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메이커 (2)
최기석은 카터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고,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그의 진단명에 편측마비가 추가되었다.
편측마비(hemiplegia).
보통은 뇌졸중이나 뇌종양으로 인해 몸의 한쪽 면이 마비되는 질환이다. 카터의 경우 교통사고로 인한 뇌손상으로 마비가 찾아왔다.
"선생님! 팔만이 아니에요. 왼쪽 다리도 안 움직여요."
"오른쪽은 어떻습니까?"
최기석의 질문에 카터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오른쪽은 아무 이상 없는데 왼쪽만 그래요. 대체 왜 이런 거죠?"
카터의 당황한 눈빛이 최기석을 향했다.
최기석은 입술을 깨물며, 편측마비와 편측마비가 생긴 원인을 설명했다.
"……."
"……."
설명이 끝났음에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카터는 침통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이마에 얹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난 거 아닙니까? 그런데 대체 왜! 대체 왜! 마비가 왔습니까!"
"네. 수술은 성공했습니다. 카터는 경막하 출혈 진단을 받고 혈종제거 수술을 받았으며, 현재 혈종은 머리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
"마비는 수술의 후유증이 아니라 교통사고의 후유증입니다. 외상을 입으면서 뇌신경에 손상이 간 듯 보입니다."
최기석이 힘겹게 대답했다.
카터의 수술 기록지는 이미 수차례 읽었지만, 문제가 될 부분은 없었다. 수술 도중 출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신경을 건드린 일도 없었다.
"그럼 이제 난 어떻게 하죠? 다시는 피아노를 칠 수 없는 겁니까?"
"너무 절망적으로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아까 말씀드린 대로 신경과와 협진해서 치료방향을 결정하겠습니다. 현재로써는 약물치료와 재활치료가 함께 진행될 가능성이 큽니다."
최기석의 말에 카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텅 빈 눈동자로 천장만 올려다볼 뿐이다.
카터의 모습에 최기석 또한 침묵을 지켰다.
재활치료를 받으면 좋아질 수도 있다는 뻔한 위로, 그것은 지금 상황에서는 안 하는 편이 더 좋았다.
"닥터 최. 혼자 있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최기석은 카터에게 인사하고 중환자실을 나왔다.
돌덩이를 매단 것처럼 가슴이 무거웠다.
만약 자신이 편측마비를 앓았다면, 의사 생활을 그만두고 재활에만 전념해야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 절망감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지이이이잉.
무거운 마음으로 걷는데 콜폰이 울렸다.
병동 전화다.
[닥터 최. 지금 외래 교수님이 선생님 이름으로 환자 입원시켰어요.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은데.]
"네. 지금 가는 길입니다."
최기석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병동에 도착하자 한 가족이 스테이션 앞에서 대기 중이다.
다들 겉보기가 멀쩡해서 개중에 환자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선생님. 이쪽이 환자인 해리슨 씨고, 이쪽이 해리슨 씨 부인, 나머지 부분은 자녀분들이에요."
"안녕하세요. 주치의 기석 최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보호자와 인사를 나눈 후 환자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계속 환자가 만만치 않네.'
최기석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해리슨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치매의 70퍼센트가 바로 이 알츠하이머병이다.
주로 노년기에 나타나며, 기억이나 언어능력에 문제가 생겨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생긴다.
"환자분, 병실 배정은 끝났죠?"
"네."
최기석의 물음에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환자분하고, 보호자분은 병실에서 쉬고 계시죠. 제가 금방 병실로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의국으로 들어가 해리슨의 차트를 살폈다.
외래 교수가 무슨 이유로 해리슨을 입원시켰는지, 앞으로 치료 계획은 어떤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흐으음……."
MRI와 PET를 살피던 중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MRI 상에서 측두엽과 두정엽 부근이 심하게 위축되었다.
그로 인해 머리 중심부에 검은 홀이 생긴 것처럼 보였다.
