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227화 (226/407)

킹메이커 (4)

흉부외과 휴게실.

최기석과 송명진은 소파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보았다.

"교수님은 역시 대단하세요. 덕분에 오늘도 좋은 처치 배웠습니다."

"최 선생은 이런 케이스가 처음이라서 생각을 못 했을 뿐이에요. 사실 그리 어려운 건 아니에요."

송명진이 미소 띤 채 말을 이었다.

"솔직히 폐식도 파트에서 나보다 야사다 과장에게 배울 게 더 많을 겁니다."

"야사다 과장이라면……."

최기석은 낯익은 이름을 중얼거렸다.

야사다는 그가 메이죠에 처음 왔을 때 심장 - 폐 동시 이식술을 펼쳤던 써전이었다. 지금 돌이켜도 당시 보여 준 야사다의 솜씨는 경이로웠다.

"일본에서 온 천재 외과 의사죠. 참고로 야사다는 나보다 더 엄격하고, 더 이상적인 사람이에요."

"……."

"오늘 대화를 나눴는데 최 선생에게 관심을 보이더군요."

"제가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대단한 사람 맞습니다."

송명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세계를 통틀어도 레지던트 1년 차에 CABG(관상동맥 우회술)를 성공시킨 사람은 아마 최 선생뿐일 테니까요. 하지만 이것만큼은 늘 경계해요."

"네."

"하나는 환자를 위하는 마음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겁니다."

송명진은 지금까지도 이 두 가지를 지켜 오고 있었다.

환자를 괄시하는 의사는 이미 의사가 아니고, 자신의 실력에 취한 의사는 더 이상 발전이 없다.

"항상 명심하겠습니다."

최기석은 자신 있게 대답하고 화제를 돌렸다.

"안 그래도 신경외과에 들어와서 부족함을 많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오. 그래요?"

"신경외과에 레온이라는 레지던트가 있습니다. 저보다 일 년 선배인데, 벌써 뇌동맥류 수술을 집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보조를 했는데, 집도 실력이 저보다 뛰어난 것 같았습니다."

"맞아요. 레온이라면, 이미 클리닉에선 유명 인사죠."

송명진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올해 루키가 최 선생이라면, 작년의 루키는 레온이었죠. 레온은 인성과 실력을 갖춘 몇 안 되는 써전이에요."

"네. 그래서 신경외과에 있는 동안 레온에게 이것저것 배우고 싶습니다."

"좋아요. 내가 최 선생을 메이죠로 부른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니까."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최기석이 입을 열었다.

"교수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 봐요."

"지금 신경외과 헤드 치프가 부재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체 차기 헤드 치프는 누가 되는 건지 궁금합니다."

최기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경외과에서 수련한 지 제법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도 하이어 시스템에 관한 임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다.

이에 그는 한 가지 가정을 세웠다.

헤드 치프가 뽑혀야 하이어 시스템 관련 임무가 생기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으음……. 처음에는 외부 인사를 영입하자는 말이 나왔는데, 그건 취소됐고. 뇌혈관외과 루카스 과장과 뇌종양외과 매튜 과장 둘 중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둘 중 어느 쪽이 더 가능성이 있을까요?"

"반반이라고 보면 되겠지만, 굳이 따지자면 매튜 쪽이 조금 더 가능성이 크겠군요."

"네? 왜죠?"

"최 선생. 갑자기 왜 그리 흥분합니까?"

"죄…… 죄송합니다. 교수님."

최기석은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조기 진급과 관련된 일이라서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최 선생에게 외과 로테이션 5년을 꽉 채우는 건 너무 가혹하니까."

흉부외과 전공을 하기 전, 꼭 거쳐야 하는 5년간의 외과 로테이션.

송명진은 이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최기석만 제외하고 말이다.

이미 CABG 집도 경험이 있는, 자신이 실력을 검증하는 최기석에게 미국의 외과 로테이션 기간은 지나치게 길다.

"흠흠. 어쨌든 매튜가 진급에 유리한 이유는 다른 과 과장 및 헤드 치프와 친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도 지연과 친분을 따지는 겁니까?"

