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메이커 (5)
그날 저녁.
최기석은 기숙사에서 트레이닝 룸에 입장했다.
세 번의 수련을 끝내자 밤이 깊었다.
"휴우……."
한숨 쉬며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일반외과 수술은 흉부외과와 비슷한 점이 많아서 배우는데 애를 덜 먹었다.
두 과 모두 환자의 몸에 수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경외과의 경우 이 두 과와 달리 전쟁터가 머리이자 뇌다.
수술의 근본적인 원리는 같다고 해도, 수술 부위에 접근하는 방식이나 구조에서 차이가 컸다.
'아직 멀었네.'
최기석은 방금 막 끝낸 뇌동맥류 수술을 떠올렸다.
수련으로 랭크를 D까지 끌어올렸지만, 목표치인 A 랭크까지 가는 길은 험난해 보였다.
신경외과 수련 기간에 레온을 뛰어넘는 것이 가능할까.
요즘은 계속 그런 의구심이 들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물을 마시고 상태창을 띄웠다.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새로 얻은 임무 킹 메이커고, 다른 하나는 살려야 한다 스킬이다.
[루카스가 헤드 치프가 되도록 돕겠습니까?]
[매튜가 헤드 치프가 되도록 돕겠습니까?]
신규 임무 아래로 두 개의 메시지가 대기 중이다.
최기석은 메시지를 응시하다가 루카스를 돕는다는 쪽을 택했다.
[아직 대상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매튜를 돕는다는 쪽을 택해도 같은 알림이 울렸다.
아직은 시기가 아닌 모양이다.
'그나저나 의외네.'
최기석이 턱을 쓸어내렸다.
루카스가 아니라 매튜를 선택해도 하이어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자네는 하이어 시스템을 어떻게 생각하나?"]
[난 반대야. 실력이라는 건 구체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부분이지. 게다가 수련의 사이에 형평성에도 어긋나.]
과거 대화를 나눴을 때 메튜는 조기 진급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마치 자신을 겨냥한 것처럼.
그런데 임무 보상을 살피면 매튜를 헤드 치프로 밀어 줘도 조기 진급할 수 있다고 나와 있었다.
최기석은 생각을 거듭하다가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매튜는 환자보다 성공을 지향하는 써전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성공을 돕는 사람이라면, 그에 따른 보상을 하려는 것이라고 말이다.
'뭐. 그래 봤자.'
최기석은 이미 루카스를 돕기로 마음을 굳혔다.
루카스와 매튜.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과거 송명진과 조지환이 떠올랐다.
송명진과 조지환 또한 흉부외과 과장을 두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그때는 정치력이 낮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몇 가지 사건을 잘 이용하면, 루카스가 헤드 치프가 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었다.
임무 그대로 킹 메이커가 될 수 있는 셈이다.
최기석의 시선이 이번에는 살려야 한다 스킬로 옮겨졌다.
스킬을 보고 있자니 응급의학과 과장 파커가 떠올랐다.
파커는 살려야 한다 스킬 만렙을 찍었으며, 그 상위 스킬인 반드시 살린다까지 가지고 있었다.
상위 스킬을 만드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호기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최기석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기숙사를 나와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 소파에 레온이 누워 있었다.
낮에만 응급수술을 두 건이나 집도했으니 피곤할 만했다.
"으아아아악!"
레온의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다.
그가 미친 듯이 허공에 손을 휘둘렀고, 최기석은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었다.
"레…… 레온. 괜찮아요?"
"아…… 미스터 최. 괜찮아요. 악몽을 꿔서……."
레온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땀에 젖은 앞머리가 미역 줄기 마냥 늘어졌다.
"이거라도 드세요."
"고마워요."
레온이 최기석에게 받은 캔 커피를 쭉 들이켰고, 최기석은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단순한 착각인지 몰라도 레온이 평소보다 수척해 보였다.
"혹시 걱정거리라도 있어요?"
"딱히 걱정은 없어요."
"그럼 조금 전에는 왜?"
최기석의 질문에 레온이 쓴웃음을 지었다.
"미스터 최가 처음 봐서 그래요. 나는 잠만 자면 항상 이래요."
"……."
"내가 과잉기억 증후군에 걸린 거 알죠?"
"네."
"그것 때문에 항상 악몽을 꿔요. 처치 중에 죽은 환자와 수술실에서 죽은 환자가 늘 꿈에 나타나죠. 자기 전에 좋았던 일만 떠올려도 소용없더군요."
과잉기억 증후군.
그것은 레온의 실력을 키워 주는 발판이지만 동시에 그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죽은 환자가 떠올라요. 그럴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죠.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내가 다른 동료보다 실력이 좋은 이유, 알아요?"
"……잘 모르겠습니다."
"난 환자가 죽을 때마다 고통스러워져요. 끔찍한 기억이 계속 쌓이니까. 즉 환자를 살리는 길이 나를 살리는 길이에요."
레온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예전에 과잉기억 증후군이 저주라는 이야기를 했군요."
"맞아요. 용케 기억하고 있네요."
"조금 불편하게 들릴 수 있지만,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아보시는 건 어떤지……."
"당연히 받아 봤죠. 그쪽에서는 약물치료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약을 먹으면 정신이 몽롱해지잖아요."
"아…… 그럼 처치를 못 하게 되는군요."
"결국, 내가 안고 가는 수밖에 없어요. 동양에서는 이런 상황을 카르마라고 해석하기도 한다면서요? 내가 전생에 무슨 큰일이라도 저질렀나 보죠. 뭐."
"그래도 저는 믿습니다."
최기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레온이 과잉기억 증후군의 아픔을 잘 이겨 낼 수 있다고요. 그러니까 하늘이 레온에게 그런 능력을 줬을 겁니다."
