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233화 (232/407)

구조 팀에서 (4)

환자의 진단명은 고혈압성 뇌출혈.

오랫동안 고혈압에 영향을 받은 혈관이 터져 버린 질환이다.

이 환자의 경우 피가 굳어서 단단해진 혈종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응급이 아니라는 점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조금 전에 CABG가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흉부외과에서 추가적으로 관리할 부분은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그럼 신경외과로 전과시켜 주세요. 자세한 검사는 해 봐야겠지만 고혈압성 뇌출혈이 의심됩니다."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흉부외과 레지던트와 대화를 끝내고, 환자의 증상과 의증(의심 가는 질환) 및 검사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흉부외과 병동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곧 인턴을 보내겠습니다."

"네. 잘 좀 부탁드립니다."

최기석은 곧바로 병동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가운에 넣어둔 콜폰이 갑작스레 요동쳤다.

'누구지?'

낯선 번호를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메이죠 클리닉 신경외과 소속 기석 최입니다."

[내가 누구게요?]

"장난 전화면 바로 끊습니다. 빨리 용건을 말하세요."

[형. 진짜 섭섭하네요. 진짜 제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최기석은 잠시 고민하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뒤늦게 깨달았다.

전화 건 사람의 정체를.

"정혁이구나."

[네! 맞아요. 아무리 오랜만에 전화해도 그렇지 어떻게 제 목소리를 잊을 수 있어요?]

"형이 요새 워낙 바빠서 말이지. 그건 그렇고 전화번호 바뀌었니?"

[네. 얼마 전에요. 하여간 오랜만에 형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요. 미국 생활은 잘하고 계세요?]

"그래. 아직까지는."

[사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했어요. 저요. 서운대 의대에 합격했어요! 대박이죠?]

"서운대 의대? 정말? 축하한다."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서운대 의대는 수능 성적 상위 0.1퍼센트가 되어야 갈 수 있다. 김정혁이 공부를 열심히, 잘하고 있는 건 알았지만 설마 서운대 의대에 갈 줄은 몰랐다.

[다 형 덕분이에요. 형이 아니었으면, 전 재활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후유증으로 바보처럼 지냈을 거예요.]

"아니. 내 역할보다는 네 역할이 컸어. 네가 힘든 시절을 잘 이겨 낸 거야."

[헤헤. 정말요?]

"그럼. 그럼."

최기석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보육원에서 처음 본 김정혁을 모습을, 충수절제술의 후유증으로 생기를 잃어버린 모습을,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모습을 말이다.

그랬던 그가 벌써 의대에 들어갔다니…….

문득 세월이 참 빨리 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혁아. 정말 축하하고, 형이 한국에 가면 좋은 선물 사 줄게."

"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김정혁이 말을 이었다.

[형. 해진이 형도 분명 하늘에서 기뻐하고 있겠죠? 사실 해진이 형한테 부끄럽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했거든요.]

"그래. 분명 널 자랑스러워하고 있을 거야."

해진이라는 이름에 순간적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그것은 이제는 세상에 없는 이름, 과거 자신의 이름이었다.

[지금도 가끔씩 해진이 형이 보고 싶어요. 해진이 형이 살아 있었으면, 같은 병원에서 일할 수도 있었을 텐데…….]

"……."

[아. 그렇다고 형이 싫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해진이 형이 기석 형보다 조금 더 좋다고요.]

"뭐. 그 정도는 내가 이해해야지. 난 원래 마음이 바다처럼 넓은 사람이니까."

[우와. 자기 입으로 마음이 넓다고 하시네요?]

"안 될 것도 없지. 사실이니까."

그의 농담에 김정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바쁘실 텐데 그만 끊을게요. 한국에 오시면 꼭 연락해 주세요. 꼭이에요!]

"알았어. 다음에 보자."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걸음을 계속했다.

스테이션을 지나쳐 복도를 걷는데, 한 병실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 의사 맞아?"

"……."

"의사가 환자 가지고 장난치면 어쩌자는 거야? 네가 그쪽 장난감인가? 입이 막혔나? 왜 대답을 못 해?"

