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 팀에서 (3)
"바쁘다고 하면 바쁘고, 바쁘지 않다고 하면 바쁘지 않다고도 할 수 있지."
"고약한 말버릇은 여전하군."
매튜가 피식 웃으며 소파에 앉았고, 집무실 의자에 앉았던 파커도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이 구조팀 활동 첫날이었지?"
"맞아. 지금까지 보고서 보느라 눈이 빠질 지경이었어."
"실적은 어때?"
"10점 만점에 6점."
"생각보다 후한 점수군. 자네의 10점 스코어에서 5점을 넘는 경우는 많지 않으니까."
"암. 당연히 그래야지. 메이죠 클리닉 단독 프로젝트가 아니라 주의 지원까지 걸려 있는 일이잖나."
파커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신경외과에 미스터 최라는 수련의가 있지?"
"있어. 왜? 혹시 사고라도 쳤나?"
"그래. 대형사고를 쳤지."
파커는 최기석이 처치한 내용을 매튜에게 들려주었다.
"어째 표정이 좋지 않은걸? 자랑스럽지 않나? 이만한 솜씨의 레지던트가 자네 과에서 수련 중이라는 게?"
"전혀."
매튜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미스터 최는 루카스 편이라고. 내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루카스의 편이라……. 충분히 그럴 만하군. 앞뒤 안 가리고 기관절개술 한 걸 보면, 자네보다는 루카스와 더 잘 어울린다고 봐야지."
파커의 말에 매튜가 침묵을 지켰다.
"그건 그렇고 차기 헤드 치프 선출 건 말이야. 자네가 힘 좀 써 줄 수 없겠나?"
"내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자네가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일이 좀 꼬였어. 흉부외과에 헤드 치프 닥터 송 알지?"
"모를 리가 있나. 우리 클리닉 간판 중 한 명인데."
"얼마 전 닥터 송이 공개적으로 루카스를 지지하겠다고 나섰어."
뿌드드득.
매튜는 말을 마치고 이를 갈았다.
송명진이 나서지 않았다면, 높은 확률로 자신이 차기 헤드 치프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나서면서 선거의 판도가 조금씩 바뀌는 중이다.
송명진을 존경하는 인물들의 표가 고스란히 루카스에게 갈 판국이다.
"맹탕인 루카스가 선수 친 건 아닐 텐데…… 그럼 닥터 송이 세력을 넓히려고 하는 건가?"
"그건 아니지."
파커가 휘휘 고개를 저었다.
"닥터 송은 그럴 만한 인물이 못 돼. 그저 루카스를 인간적으로 좋아해서 그런 것뿐이라고."
"어쨌든 내 상황이 좋지 못한 건 사실이야. 이런 타이밍에 동기인 자네가 힘을 써 주면 정말 고마울 텐데 말이지. 자네 영향력은 닥터 송 이상이지 않나?"
매튜의 시선이 파커에게 고정되었다.
파커는 각 과의 관리자들은 물론이요, 부병원장과도 친분을 맺고 있었다. 그를 통하면 메이죠 클리닉에서 닿지 못할 사람이 없을 정도다.
"글쎄. 생각 좀 해 봐야겠는데?"
"파커. 정말 이러긴가?"
"자네를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것과 일적으로 돕는 건 전혀 다른 영역이야. 잘 알지 않나?"
"그거야 그렇지만……."
"내 부탁을 들어주면 한 번 고려해 보겠어."
"말만 해 봐. 내 심장을 떼어 주는 일이 아니라면 뭐든지 하지."
"그러면 말이야. 미스터 최를 쳐 냈으면 좋겠군."
"쳐 내라니. 대체 무슨 뜻인가?"
"큰 건수 하나 잡아서 수련 생활을 못 하게 만들라는 말이지. 신경외과에서 떨어지면 내가 선심 쓰듯이 응급의학과로 받아 주면 되니까."
"허허. 오늘 참 여러 번 놀라는군. 무슨 날인가?"
매튜는 테이블에 놓인 커피를 마시고 말을 이었다.
