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7)
이튿날.
최기석은 차를 몰고 영등포로 향하고 있었다.
"흐흐흐흥."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아버지가 에크모 납기일을 맞췄고, 부품에 장난을 쳤던 범인까지 잡았다.
범인은 다름 아닌 수석과 차석 엔지니어.
그들은 경쟁 회사에서 뇌물을 받고, 납기일을 늦추기 위한 공작을 펼쳤다.
유길함과 유병세의 활약으로 물거품이 되었지만 말이다.
이번 일로 아버지는 상여금을 받게 되었으며, 부사장의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최기석은 아버지 소식에 뿌듯함을 감출 수 없었다.
병원 생활을 하면서 부모님에게 효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미국으로 간 이후에는 그 정도가 더 심했고 말이다.
이번 사건으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 같아 기뻤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동물 병원에 도착했다.
접수하고 진료실로 들어가자 수의사와 장군이가 함께 있었다.
"멍! 멍! 멍!"
장군이가 쾌활하게 짖으며 다가왔다.
신나게 꼬리를 흔드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띠링!
[장군이와 라포를 형성하였습니다.]
NEW [라포 2단계 - 믿음]
[숨겨진 임무, 동물 사랑을 완수하셨습니다. 보상으로 특수한 칭호를 제공합니다.]
[애니멀 러버]
-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지요. 그대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돌려받지요.
- 칭호 효과: 종에 무관하게 동물이 당신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접촉한 모든 동물과 자동으로 라포 1단계를 얻습니다.
알림을 확인한 최기석은 피식 웃었다.
이러다가 정말 수의사로 전직해야 하는 거 아닌가.
"짜식. 형아가 그렇게 좋아?"
"멍! 멍! 멍!"
장군이가 그의 질문에 대답하듯 우렁차게 짖었다.
자신을 보고 반가워하는 장군이를 보니 왜 애완견을 키우는지 알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도 가족은 무심하고, 애완견만 반겨 준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니 말이다.
"장군이 상태가 좋아 보이네요."
"네. AGDV가 끝나고 회복이 빨랐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건강해졌죠."
수의사가 웃으며 몇 가지 주의사항을 전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이만."
최기석은 진료비를 수납하고, 장군이와 동물병원을 나왔다.
지이이이잉.
차에 오르려는 찰나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하고, 통화를 연결했다.
[최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양태만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어제 선생님이 보내 주신 자료, 마을 사람들에게 전부 돌렸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박기춘 의원이 그동안 해온 처방과 마을 사람들을 속여 온 방식을 한 장의 자료로 만들었다.
보이콧 움직임을 만들기 위해서다.
"반응은 어떤가요?"
[처음에는 썩 좋지 않았습니다. 서울에서 온 젊은 의사가 괜히 유식한 척한다는 이야기가 돌았거든요.]
"이런. 그게 아닌데."
[그래서 저도 애를 먹었는데, 의외로 일이 잘 풀렸습니다.]
"……."
[이장님 댁 조카 중에 약사가 있는데, 마침 어제 마을에 왔어요. 그분이 자료를 확인하고 박기춘 의원이 나쁜 짓 했다는 걸 증명해 주셨습니다. 이장님 댁 조카가 하는 말이니까 다들 쉽게 믿더군요.]
"천만다행이네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양태만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정말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일로 한걸음에 먼 곳까지 와주시고, 직접 나서서 마을 사람들까지 챙겨 주시고…….]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너무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최기석은 양태만과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통화를 끊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다 보니 문득 최미순이 떠올랐다. 통화를 길게 하면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잠시 후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왔다.
소파에 앉아서 한숨을 돌리는데, 장군이가 다가와 그의 발밑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녀석이 이렇게 귀여웠다니…….'
최기석은 장군이의 머리를 쓸어 주다가 간식으로 개껌을 주었다.
병원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평화로운 시간.
하지만 이것이 꼭 좋지만은 않았다.
한국에 온 지 나흘밖에 되지 않았건만, 벌써 온몸이 근질거렸다.
환자를 보고 싶었다.
수술실에 들어가고 싶었다.