PET 상에도 머리 중심부에 음영이 떨어졌으며, 뇌실 부분이 지나치게 확장되어 있었다.
알츠하이머가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다.
차트를 훑은 후 다시 병동으로 돌아갔다.
"나를 왜 병원에 가두고 난리야!"
해리슨이 큰 소리로 가족들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난 멀쩡하다고! 허튼짓하지 말고, 집으로 가자."
"아빠. 치료가 꼭 필요하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했잖아요. 아까는 아빠도 치료받겠다고 했고요."
"내가 언제!"
해리슨이 씩씩거리며 코를 찡긋거렸다.
"해리슨."
"다…… 당신이 의사요?"
"네. 아까 인사드렸던 주치의 기석 최입니다."
"이 사람 보게? 당신이 언제 나한테 인사했다고 그래? 지금 처음 보는구먼."
해리슨이 황당하다는 듯 혀를 찼다.
최기석은 그의 인지 기능이 생각보다 훨씬 떨어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해리슨. 지금 계절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당연하지. 여름이잖아, 여름."
그의 대답에 가족들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는 사월로 여름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 기분은 어떠시죠?"
"별로야. 짜증 나고, 우울해. 근데……."
해리슨이 말을 하다 말고 큰딸 에이미를 바라봤다.
"그쪽은 누군데 아까부터 여기 있지? 얼굴은 익숙한데 이름을 모르겠어. 둘째 아들놈 와이프인가?"
"저 에이미예요. 아빠 첫째 딸이요."
"그래?"
해리슨의 말에 에이미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뒤돌아서서 눈물을 참는 것이다.
"환자분 상태는 이 정도면 충분히 알 것 같습니다. 간호사에게 입원설명은 들으셨죠?"
"네."
"거동하시는 걸 보면, 곁에 사람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간병인을 고용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가족이 번갈아 병실에 있을게요."
"알겠습니다."
최기석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치료계획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으로 며칠간 경과를 살펴보고, 해리슨 씨에게 줄기세포 이식술과 뇌 피스메이커 삽입술을 할 예정입니다. 해당 치료가 끝나면, 신경과로 전원해서 진료받게 될 겁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가족들의 인사에 최기석도 고개 숙여 답했다.
그사이 잠시 딴짓하고 있던 해리슨이 최기석을 바라보았다.
"당신, 누구야?"
* * *
메이죠 클리닉 흉부외과.
송명진은 집무실에서 서류 업무를 하고 있었다.
심장외과 파트, 폐식도외과 파트, 소아흉부외과 파트.
세 분과를 전부 책임지고 있는 수장인 만큼 처리해야 할 잡무가 많았다.
똑. 똑. 똑.
노크가 소리가 들려 들어오라고 답했다.
집무실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야사다, 세계 최고의 폐식도외과 써전이다.
"바쁜가?"
"괜찮아. 들어와."
야사다가 소파에 앉고, 송명진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별일이군. 자네가 나를 찾아오다니……."
"왜 오면 안 되나?"
"뭐. 그런 건 아니지만…… 너무 자주 보니까 질려서 말이야."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 다 동양인 출신에 흉부외과 써전이고, 그 실력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공통점이 많아서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요즘 레지던트 꼴이 말이 아니야."
야사다가 운을 뗐다.
"어제 폐이식 수술을 하는데, 보조하던 녀석이 혈관을 건드려서 낭패를 봤지. 외과 수련을 5년씩이나 하고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다니……."
"그건 자네도 고려해야지. 그 친구는 폐이식 수술 보조가 처음이었으니까."
"그건 변명이 안 돼. 이건 명백하게 의사가 병을 만든 케이스라고."
"그 점에 관해서는 솔직히 나도 할 말이 없네. 하지만 말이야, 아직 레지던트 과정도 끝내지 못한 수련의 아닌가. 처음부터 완벽한 인간은 없어. 아이들도 넘어지면서 걸음마를 배우는 법이라고."
"자네는 아랫사람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해. 그게 문제야."