"어느 정도는요. 루카스와 매튜, 두 사람 다 실력 있는 써전이에요. 실력이 비슷하다고 가정하면, 아무래도 친분이 작용할 수밖에 없죠."

"혹시 헤드 치프 선출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한 달 정도로 보면 됩니다. 뚜껑을 열어 봐야겠지만. 매튜가 선출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만 알아 둬요."

송명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알림이 머리를 스쳤다.

띠링!

[특별 임무, 킹 메이커가 생성되었습니다. 두 명의 신경외과 과장 중 한 명을 선택하여 헤드 치프로 선출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임무 완수 시 보상으로 조기 진급에 성공합니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최기석은 알림을 확인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하이어 시스템과 관련된 임무가 생긴 것은 반갑지만, 그 임무 내용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임무의 성격을 고려하면 정치력을 발휘해야 할 듯싶었다.

"그래도 아직 모르는 일 아닐까요? 한 달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맞는 말이에요 어느 쪽이 어떤 일로 점수를 따느냐에 따라 결과는 바뀌겠죠. 그리고 그게 한국과는 다른 점이죠."

송명진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최기석은 그가 조지환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추측해 보았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해 줄 게 있어요."

"네, 교수님."

"내가 당분간 자리에 없을 거예요. 브랜치에 있는 흉부외과를 잠깐 봐주기로 했거든요. 짧으면 일주일? 길면 이 주까지 있을지 모르겠어요."

꼬르르르륵.

말을 끝내기 무섭게 배곯는 소리가 들렸다.

송명진의 배에서 나는 소리다.

"허허. 점심을 빵으로 때웠더니……."

"그러고 보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최기석은 시계를 힐끔 보고 말을 이었다.

"괜찮으시면 제가 김치볶음밥 만들어 드릴까요? 제가 자신 제일 자신 있는 메뉴인데."

"그거 좋죠. 어디 최 선생 솜씨가 요리에도 적용되는지 봅시다."

두 사람이 굶주린 배를 안고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 * *

다음 날 새벽.

래리는 잔뜩 긴장한 채 기숙사를 나섰다.

'아니야. 별일 없을 거야.'

힘차게 머리를 흔들며 불길한 상상들을 떨쳤다.

오늘은 최기석과 클레어가 동시에 오전 근무를 하는 날이다.

물론 두 사람의 실력이 모자라서 근무가 두려운 것은 아니다.

최기석은 조기 진급했음에도 단시간에 신경외과에 적응했다.

클레어는 니콜라이의 뒤를 이어 상점이 두 번째로 많은 동료다.

그렇다면 두 사람과 근무 서는 게 두려운 이유는 뭘까.

그 이유는 두 사람 모두 신경외과에 소문난, 환자를 부르는 동료들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근무만 섰다 하면 환자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었다.

둘 중 한 명만 근무가 겹쳐도 힘든 판국인데, 오늘은 그 둘과 근무를 서야 한다.

래리 입장에서는 일하기 전부터 공포를 맛볼 수밖에 없었다.

똑. 똑. 똑.

노크를 하고 의국으로 들어갔다.

"좋은 아침."

당직의인 자넷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좋은 아침. 오늘은 내가 일등이네?"

"그러게. 보통은 미스터 최가 제일 먼저 오잖아. 그나저나 오늘 괜찮겠어?"

자넷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몰라. 벌써부터 긴장돼서 죽을 것 같아. 하필이면 미스터 최와 클레어랑 근무가 겹칠 게 뭔지."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을 경험하게 될 테니까."

"자넷. 네 일이 아니라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미안. 그래도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는걸? 둘이 같이 근무 서는 건 오늘이 처음이니까."

드르르륵.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클레어가 의국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두 사람과 인사를 주고받은 후 자리에 앉았다.

"인수인계 시작하자."

"미스터 최가 아직 안 왔어."

"못 올 거야. 아마."

"왜?"

자넷과 래리가 동시에 물었다.

"아까 정형외과에서 코드 블루 방송하는 거 들었지?"

"들었는데……. 혹시 CPR 하는 중?"

"맞아. 오는 길에 마주쳤는데, 베드 끌고 중환자실로 달려가더라. 시간 좀 걸릴걸?"

