길이야."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답답하기는. 수술 스케줄 표를 확인해 보라고."

최기석은 매튜의 지시를 따른 후 헛웃음을 들이켰다.

수술 스케줄이 이미 꽉 차 있었다.

특이하게도 정작 이번 뇌종양 수술에 보조를 할 써전들이 어렵지 않은 수술에 들어갔다.

즉 매튜의 올가미는 오래전부터 완성되었던 셈이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자네가 빠지면, 이 수술의 써전은 나와 칼뿐이야."

"……."

"질문 끝났으면 브리핑 시작하지."

매튜의 고갯짓에 칼이 단상 위로 올라갔다.

"환자의 이름은 제리. 나이는 45세로 VIP실에 입원 중인 주 상원의원입니다. 일주일 전 두통과 구토 및 눈의 유두부종 증상으로 외래에 내원했으며, 이후 MRI 촬영 결과 뇌간 부위에서 3센티미터의 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칼의 설명이 이어졌다.

환자에게 발견된 종양은 역행성 핍지교종.

뇌종양의 경우 다른 종양처럼 TNM 분류를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종양의 크기와 특성을 감안해서 1단계에서 4단계까지 병기를 결정짓는다.

이 환자의 경우 종양이 3단계까지 진행됐다.

"수술적 처치의 경우…… 예정입니다. 이상으로 브리핑을 마치겠습니다."

브리핑을 마친 칼이 자리로 돌아갔다.

"슬슬 시간이 됐으니 다들 일어나자고."

"네!"

스태프들이 매튜를 뒤따랐다.

"미스터 최. 아까는 미안했어. 난 이런 상황인 줄 몰랐지."

같이 걷던 칼이 작게 속삭였다.

"괜찮아요. 지금은 이해하니까."

"근데 정말 괜찮겠어? 이건 누가 봐도 미친 짓이라고."

"나도 알지만, 딱히 방법은 없어요."

"진짜 과장님 머릿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 건지."

칼의 시선이 매튜의 뒷모습에 고정되었다.

자신이 최기석이라면 비명을 지르고 회의실을 박차고 나왔을지 모른다.

수술 지식이 까막눈인 상태에서, 한 시간 전에 수술 보조 통보를 받고, 제1보조를 하게 되다니.

이건 맨정신으로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다.

한편 최기석은 상황을 돌이켜 보며 생각에 잠갔다.

매튜가 함정을 판 것은 확실하지만 어쩌면 전화위복이 될지 모른다.

수술 실패 시 매튜 역시 책임을 회피하지 못한다.

제1보조로 자신을 쓴 것에 대한 것도 비판도 받을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그의 평판이 깎이면 킹 메이커의 임무 중 하나인 평판 깎기를 완수할 수 있었다.

'그래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수술이 실패한다는 것은 곧 환자의 죽음을 의미한다.

아무리 임무가 중요해도 생명과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벅. 벅. 벅. 벅.

수술실에 도착한 스태프들이 나란히 서서 스크럽에 나섰다.

이윽고 미카엘이 환자가 누운 침상을 끌고 로젯에 도착했다.

마취의가 전신 마취하는 사이, 미카엘이 타임아웃을 진행하고, 다른 스태프들이 각자의 위치에 섰다.

[아무리 복잡해 보여도 수술의 원리는 세 가지뿐이야. 잘라 내고, 가르고, 이어 붙이고.]

최기석은 언젠가 장혁필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문득 그의 시선이 맞은편에 있는 매튜에게 향했다.

'네 마음대로는 안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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