깡마른 환자가 인턴 미카엘을 다그쳤고 미카엘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새빨간 얼굴은 당장 터질 것만 같았다.

"미카엘, 무슨 일이에요?"

"그게…… 환자 ABGA(동맥혈 채혈)를 세 번 연속으로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이봐요. 그쪽은 뭔데 껴들어?"

깡마른 환자의 시선이 최기석에게 옮겨졌다.

"신경외과 레지던트 기석 최입니다. 본의 아니게 불편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

"미카엘을 대신해서 제가 채혈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해요."

환자가 얼굴을 구기며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당신까지 실패하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고객 서비스실에 민원 넣을 거라고!"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알렌 테스트로 요골동맥의 상태를 확인하고 ABGA 채혈에 나섰다.

푸우우욱.

바늘을 찌르자 주사침에 빨간 피가 맺혔다.

최기석은 적당량의 피를 뽑은 후 주사기를 뺐다.

"다 끝났습니다. 솜은 문지르지 말고 가만히 누르고 계세요."

"뭐야. 별로 아프지도 않네. 이봐요. 이렇게 쉬운 걸 계속 실패했어요?"

채혈이 끝나자 깡마른 환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미카엘에게 다가갔다.

당장 몸싸움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다.

"ABGA 채혈은 일반 채혈보다 난이도가 높습니다. 미카엘은 인턴이고 아직 처치에 미숙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환자분께서 마음을 너그럽게 가져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닥터 최. 이 사람 말이에요."

깡마른 환자가 씩씩거리며 말을 이었다.

"채혈 실패하고 나서 계속 내 혈관을 탓했단 말입니다. 본인 실력이 부족하니까 정중하게 사과했으면 내가 이렇게까지는 안 나왔지."

"……."

"이봐요. 미카엘 내 말이 틀려요?"

"네. 맞습니다. 환자분 혈관이 좋지 않다고 탓했습니다."

"내가 왜 길길이 날뛰었는지 알겠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은 그냥 못 넘기겠네."

깡마른 환자가 검지로 미카엘을 가리켰다.

"당신. 오늘 중으로 민원 넣을 테니까 단단히 각오해."

"환자분. 지금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저를 봐서라도 한 번 더 생각해 주세요. 이 친구 교육은 확실히 하겠습니다."

최기석의 부탁에 깡마른 환자가 잠시 머뭇거렸다.

"좋아요. 딱 이번 한 번만 그냥 넘어가겠어요. 비슷한 일이 벌어지면, 정말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미카엘은 잠깐 나 좀 봐요."

"네."

최기석은 미카엘과 휴게실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말없이 에너지 음료 캔을 뽑아서 그에게 건넸다.

"속상하죠?"

"……."

"ABGA는 인턴들이 힘들어하는 처치 중 하나에요. 여러 번 실패했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 없어요."

"……네."

"하지만 환자 혈관을 대놓고 탓한 건 명백한 미카엘의 잘못이에요. 환자 입장에서는 실패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걸로 느낄 테니까."

"선생님 말씀은 이해하지만, 환자 혈관이 정말 나쁘지 않았나요?"

미카엘이 억울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솔직히 환자 팔도 얇고, 혈관도 잘 안 보이던데. 저 다른 환자 ABGA는 잘해 왔어요."

"미카엘. 아직까지 환자 탓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잖아요. 꼴에 환자라고 유세 부리기는. 바깥에서 만났으면. 아오!"

미카엘의 태도에 최기석은 혀를 찼다.

잘못을 적당히 지적하고 위로해 주려 했건만, 미카엘은 싹수가 노란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미카엘. 미쳤어요?"

"네? 제가요?"

"왜 계속 환자 탓을 하는 겁니까?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난 어떻게 한 번에 채혈에 성공했죠?"

"……."

"어처구니가 없군요. 환자를 책임져야 할 사람이 환자를 탓하고 있다니."

"아니. 선생님. 그러니까……."

"변명 따위는 집어치워요! 그러려고 데려온 거 아니니까."

