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6)
"안녕하세요."
최기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자 유병세도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제 스승님이에요. 청진대학교 유길함 교수님이라고 합니다. 은퇴한 지 얼마 안 되셨어요."
"안녕하세요. 최기석입니다."
"유길함이에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통성명을 나눈 후 자리에 앉았다.
최기석은 커피를 주문한 후 맞은편에 앉은 유길함을 바라보았다.
유길함은 언뜻 도인 같은 면모를 풍겼다.
보기 드문 개량 한복을 입었으며, 눈이 맑고 투명했다.
풍성한 콧수염과 턱수염은 산타클로스와 비교될 정도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유길함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해보았다.
[성향: 기술 중심]
체력: 6/10
신기술 개발력: 7/10
의공학기 분석력: 8/10
전문분야: 제세동기, 에크모, 심전도, ESWL(Extracorporeal Shock Wave Lithotripter, 체외충격파쇄기)
'그래. 이분이라면.'
최기석은 확신했다.
유길함이 뛰어난 솜씨를 갖춘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새로 생긴 성향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만약 그가 돈과 명예를 중시했다면, 이번 일을 맡길 수 없었으리라.
"병세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실력과 인성을 두루 갖춘 의사 선생님이라고 하던데."
"과찬입니다. 전 아직 갈 길이 멀었습니다."
"메이죠에서 수련 중이라는 말도 들었어요. 외국에서 의사 생활하기 쉽지 않죠?"
"힘들지만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기석의 대답에 유길함이 미소를 지었다.
"최 선생을 보고 있으니 좋은 기운이 느껴지는군요. 병세도 이제 제법 사람 볼 줄 안단 말이지."
"그럼 혹시……."
"그래. 이번 일, 내가 도와주마."
"감사합니다."
유병세가 고개를 숙였다.
유길함은 의공학 분야에 대가지만 다소 괴팍한 면이 있었다.
본인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퍼주지만, 아닌 사람에게는 얼음장처럼 날카롭다. 최기석이 유길함의 마음에 들어서 천만다행이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하는데. 어때요?"
"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최기석은 아버지가 겪는 일을 자세하게 설명했고, 유길함이 이를 진지하게 경청했다.
"흐음…… 에크모의 결함이라……."
유길함이 수염을 쓸어내렸다.
"결함 부위는 정확히 알고 있어요?"
"혈액 실린더와 가스 블렌더에 이상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딱히 에러가 날 부분은 아닌데?"
"교수님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회사에서도 문제를 찾느라 고심 중이라고 합니다."
"뭐. 자세한 건 가 봐야 알겠군요."
"그럼 이만 일어날까요?"
최기석의 말에 유길함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카페를 나와 해태 바이오 메디컬을 찾았다.
회사는 강남에 한 빌딩을 통째로 사용 중이다.
최기석이 보안요원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대자 편하게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똑. 똑. 똑.
노크하고 아버지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책상에서 서류를 살피는 중인데, 이틀 만에 수척한 기색이 짙어졌다.
"어. 왔구나. 뒤에 계신 분들은……."
"아버지를 도와줄 분들이에요."
최기석이 나서서 아버지와 일행의 소개를 도왔다.
"거두절미하고 결함 있는 에크모부터 봤으면 좋겠습니다. 말로만 들어서는 어디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모르니까요."
"알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일행이 먼저 걷는 아버지를 뒤따랐다.
이윽고 도착한 엔지니어실.
수석 엔지니어와 차석 엔지니어가 한참 에크모의 파트를 분해 조립하고 있었다.
"이사님. 오셨습니까?"
두 엔지니어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결함의 원인은 아직 못 찾았나?"
"……죄송합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지금으로써는……."
"하아…… 납기일이 모레야. 오늘 문제를 해결하고, 내일 고쳐야 간신히 데드라인을 맞춘다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두 엔지니어가 풀죽은 목소리로 답했고, 아버지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들겼다.
"됐으니까 그만 가 봐."
"네? 그러면 결함은 누가 발견을……."
"내 말 못 들었나? 그만 가보라고. 이번 일의 책임은 전부 내가 진다!"
아버지의 호령에 두 엔지니어가 물러났다.
엔지니어 실에 싸늘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유길함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강단이 대단하시군요."
"무슨 말씀입니까?"
"이사님과 우리는 초면 아닙니까? 그런데 회사의 엔지니어를 물리치고, 우리에게 일을 맡기다니. 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못할 겁니다."
"전 제 아들을 믿습니다. 그러니 아들이 데려온 사람도 당연히 믿습니다."
"제가 설계도를 요구해도 그럴까요?"
아버지는 설계도를 내미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하하. 부전자전이라고, 두 분 다 못 말리겠습니다. 이 믿음 보답하도록 하죠. 병세야."
"네."
"일단 설계도부터 확인하자."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아서 설계도를 훑었고, 최기석은 아버지와 근처 의자에 앉았다.
"저분들은 어떻게 알게 됐니?"
"의진대에 다닐 때 병세 씨가 인공심폐기사였거든요. 수술할 때 매일 보는 사이였고요. 며칠 전 회식자리에서 아버지 일을 부탁해 봤는데, 흔쾌히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랬구나."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잘했다.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인연이 닿을지는 아무도 모르지."
"네. 명심할게요."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대단하네.'
최기석은 작업 중인 유길함과 유병세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은 설계도를 훑은 후 에크모를 재조립해 나갔다.
우선 완성 단계에서 오류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수많은 부품들의 아귀가 맞으면서 에크모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들이 작업하는 모습은 의사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기계일 뿐.
오랜 시간이 걸려 에크모가 완성품의 모습을 띠었다.
"교수님. 일단 가동해 보겠습니다."
"그래."
유길함의 지시에 유병세가 에크모를 작동시켰다.
