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6)
"나도 대답이 궁금하군."
매튜의 시선 역시 최기석을 향했다.
"저라면…… 만약 제가 수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저는 하겠습니다."
"이유는?"
"환자가 비상식적인 요구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수술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의사가 환자를 살리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니까요."
"……."
"설령 환자의 회복 가망성이 낮은 수술이라도 해야 합니다. 보호자가 의료소송을 걸든지, 병원 내 평판이라든지 하는 부분은 나중에 따질 문제죠. 그리고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는……."
최기석이 뜸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저는 베라가 다른 아이처럼 건강하게 자라는 걸 보고 싶습니다."
"똑 부러진 대답이군."
루카스가 미소 지으며 손뼉을 쳤다.
"나도 미스터 최와 같은 생각이야. 무수혈 수술이라는 점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환자를 포기할 수는 없지. 그게 내가 생각하는 의사의 길이거든."
"쯧쯧. 영웅들이 나셨어. 영웅들이. 제 발로 가시밭길에 뛰어가겠다면 말리지 않겠네."
메튜가 혀를 찼다.
"그럼 보호자에게 무수혈 수술 동의서를 받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무수혈 수술이 얼마나 힘든지도 설명해 주고."
"알겠습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최기석은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휴우……."
루카스의 승낙을 받았음에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의국에서 환자 처방을 입력하고 있었다.
키보드 옆에는 한 장의 종이가 놓였는데 티나에게 받은 무수혈 수술 동의서다.
무수혈 수술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자 티나는 펄쩍 뛰며 기뻐했다.
그리고 그의 손을 붙잡으며 고맙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수술 결과에 따라 그녀의 태도가 달라질 것 당연한 일, 최기석은 그녀처럼 기뻐할 수가 없었다.
타다다닥.
오더를 내린 후 무수혈 수술에 관한 논문을 찾아보았다.
한국에서도, 미네소타에서도 무수혈 수술을 해 본 적이 없기에 전문적인 정보가 필요했다.
"소아 심장 파트에서 무수혈한 케이스는 제법 있는데…… 뇌수술 파트는 별로 없네. 송 교수님께 요령이라도 여쭤 봐야 하나?"
최기석은 중얼거리며 베라의 차트를 모니터로 띄웠다. 그리고 무수혈에 필요한 수술 전 처치를 입력했다.
"뭘 그렇게 중얼거려? 무슨 문제라도 있어?"
동료 래리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조금 까다로운 환자가 걸려서. 네 환자들은 어때?"
"자장가가 필요 없는 아기라고 할까? 특별히 속 썩이는 일도 없고, 아주 평화롭지."
래리와 대화 나누는데 자넷과 니콜라이가 의국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 모두 막 스크럽을 마치고 복귀하는 중이다.
"수술은 어땠어?"
"별거 없었어.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려서 그렇지."
니콜라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둘 다 매튜 과장님 수술?"
"맞아. 자넷이 제 2보조였고, 나는 제3보조였어."
"매튜 과장님은 어떤 식으로 수술하셔?"
"네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꼼꼼하신 분이지. 완벽주의자라고 생각하면 편해. 그래도 루카스 과장님보다 스태프들을 풀어 주는 편이긴 하지."
니콜라이가 최기석의 질문에 답변하고 의자에 앉았다.
"출출한데 피자라도 시켜 먹을까?"
"좋아."
"안 될 이유가 없지."
니콜라이의 제안에 따라 피자를 주문했다.
이윽고 피자가 도착한 후 간식 타임이 시작됐다.
네 사람은 마주 앉아서 식사와 함께 이야기꽃을 피웠다.
"미스터 최는 정말 대단해."
"뭐가?"
"신경외과에 온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뭐든 알아서 척척하고 있잖아. 솔직히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볼 줄 알았는데."
자넷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하이어 시스템으로 조기 진급한 능력자라도 새로운 과에 적응하는 시간은 필요하다.