야사다가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국에서 데려온 친구는 잘 지내고 있나? 자살 환자를 막은 것과 총기 사건에 연루됐던 것은 기억하는데 그 이후로는 깜깜무소식이군."
"한국에서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네."
송명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최 선생은 일반외과에서 조기 진급하고, 지금은 신경외과에서 수련 중이라네."
"일반외과에서 조기 진급했다고?"
"그래."
"믿을 수가 없군. 그 깐깐한 스미스가 조기 진급을 시켰다니……."
야사다의 얼굴에 감탄한 빛이 떠올랐다.
메이죠 클리닉에 엄청난 써전들이 포진했다고는 하지만, 야사다가 인정하는 써전은 단 두 명뿐이다.
바로 앞에 있는 송명진과 스미스다.
그런데 최기석은 그가 인정하는 두 명의 써전에게 전부 눈도장을 찍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최 선생에게 관심 있나?"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솔직히 폐식도외과 파트에 마음에 드는 녀석이 하나도 없어. 레지던트는 말할 것도 없고, 펠로우랑 교수까지 말이야."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그건 자네 욕심이라고. 자네가 완벽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까지 완벽할 수는 없어."
"메스를 잡은 후부터 내 생각은 한 번도 변하지 않았지. 모든 써전들은 완벽해야 해. 왜인 줄 아나?"
"……."
"우리가 생명을 다루기 때문이야. 수술에 실패하면, 환자는 죽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야사다의 열변에 송명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에는 깊이 공감하네. 하지만 내 말은 어느 정도 현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지.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보다 더 이상을 내세우는 써전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네."
"높이 올라가는 새가 더 많은 걸 보는 법이네."
"그래. 조만간 나타날 거야. 자네와 나를 뛰어넘는 최고의 흉부외과 의사가. 그때는 나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겠지.
"말만 들어도 설레는군."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야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 봐야겠어. 수술 시간이야."
"그래. 이번 주에 식사나 한 번 같이하자고."
야사다가 떠난 후 송명진은 남은 잡무를 처리했다.
문득 벽시계를 살피자 일과 시간이 끝났다.
오늘은 모처럼 집에 돌아가서 푹 쉴 생각이다.
지이이이잉.
자리 정리하고 집무실을 나서는데 콜폰이 울렸다.
[헤드 치프. 레지던트 1년 차 알프레드입니다. 늦은 시간에 전화 드려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무슨 환자 때문에 전화했죠?"
송명진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레지던트가 헤드 치프인 자신에게 직접 전화를 건 이유.
그것은 다른 사람의 손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터졌다는 뜻이다.
[그게…… 방금 응급실에 총상 환자가 실려 왔습니다. 가슴에 두 발을 맞았는데, 한 발은 폐에 박히고 한 발은 관통한 모양입니다. 상태가 워낙 응급인 데다가 VIP 환자라서…….]
"바이탈 유지하고, 수술실 잡아 놔요. 곧바로 내려갈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송명진은 통화를 끊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타다다다닥.
옥상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야속해서 계단을 질주해서 내려갔다.
벌컥!
응급실로 들어가자 알프레드가 그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하아…… 하아……. 환자는요?"
"상처 지혈하고, 인공호흡기 유지 중입니다. 아직 출혈이 심해서 블러드 팩과 수액 치료 병행하고 있습니다."
"검사 결과 좀 봅시다."
송명진은 모니터 앞에 앉아서 엑스레이와 CT를 살폈다.
그의 얼굴이 점점 흙빛이 되었다.
"저기…… 헤드 치프. 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게…… 수술실은 잡았는데……."
"잡았는데?"
"보조 스태프들을 못 구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정규 수술이 있는 데다가 응급수술도 생겨서……."
"일단 수술실로 갑시다."
"하지만……."
"내 말 못 들었어요?"
그의 호통에 알프레드가 황급하게 환자를 옮겼다.
송명진은 알프레드와 이동 중에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최 선생. 일과 끝났죠? 혹시 스크럽 도와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