"견딜 수 있는 시련이라…… 새로운 해석이네요."
레온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띠링!
[레온과의 라포가 2단계 상승합니다.]
[레온: 4단계 - 신뢰]
'좋았어!'
최기석은 속으로 기뻐하며 정언명령 스킬을 사용했다.
정언명령의 사용 조건은 라포 3단계 이상을 쌓은 동료와 환자이기에.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레온은 제 롤 모델입니다. 저도 레온처럼 다른 스태프에게 인정받는 써전이 되고 싶어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힘내 주세요. 과잉기억 증후군에 지지 말고, 그걸 이용해서 더 멋진 써전이 돼 주세요.]
휘이이잉.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하얀빛이 레온을 휘감았다.
[대상에게 희망의 별 효과가 주어집니다.]
[희망의 별: 부정적인 기억회상률이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과잉기억 증후군을 이용한 처치력이 이십 퍼센트 증가합니다. 버프 지속시간은 삼 개월입니다.]
"미스터 최. 고마워요."
레온은 눈물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과잉기억 증후군의 아픔을 이해해 준 건 최기석이 처음이다.
다들 그를 부러워만 했기에.
"제가 뭘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그래도……."
"정 고마우면 나중에 밥이라도 한 끼 사 주세요."
"좋아요. 내가 언젠가 거하게 살 테니까 꼭 기대해요."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시선에 따뜻함이 깃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최기석은 트레이닝 룸에서 수련을 마치고 느지막하게 병동을 찾았다.
오늘은 쉬는 날.
병동에서 몇 가지 업무를 하고, 구조 팀 활동에 나서야 한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한 채 환자를 살폈다.
다행히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환자는 없었다.
"미스터 최. 오프인데도 나왔네?"
복도에서 마주친 자넷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대단하다, 대단해. 나 같았으면 쉬는 날에 병동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 같은데."
"나야 워낙 특이하잖아."
"알긴 아는구나. 그건 그렇고 마침 잘 됐어. 루카스 과장님이 미스터 최를 잠깐 보자고 했거든."
"과장님이? 왜?"
"나야 모르지."
자넷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사이 니콜라이가 의국에서 나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둘 다 여기 있네? 미스터 최. 매튜 과장님이 잠깐 보자니까 휴게실로 가 봐."
"매튜 과장님까지? 미스터 최. 인기 폭발이네."
자넷이 농담조로 말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띠링!
[신규 임무, 킹 메이커에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집무실로 이동할 경우, 루카스의 킹 메이커가, 휴게실로 향할 경우, 매튜의 킹 메이커가 됩니다.]
드디어 찾아온 선택의 순간.
"그럼…… 루카스 과장님한테 먼저 가 볼게."
최기석은 두 사람에게 작별 인사하고 집무실로 향했다. 그러자 재차 알림이 울렸다.
[루카스의 킹 메이커 임무가 생성되었습니다. 구체적인 완수 조건이 생성됩니다.]
[루카스의 킹 메이커]
- 루카스와 4단계 라포 형성(1/4)
- 루카스의 감탄(0/1)
- 매튜의 평판 4단계 감소(매튜의 현재 평판: 7)
최기석은 완수 조건을 확인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루카스와 라포를 형성하고, 실력을 인정받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매튜의 평판까지 깎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게 약점을 잡으라는 뜻인지, 험담을 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방법이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임무의 난이도가 갈수록 올라가고 있다는 점이다.
신규 임무를 고민하는 동안 집무실에 도착했다.
똑. 똑. 똑.
노크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병동에 있었나? 부르자마자 온 것 같은데?"
"네. 제 환자를 보고 있었습니다."
"대단한 정성이군. 하여간 오프인데 불러내서 미안하네. 거기 앉아."
"네."
최기석은 소파에 앉아 루카스를 마주 보았다.
"자네를 부른 건 다음 주에 있을 수술 때문이야."
"수술이라면…… 모야모야병을 앓고 있는 베라의 무수혈 수술 말씀이십니까?"
"잘 알고 있군. 어제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 무수혈 수술에서 자네를 제2보조로 쓰기로 했어. 어때? 잘할 수 있겠나?"
"네. 자신 있습니다."
"대답은 마음에 드는군."
루카스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최기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과장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말해 봐."
"저를 보조로 쓰기로 결심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수술 난이도가 만만치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를 보조로 쓰면, 주변에 반대도 많으실 것 같은데……."
"자네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그럼 대체 왜……."
"레온이 자네를 추천했거든."
"레온이요?"
"그래. 미스터 최라면 충분히 제 몫을 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 레온의 추천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최기석은 레온에게 새삼 감사했다.
새로운 임무가 생긴 타이밍에 루카스의 수술 보조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번 수술에서 어떻게 활약하느냐에 따라 임무 조건 일부를 완성할 수 있으리라.
탁!
루카스가 서류 뭉치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건 수술에 관련된 자료야. 수술 전까지 달달 외워 놓도록."
"네!"
"이 기회에 우리 둘이 매튜에게 한 방 먹여 주자고. 환자를 함부로 버리면 안 된다는 걸 말이야."
최기석은 루카스와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집무실을 나왔다.
'이런. 늦었네!'
시간을 확인하고 걸음을 빨리했다.
그런데 복도를 걷던 중 휴게실에서 나오는 매튜와 정통으로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루카스를 보고 오는 길인가 보군."
"네. 루카스 과장님이 먼저 호출해서……."
"변명은 필요 없어. 어차피 자네는 나 따위를 안중에 두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 루카스랑 잘해 보라고!"
매튜가 냉기를 뿜어내며 걷기 시작했다.
[킹 메이커 임무로 반대세력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습니다. 매튜가 당신을 적으로 인식합니다.]
최기석은 알림을 확인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다.
지금부터는 전쟁을 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