"미스터 최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물론. 잘만 키우면 응급의학과의 간판으로 떠오를 거야. 젊음과 실력을 동시에 갖춘 천재 의사, 지금까지 이런 캐릭터는 없었거든."
"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약속하게. 미스터 최를 쳐 내면, 나를 돕는다고."
"물론이야. 그렇게만 된다면 자네가 차기 헤드 치프가 되는 건 기정사실이야. 나만 믿으라고."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인데, 자네는 곰에 탈을 쓴 여우야. 그 순박한 외모를 보고 누가 이런 모사꾼인 줄 알겠나?"
"칭찬으로 듣겠네."
파커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 *
다음 날 아침.
최기석은 기숙사에서 트레이닝 룸 모드 3회 입장을 마치고, PVP 모드에 입장했다.
오늘의 대결 상대는 스승 송명진이고, 대결 종목은 CABG(관상동맥 우회술)다.
'CABG라면 할 만해.'
최기석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반대편 수술대를 응시했다.
가상의 송명진이 수술대 앞에 서 있었다.
[지금부터 CABG 수술을 시작합니다.]
알림이 울리기 무섭게 양쪽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최기석은 정중흉골 절개술로 수술 시야를 확보한 후 이식 혈관 확보에 나섰다.
'이런. 초반부터…….'
내흉동맥을 살피던 중 미간을 찌푸렸다.
CABG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이식편이 내흉동맥이다.
문제는 환자의 내흉동맥이 늘어지고, 탄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다른 이식편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알렌 테스트."
최기석의 외침에 스태프가 알렌 테스트에 나섰다. 이에 스태프가 손가락으로 환자의 요골동맥을 꾹 눌렀다.
시간이 지난 후 손가락을 떼자 혈색이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테스트 결과는 실패.
믿었던 요골동맥마저 이식혈관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최기석은 입술을 깨물며 집도 중인 송명진을 힐끔 응시했다. 공백이 생긴 자신과 달리 송명진은 일사천리로 수술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경험의 차이랄까.
내흉동맥을 이용한 CABG라면 스승에게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돌발 상황이 벌어지자 대응법에서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초조하게 이를 부딪치던 중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최기석은 개복 수술을 통해 위 대망동맥을 박리해 냈다.
대망동맥은 이식혈관으로 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길고 굵기도 3~5mm로 적당했다.
"5-0 Prolene."
끼기기긱.
봉합침으로 니들홀더를 조이고, 본격적인 봉합에 나섰다.
우선 대동맥에 이식혈관을 연결한 후 협착 부위와 조금 떨어진 곳에 새 혈관을 문합했다.
문합이 진행되면서 완성되는 Y자 모양의 혈관.
일명 Y 그래프트가 초고속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조금만 더!'
문합에 열을 올리는 찰나, 야속한 알림이 흘렀다.
[수술이 종료되었습니다.]
[상대 써전 송명진이 먼저 CABG를 완수하였습니다. 송명진의 종합 수술 랭크 S. 당신은 패배하였습니다.]
알림과 함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아직 멀었구나."
저절로 탄식이 흘렀다.
적어도 CABG라면 스승과 어깨를 겨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CABG는 그동안 가장 많이 연습한 수술이고, 유일하게 마스터리를 4단계나 찍은 수술이기에.
하지만 자신감은 보기 좋게 무너졌다.
지금부터는 수술 과정을 암기하는 게 아니라 상황에 대처하는 법.
그것을 키워야 함을 피부로 느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샤워 후 병동으로 향했다.
현재 그가 가진 임무는 총 세 가지다.
그중 가장 중요한 임무는 하이어 시스템과 관련된 임무인 킹 메이커, 이를 위해서는 루카스와 라포를 쌓고, 그에게 실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더불어 매튜의 평판도 깎아야 하고 말이다.
'평판 깎는 건 천천히 생각하고, 일단 무수혈 수술에 집중하자.'
최기석은 다른 임무들을 떠올렸다.
다른 임무는 두 가지로 레온을 이겨라와 어제 얻은 병동의 무법자다.
레온을 이겨라 임무는 트레이닝 룸에서 열심히 연습 중이니 넘기고, 남은 건 병동의 무법자뿐이다.