보통 사람이 아닌 의사로서의 의미를 찾고 싶었다.
최기석은 장군이와 적당히 놀아 주다가 방으로 돌아갔다.
메이죠 클리닉 외과 매뉴얼을 통해 신경외과 공부를 하고 트레이닝 룸에 입장했다.
수련에 몰두하는 사이 어느덧 저녁이 찾아왔다.
최기석은 차를 몰아 의진대 병원으로 향했다.
야외 주차장에서 주변을 살피는데, 낯익은 얼굴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바로 조지환이다.
"안녕하세요. 부병원장님."
최기석은 차에서 내려 인사를 건넸다.
"또 무슨 일로 병원에 왔지?"
"만날 사람이 있어서 왔습니다."
"흐음…… 아무리 봐도 메이죠에서 제대로 수련하는 게 맞는지 의심이 가는군. 난 이만 가지."
조지환이 자기 할 말만 하고 휙 하니 자리를 떴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네.'
최기석은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살핀 결과, 그의 성향은 여전히 환자 중심이다.
저번에 봤던 게 헛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불가능한 것을 제외하고 남는 것.
그것이 아무리 있을 법하지 않아 보여도 그것이 진실이다.
누군가가 했던 말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차라리 잘 됐어.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믿는다면, 언젠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석아!"
밝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정설화가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자기 왔어?"
최기석은 정설화를 가볍게 끌어안고서 엉덩이를 팡팡 두들겼다.
"누…… 누가 보면 어쩌려고!"
"걱정은 붙들어 매셔. 다 확인했으니까. 오늘은 별일 없었지?"
"속 썩이는 환자가 몇 명 있었지만 잘 넘어갔어."
"잘했네. 그럼 타시죠."
최기석은 조수석 문을 열어 주고 운전석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직접 안전벨트를 채워 주던 도중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오늘따라 정설화가 유난히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래서 볼에 가볍게 키스하고, 안전벨트를 채웠다.
"웬일로 서비스가 좋네."
"네. 오늘은 여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칫. 느끼하게 굴지 말고 평소에 잘해."
정설화가 농담조로 말하며 웃었고, 최기석도 웃음을 터뜨렸다.
"시간이 별로 없네. 빨리 가자."
최기석은 차를 몰아 근처 극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정설화와 영화를 보기로 한 날이다.
영화 제목은 라이프 오브 닥터.
의료물은 그동안 숱하게 드라마로 방영되었지만, 영화로 제작되는 것은 이번이 최초다.
평론가와 관객의 호평이 계속되는 가운데, 라이프 오브 닥터는 이번 주에만 400만 관객을 찍었다.
예매한 티켓을 출력하고,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우리 연애하고, 영화 보는 건 처음이지?"
"맞아."
정설화의 말에 최기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지트에서 가끔 드라마나 예능을 봤지만,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너무 좋다. 진작 올걸."
정설화는 팔걸이를 치우고, 최기석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반나절 병원에서 고생한 것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한국에 돌아오면 자주 오자."
최기석은 정설화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등이 꺼지고, 영화가 상영되었다.
두 사람은 대화를 잊은 채 영화에 집중했다.
라이프 오브 닥터는 환자만 생각하는 바보 흉부외과의와 심부전증을 앓는 여 환자.
두 사람의 사랑을 그린 이야기였다.
병원 속 풍경을 생생하게 그리면서, 그 속에서 의사가 환자와 보호자들이 충돌하는 모습, 의사로서의 고뇌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아…… 싫다."
영화가 절정으로 치 닫을 무렵, 정설화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팔을 끌어안은 손에는 잔뜩 힘이 들어갔다.
이윽고 끝난 영화.
정설화는 기어이 한바탕 눈물을 쏟고 말았다.
"너무 슬퍼. 마지막을 꼭 그렇게 해야 했나?"
"민철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나라도 그랬을 거고."
영화의 마지막에서 남주인공 민철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리고 뇌사 판정을 받기 전 간신히 의식을 차려, 동료에게 자신의 심장을 여주인공에게 이식해 달라고 부탁한다.