최기석이 언성을 높이자 미카엘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남 탓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세요. 미카엘이 입원했는데 의사가 채혈을 연달아 실패하고 혈관 탓을 하면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

"오늘은 처음이라서 넘어갈게요. 단 환자에게 비슷한 말이 또 나오면 그때는 과장님께 보고할 겁니다."

"……."

"대답 안 해요?"

"아…… 알겠습니다."

쾅!

문을 거칠게 닫고 휴게실을 나왔다.

최기석이 떠난 후 미카엘은 에너지 음료를 다 마시고 손으로 구겼다.

"조기 진급했다고 건방 떠는 거 봐. 지는 뭐 처음부터 잘했나? 괜히 지랄 떨고 난리야."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수술 스크럽을 끝내고, 신경과 병동을 찾았다.

피아니스트 카터를 만나기 위해서다.

비록 자신의 손을 떠난 환자지만 아직 그를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미스터 최. 무슨 일이에요?"

신경과 레지던트 케넌이 그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반가워요. 케넌. 얼마 전에 편측마비로 전과한 카터 알죠? 병실에 없는 것 같은데, 혹시 어디로 갔나요?"

"지금 재활치료실에 있을 거예요. 얼마 전부터 재활치료 들어갔거든요."

"혹시 경과는 어떻게 될까요?"

"솔직히 썩 좋지는 않아요. 신경 손상이 생각보다 커서요. 근력 운동으로 극복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케넌이 최기석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카터는 왜요? 이제 신경외과와는 상관없는 환자 아닌가요?"

"카터는 제가 신경외과 들어와서 처음 받은 환자라서요. 다른 환자보다 더 애착이 가네요."

"그렇군요."

"하여간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케넌과 대화를 마치고 재활치료실로 향했다.

재활치료실은 클리닉 지하 1층에 위치했는데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운동치료, 작업치료, 언어치료 등등.

재활치료사와 환자가 일대일로 붙어서 각종 치료가 진행 중이다.

한참 환자를 훑던 중 치료 중인 카터를 발견했다.

카터는 공을 손으로 쥐었다가 펴는 치료를 하고 있었다.

아이도 할 수 있는 간단한 동작이지만 카터는 그마저도 하지 못했다.

공에 손을 뻗는 것조차 힘겨운 모습.

최기석이 본 동영상 속에 그는 세상 누구보다 화려하게 손을 움직였거늘.

치료가 계속되면서 카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에이 씨!"

카터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해 멀쩡한 손으로 공을 집어 던졌다.

"환자분. 진정하세요. 이 정도면 아주 잘한 겁니다."

"잘해? 이게 잘한 거라고? 공에 손 한 번 못 갖다 댔는데?"

"재활치료 첫날입니다. 한 번에 동작에 익숙해질 수는 없어요."

"됐어. 때려치워!"

카터가 신경질을 부리자 재활치료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치료가 중단되면서 대기하고 있던 의료보조 인력이 그를 휠체어에 태웠다.

"안녕하세요."

"안녕 못합니다."

최기석의 인사에 카터가 인상을 찌푸렸다.

"괜찮으면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난 할 말 없어요."

"저는 할 말이 있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카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참나 이해할 수가 없군요. 난 이제 닥터 최 환자도 아닌데 대체 왜 이러는 거죠?"

"환자 대 의사로 이야기 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사람 대 사람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뿐이에요."

"좋습니다. 그럼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보조분은 올라가서 일 보세요. 환자분은 제가 병실로 모실 테니까."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휠체어를 끌고 1층 카페로 이동했다.

두 사람은 신경전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동안 서로를 지켜보기만 했다.

이윽고 최기석이 시킨 음료가 나왔다.

"뭡니까? 커피 안 시켰어요?"

카터는 두 잔의 허브티를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커피는 평형감각을 떨어트려서 재활치료에 좋지 않거든요. 참고로 짠 음식도 자제하는 편이 좋습니다."

"허허허. 참나."

최기석의 설명에 카터가 실소를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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