스태프의 성향, 환자의 진료방침 등등, 익혀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기석은 달랐다.
신경외과 근무부터 시작한 자신과 다른 동기들과 별 차이가 없을 만큼 일을 잘했다.
"혹시 비법이라도 있는 거야?"
"비법이라…… 그런 건 없고, 한국에서 워낙 강하게 단련해서 그런 것 같은데? 한국에 있는 외과의들은 속된 말로 극한직업에 포함돼서 말이야."
최기석은 100일 당직을 비롯해 한국에서의 외과 생활이 어땠는지 설명했다.
그러자 세 사람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리는 외과에 들어가지 못해서 안달이잖아. 그런데 한국은 외과의가 부족하다고?"
"슬프지만 그래. 보상이 없거든."
"그거 희한하네. 힘든 일을 하는데 왜 보상이 없을까?"
"나도 모르겠다. 왜 그런지……."
최기석은 착잡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아직 클레어랑 미스터 최하고 같이 근무 들어간 적 없지?"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왜?"
"두 사람 다 환자를 몰고 다니는 타입이잖아. 같이 근무하면 재미있겠다 싶어서."
"자넷.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래리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니콜라이가 화제를 돌렸다.
"응급의학과에 공지 떴더라. 구조 팀에 들어갈 의사를 뽑는다는데?"
"구조 팀은 뭐고, 뽑는 의사는 뭔데?"
"이번에 부임한 응급의학과 과장님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래. 보통은 구급차가 환자를 싣고 클리닉으로 오잖아."
"그거야 당연하지."
래리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걸 반대로 해 보겠대. 몇몇 케이스에 한해서 의사가 구급차를 타고, 현장으로 출동하는 거지. 구조대원의 치료 범위가 한정되어 있는 데다가 이송 도중 환자가 죽는 경우도 많으니까."
"어떤 분인지 몰라도 대단하네."
최기석은 응급의학과 과장의 발상에 감탄했다.
클리닉 경영진이 이 프로젝트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환자를 위하는 발상만큼은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어차피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 아니야?"
자넷이 이의를 제기했다.
"어쨌거나 구조 팀은 응급의학과에서 운영하는 거잖아."
"아니. 다른 과 수련의도 모집한대. 의료 봉사하는 식으로 오프 때만 응급의학과에서 근무하는 거지."
"지원이 불가능한 건 아니구나. 문제는 오프를 반납할 만큼 보상이 있느냐의 문제겠네."
"당연히 뭔가 있지 않겠어? 더 궁금하면 병원 공지를 살펴봐. 나도 자세히 본 건 아니니까."
잠시 후 간식 시간이 끝나고, 각자 제 할 일에 나섰다.
'응급의학과 구조팀이라…….'
최기석은 호기심을 안고 병원 사이트에 접속했다.
* * *
다음 날 오전.
최기석은 텅 빈 기숙사에서 수술 동영상을 살피고 있었다.
오늘은 모처럼 오프 날.
그동안 소화하지 못했던 수술 동영상을 점검하고, 트레이닝 룸에서 수술연습을 할 예정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수련이 끝나자 창가에서 밝은 햇살이 비쳤다.
최기석은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신경외과 근무 4일 차, 무수혈 수술이라는 걸림돌이 생겼지만, 아직까지 별 탈 없이 수련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직까지 하이어 시스템에 관련된 임무가 없네. 그것만 빨리 생기면 좋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상태창을 열었다.
스탯과 각종 스킬과 젬, 칭호들을 살피던 도중 그동안 모아놓은 P.
P에 눈이 갔다.
현재 보유한 P.
P는 48,000포인트.
이제 2,000포인트만 더 모으면, 레전드 아이템인 시간을 넘어서를 사용할 수 있었다.
레전드 아이템은 과연 어떤 위력을 보여줄까.
지금으로는 감히 그 효과를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으라차차."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고 기숙사를 나왔다.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응급의학과다.
"구조 팀에 지원하려고 왔는데요."