드르르르륵.
전원이 들어오고 펌프가 돌아갔다.
언뜻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듯싶었지만, 혈액 실린더와 가스 블렌더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두 군데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닌데요?"
"문제가 또 있습니까?"
유길함의 말에 아버지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보니까 열교환기 쪽에도 문제가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고치면 됩니다. 대신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유길함이 피식 웃으며 다시 작업에 나섰다.
아까와 달리 에크모의 구조를 완전히 파악했다는 듯 손놀림이 경쾌해졌다.
지이이이잉.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 아버지가 통화를 연결했다.
[…….]
"네. 알겠습니다. 최대한 납기일을 맞춰 보도록 하겠습니다."
[…….]
"네. 네."
아버지가 땀을 뻘뻘 흘리다가 통화를 끊었다.
"임원 전화에요?"
"부사장님 전화다. 병원 쪽에서 납기일을 내일까지 맞춰달라고 부탁했다더구나. 오늘 안에 수리를 못 하면……."
아버지가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버지의 초조해하는 모습에 최기석도 덩달아 마음이 급해졌다.
환자에게 처치하는 일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돕겠지만,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의공학은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니기에.
'다들 이런 기분이겠지?'
최기석은 새삼 수술 대기하는 보호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보호자들 대부분은 의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의 생명을 생판 모르는 의사에게 맡긴다.
즉 지금 상황은 환자가 병원에서 겪는 상황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병세야. 다시 한 번 해 보자."
"네."
드르르륵.
두 번째 가동하는 에크모.
최기석은 아버지와 함께 간절한 눈빛으로 에크모를 응시했다.
확실히 좀 전과 달랐다.
결함을 표시하는 빨간 불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혈액 실린더 이상 없고 가스 블렌더도 이상 없고, 열교환기도 잘 돌아가네."
"네. 정상 가동 중입니다."
유길함의 말에 유병세가 한 마디 덧붙였다.
"이제 에크모 걱정은 안 하셔도 되겠습니다. 결함은 모두 해결했어요."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두 사람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고, 최기석도 같이 감사의 뜻을 표했다.
납기일이 당겨진 상황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결함이 해결됐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눈물이 날 뻔도 했다.
"아주 훌륭한 에크모를 개발하셨더군요. 이만한 수준이라면, 굳이 외국에서 수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혹시 이철준 교수의 자문을 받으셨습니까?"
"네. 맞습니다."
"대충 예상은 했습니다. 그 친구의 솜씨가 아니라면, 국내에서 에크모 개발은 불가능하니까요."
"맞습니다. 안 그래도 결함 발견 후 이철준 교수님께 급히 연락을 드렸는데, 연락을 안 받으셔서."
"그 친구가 원래 제멋대로거든요."
유길함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는데 아버지가 운을 뗐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대체 에크모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거죠? 분명 시험 가동할 때만 해도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유길함이 따로 모아둔 부품을 보여 주었다.
"해당 파트에 몇 가지 부품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핵심 부품에 변형이 있었으니 당연히 결함이 있을 수밖에요."
"부품이 바뀌었다는 건 설마……."
"네. 생각하시는 그대로입니다."
대화가 끝나고 엔지니어실에 칼바람이 불었다.
누군가가 부품을 바꿨고, 그로 인해 에크모에 오작동이 일어났다.
그 말인즉슨 엔지니어 중 타 회사의 첩자가 있다는 뜻이다.
즉 첩자가 납기일을 맞추지 못하도록 기계에 장난을 친 셈이다.
"말씀을 듣고 보니 의심 가는 사람이 몇 명 있군요. 그건 제 문제니까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두 분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지옥에서 빠져나온 기분입니다."
"다 아드님을 잘 두신 덕이죠."
"그래. 고맙다. 기석아."
아버지가 다가와 최기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처음으로 아버지를 도왔다는 사실에 최기석도 뿌듯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은 꼭 집에 돌아오세요."
작별 인사를 하고 회사를 나왔다.
어느새 하늘이 어둑해졌고, 쌀쌀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감사 인사로 저녁을 대접하고 싶은데 어떠세요?"
"저야 좋죠. 교수님은요?"
"나도 좋다."
"안 그래도 오기 전에 봐둔 횟집이 있습니다. 싱싱한 회도 먹고, 술도 한잔 걸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세 사람이 나란히 거리를 걸었다.
문제를 무사히 해결한 만큼 발걸음이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교수님. 혹시 나중에라도 의공학 분야에 대한 가르침을 청할 수 있을까요?"
최기석이 진지하게 물었다.
오늘 두 사람의 활약을 보면서 깨달은 게 있다.
의료뿐 아니라 의료에 기반을 두는 기기들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에크모나 인공심장 같은 의료 발명품은 환자를 살리는데 큰 몫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와서 의공학을 배우겠다고요? 됐습니다."
"그래도 배워 두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언제 어떤 상황에서 지식이 필요할지 모르는데."
"내 대답은 '절대 아니다'예요."
유길함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최 선생은 우리가 작업하는 내내 초조한 기색을 보이던데. 본인이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무력함을 느꼈죠?"
"……네. 맞습니다."
"그런 무력함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아서 의공학을 배우고 싶었던 거고요."
"족집게시네요."
최기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의사가 굳이 의공학까지 배울 필요는 없어요. 그건 100퍼센트 시간 낭비니까."
"……."
"모든 분야에서 최고가 된다는 건 그 누구도 불가능해요. 그러니까 최 선생은 본인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면 됩니다. 그리고 그때 최고의 동료, 믿을 만한 동료를 곁에 두면 돼요. 알겠습니까?"
유길함의 말이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최고의 자리에서 최고의 동료들과 함께라…….
"말씀 감사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목소리에 바짝 기합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