여주인공은 아무것도 모른 채, 남주인공의 심장을 이식받게 되고 말이다.
이어지는 대망의 엔딩 씬.
여주인공은 남주인공의 무덤을 찾아가 통곡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났다.
"이제 좀 괜찮아?"
"응."
"그러고 보니까 다른 사람들도 많이 우네."
최기석이 주변 사람들을 살피며 말했다.
"당연하지. 슬프니까. 기석이 너는 안 슬퍼?"
"이 정도는 참을 만해."
"바보. 슬플 때는 시원하게 우는 게 좋아. 그러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져"
"그런가?"
최기석의 입가에 쓴 웃음이 걸렸다.
과거의 삶에서는 환자에게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해서 주변 사람들과 충돌이 잦았다. 하지만 새로운 삶을 얻은 후에는 그런 케이스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인간적인 감정과 치료 사이에는 어느 정도 간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만약 자신이 영화 속 주인공이었다면 애초에 환자와 사랑에 빠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배고프지? 좋은 데 예약했으니까 거기로 가자."
"좋아!"
두 사람이 가까운 레스토랑을 찾았다.
음식을 먹으면서 영화에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까 국내에서 의사가 주인공인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네."
"맞아. 지금까지 작품이 안 나온 게 신기할 정도야. 이번 작품이 흥했으니까 앞으로 자주 나오겠지."
의료물은 앞으로도 꾸준한 수요를 보일 것이다.
세상에 아파 본 적이 없는 사람도 없고, 병원에 가 보지 않은 사람도 없다.
모두가 공감하기 좋은 소재인 데다가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기에도 의료물만 한 것이 없었다.
"기석이 너는 괜찮은 거지?"
"뭐가?"
"너도 심장이식 수술 받았잖아."
"내 걱정 할 필요 없어. 알잖아. 100일 당직도 끄떡없이 버텼던 거. 게다가 메이죠는 의진대보다 여유로워서 무리할 일도 없어."
"그러면 다행이지만……."
정설화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면역억제제도 잘 챙겨 먹고 있으니까 손톱만큼도 걱정할 필요 없어. 그건 그렇고……."
"……."
"주말에 여행 갈 곳 예약해 놨어. 남해에 있는 리조트인데 풍경이 끝내주더라."
"정말? 벌써 기대된다."
"암. 기대해도 좋아."
최기석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가슴을 두들겼다.
두 사람은 식사를 끝내고, 인근 선술집에서 2차를 가졌다.
술이 들어가면서 속 깊은 이야기가 이어졌다.
병원 생활에 대한 어려움과 고뇌, 환자와 동료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자정이 가까웠다.
"오늘 자고 가도 돼?"
"응. 약속 있다고 미리 말해 놨어."
"저번에 아버님하고 통화한 것 때문에 괜히 겁난다. 귀가 간지러운 것 보니까 이제 막 욕을 시작하신 것 같은데?"
최기석의 농담에 정설화가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두 사람은 팔짱을 낀 채 인근 모텔로 들어갔다.
최기석이 먼저 샤워하고 침대에 걸터앉았고, 정설화도 샤워 후 그의 곁에 앉았다.
"선생님. 저 여기가 너무 아픈데요."
"응?"
"여기가 너무 아프다고요. 빨리 치료해 주세요."
최기석이 미소를 띤 채 검지로 입술을 가리켰다.
"뭐야? 상황극?"
정설화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촉촉하게 젖은 고혹적인 머릿결.
코끝을 스치는 샴푸 향기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환자분. 이제 치료 끝났어요."
"우와! 명의시네요. 아픈 게 싹 났어요."
"그럼요. 저는 대한민국 최고의 의사니까요."
정설화가 최기석의 너스레를 받아쳤다.
"저 여기도 아픈데 치료해 주실 수 있나요?"
"……."
최기석의 두 번째 요구에 정설화의 두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 정말 이…… 이상한 환자분이네요. 아무래도 혼 좀 나야겠어요!"
"네? 혼이요? 저는 환자인……."
정설화의 저돌적인 공격(?)에 최기석은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