"아! 구조 팀이요? 과장님 집무실에 있으니까 가보세요."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곧바로 과장실로 이동했다.
어제 알아본 바에 따르면, 구조팀에 들어갈 때 매력적인 보상이 주어진다.
구조 팀 소속으로 출동할 때마다 상점이 쌓인다는 것이다.
조기 진급에 영향을 끼치는 1순위가 상점인 만큼, 구조 팀 활동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안으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응급의학과 과장 파커는 의자에 앉아서 두꺼운 전공 서적을 읽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신경외과에서 수련 중이 기석 최라고 합니다."
"자네가 미스터 최였나?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
파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최기석은 그와 손을 맞잡는 순간 강력한 악력을 느껴졌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파커는 생각보다 키가 크고 덩치도 좋았다.
외모는 투박한 편인데 백인 산적이 있다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는 생각이 들 정도다.
"멀뚱멀뚱하게 서 있지 말고 거기 앉아."
"네."
두 사람이 소파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보았다.
파커는 침묵 속에 그를 훑었는데, 마치 탐색전이라도 벌이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신경외과 수련 중인 자네가 까닭 없이 찾아오지는 않았을 테고, 용건은 역시 구조 팀에 들어가고 싶은 건가?"
"네. 맞습니다."
"구조 팀에 들어오고 싶은 이유는?"
파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상점이 필요해서입니다."
"크하하하하. 아주 솔직한 대답이지만, 조금 실망스러운 대답이기도 하군."
"과장님께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최기석은 담담하게 말하며 파커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파커의 성향은 성공 중심이며, 정치력을 비롯한 각종 스탯이 9단계에 육박했다.
놀라운 사실은 파커 역시 살려야 한다 스킬을 가졌으며, 이를 벌써 최대 레벨까지 올렸다는 점이다.
더 놀라운 점은 그가 스킬 돌파라는 것을 통해 살려야 한다의 상위 스킬인 반드시 살린다까지 마스터했다는 점이다.
응급의학 분야에 끝판왕이라고 할까.
'스킬 돌파라는 시스템도 있었구나. 알아봐야겠는데.'
최기석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주 마음에 들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거짓말하는 사람이거든."
"……."
"그리고 상점 문제로 자네를 탓할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 응급의학과 전공이 아닌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상점을 내걸었던 건 바로 나니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응급의학과도 충분히 매력적인 과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흉부외과 전공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이미 다 들었다고."
파커가 알았다는 듯 커다란 손바닥을 내저었다.
"구조 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아보고 왔나?"
"네. 근무는 오프 때하고 근무시간은 여섯 시간입니다. 구조팀 소속으로 한 달에 사 회 이상 출동하면 상점을 받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구조 팀이 되면 4인 1조로 활동하게 될 거야. 구급대원 두 명에 간호사 한 명 그리고 의사 한 명이지."
"……."
"자네는 모르겠지만, 상부에서 이번 프로젝트에 거는 기대가 커. 수익 측면에서 큰 도움은 안 되지만 지역 봉사의 의미로는 이만한 게 없거든."
"저도 과장님이 대단한 일을 추진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환자 중심이라는 메이죠의 가치는 더욱 굳건해질 겁니다."
"내가 노리는 걸 정확히 알고 있군."
파커가 미소를 지었다.
"인사치례는 이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짝!
파커가 손뼉을 치고 최기석을 바라보았다.
좀 전까지의 온화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면모가 드러났다.
"난 능력 없는 의사는 한 트럭을 줘도 안 받아. 환자를 살리는 건 항상 유능한 의사거든. 그럼 내 프로젝트에도 당연히 유능한 의사가 필요하겠지?"
"……."
"지금부터 구조 팀 합류에 필요한 실기 시험을 보겠어. 도중에 하나라도 틀리면 오늘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하지."
"알겠습니다. 대신 제가 합격하고 정상적으로 활동하면, 상점을 제대로 챙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두말하면 잔소리! 자, 그럼 시험을 시작해 보자."
파커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