임무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병동에 도착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반가워요. 또 보네요."
최기석은 스테이션에 있는 간호사들과 인사를 나눴다.
"리사. 어제 이야기했던 건 있잖아요. 어떤 이상한 사람이 수액줄 빼는 거요."
"아. 네."
"혹시 그 사건들 기록해 놓은 거 있어요? 제가 범인을 잡아 보려고 하는데."
"당연히 있죠. 닥터 최가 도와주면 든든하겠네. 잠시만요."
리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노트를 뒤적거리다가 한 장을 찢어서 그에게 건넸다.
"여기요."
"고마워요."
최기석은 휴게실 소파에 앉아서 종이를 살폈다.
최근 한 달 사이 사건은 총 다섯 번 일어났다.
그중에서 수액줄이 빠진 것이 세 번이고, 자고 있던 환자가 구타당한 일, 물건을 도난당한 일이 각각 한 번씩이다.
사건이 발생한 병실이 복도 끝에 위치했다는 점.
이것만이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흐음……."
최기석은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범인이 누구인지 몰라도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는 건 확실했다. 상대가 응급환자에게 장난을 친다면, 끔찍한 사고로 번질 위험이 있었다.
의문점을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놓은 후 휴게실을 나왔다.
이후 사건이 있었던 병실을 살피고, 피해를 입은 환자들과도 대화를 나눴다.
노력한 것에 비해 성과는 미미했다.
사건 당시 피해자들은 다 자고 있었기에 기억하는 게 거의 없었다.
'일단 CCTV를 확인하는 수밖에.'
최기석은 쓴웃음 지으며 의국으로 향했다.
* * *
오전 회의와 회진이 무사히 끝났다.
스크럽이 없는 관계로 모처럼 여유 시간이 생겼다.
최기석은 의국에서 환자 처방을 입력하고, 루카스가 챙겨 준 무수혈 수술 논문들을 살폈다.
총 일곱 개의 논문 중 네 개의 논문에서 환자가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역시 출혈.
과다 출혈이 발생할 경우 셀 세이버로 피를 공급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드르르륵.
논문을 살피던 중 문이 열렸다.
"미스터 최. 바빠요?"
"지금은 괜찮아요."
"그럼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지금 스크럽 들어가야 하는데, 흉부외과에서 협진 요청이 와서……."
레온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갈게요.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뭐."
"고마워요. 혹시라도 진료하기 힘들면 나중에 나한테 넘기고요."
"알겠습니다. 환자 번호 불러 주세요."
최기석은 레온이 불러 준 환자 번호를 입력하고 차트를 살폈다.
"그럼 잘 부탁해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차트를 꼼꼼하게 살핀 후 의국을 나와 흉부외과를 찾았다.
흉부외과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의 꿈은 세계 최고의 흉부외과의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보면, 메이죠 클리닉의 흉부외과 써전들은 하나같이 그 꿈에 가까운 인물들이다.
스테이션을 지나 복도에 들어서자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폐식도외과 과장 야사다였다.
"안녕하십니까?"
최기석의 인사에 야사다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최기석을 쳐다봤다.
"닥터 송을 만나러 왔나? 닥터 송이라면 얼마 전 부속병원으로 파견 갔는데?"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협진 요청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 그럼 일 보도록."
야사다가 쌩하니 스쳐 갔다.
대화가 좀 더 이어지기를 바랐던 그는 아쉬움을 느꼈다.
아무래도 야사다는 아랫사람에게 살가운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복도를 걸으며 병실을 살피는데 한 써전이 손을 흔들었다.
"신경외과에 미스터 최, 맞죠?"
"네."
"이쪽이에요."
흉부외과 레지던트와 한 병실로 들어갔다.
"얼마 전 OPCAB 수술을 받은 환자예요. 수술은 잘 끝났는데, 두통하고 호흡곤란 증상을 계속 호소하고 있어요."
"선생님. 머리가 깨질 것 같아요. 오늘은 이상하게 얼굴도 잘 안 움직이고요."
환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제일 불편한 게 두통인가요?"
"네."
최기석은 문진을 이어가며 환자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하아…….'
진단명을 확인한 순간 두통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