"역시 미스터 최는 대단해. 아침을 코드 블루로 시작하다니……. 난 코드 블루 응급처치한 적 한 번도 없는데."

"나도."

자넷의 말에 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우리끼리 진행하……."

자넷은 말을 차마 다 끝내지 못했다.

모니터 옆에 전화기가 갑자기 우렁차게 울어댔다.

"지금 응급실에 환자 왔다는데?"

자넷이 통화를 끊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시간에?"

"어쩔 수 없네. 내가 갈게."

클레어가 자리를 비우면서 의국에는 자넷과 래리만이 남았다.

"하아…… 미치겠네. 진짜. 아직 일과 시작하기도 전인데. 둘 다 너무하는 거 아니냐? 한 명은 코드 블루고 한 명은 응급실 진료라니."

"농담이 아니라 둘 다 환자를 끌어모으는 힘이 있는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혀를 찼다.

"생각보다 더 힘든 하루가 될지 모르겠다. 그래도 힘내."

자넷의 위로에 래리는 한숨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근무를 바꿔 줄 사람 여기 어디 없을까.

가만히 일하다간 복장이 터질까 봐 겁나.

미스터 최도, 클레어도 너무나도 겁나.

혼자인 게 무섭지, 난 응급상황이 두렵지.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의국에서 환자 처방을 입력하고 있었다.

모처럼의 여유시간.

오늘은 이상하게 일이 많았다.

메이죠 클리닉에 신경외과만 있는 것처럼, 응급실에 신경외과 환자들이 몰렸다.

개중에는 응급수술 케이스가 있어서 정규 스케줄 이외의 스크럽을 서기도 했다.

그래서 오후 3시가 돼서야 간신히 처방 입력할 시간이 났다.

"좋네."

최기석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작업하면서 카터의 피아노 연주곡을 듣고 있었다.

대중가요만 듣다가 피아노 연주를 들으니 마음이 푸근하고 편안해졌다.

음악을 듣던 중 인터넷을 통해 카터의 피아노 연주 동영상을 살폈다.

정장을 차려입은 카터가 멋들어지게 피아노를 두드렸다.

그의 손가락이 춤추면서 황홀한 음악이 이어졌다.

'신경과에 가 봐야겠다.'

최기석은 동영상을 종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카터가 과를 옮겨 신경과 환자라고 됐다고 해도, 인연을 끊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직 도움이 필요했다.

드르르륵.

의국 문이 열리고 래리가 들어왔다.

"응급실 환자는 어때?"

"다행히 수술 케이스는 아니야. 입원시킬 필요도 없고."

래리가 의자에 앉아 최기석을 응시했다.

"미스터 최. 혹시 우리가 오늘 응급실에 몇 번이나 내려갔는지 알아?"

"글쎄. 평소보다 많이 가긴 한 것 같은데. 정확한 수는 모르겠는걸?"

"자그마치 스무 번이다. 스무 번!"

래리의 목소리에 울분이 담겨 있었다.

"너랑 클레어. 솔직히 너무해. 자넷이랑 니콜라이랑 근무하면 보통 여섯 번 정도 내려가는데, 거의 세 배잖아. 거기다가 응급수술까지 세 건이나 잡혔고."

"미안.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라서."

최기석은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환타 칭호의 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이를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응급실에 오지 마세요'라는 푯말을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내가 지켜보니까 너희 둘이 만나면, 환자는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가 돼. 그게 무슨 뜻인 줄 알아?"

"아니."

"둘이 절대로 같이 일하면 안 된다는 뜻이지. 내가 레온한테 말해서 꼭 근무 스케줄 바꿔 달라고 할 거야. 둘이 같이 근무서는 날이 없게."

지이이잉.

갑자기 울리는 최기석의 휴대폰.

래리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또 환자?"

"걱정 마. 이번엔 아니니까."

최기석이 웃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이윽고 거북이 탈을 쓴 남자가 의국으로 들어왔다.

"사무라이 거북 피자샵입니다. 쿠와붕가!"

피자 배달부의 익살에 래리는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이번에도 환자 콜이었다면 유혈사태가 발생했을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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