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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215화 (214/407)

한국에서 (5)

"약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네.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희한하네. 그럴 리가 없는데."

"혹시 이 의원에서 처방받은 다른 약 봉투도 가지고 계십니까?"

"며칠 전에 형님이 진료를 받았습니다. 잠시만요."

양태만이 집안을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약 봉투를 최기석에게 내밀었다.

약 봉투를 훑는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걸로 확실해졌습니다. 그 의원, 앞으로 안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네?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죠."

최기석의 설명에도 양태만이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시골 촌놈이라 무식해서요. 아직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네요."

"한마디로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그곳은 약을 과하게, 그리고 잘못된 방식으로 처방하고 있습니다. 제가 떠나기 전에 들러서 경고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세상에…… 그러니까 그 용한 선생님이 나쁜 놈이라는 거죠?"

"네."

최기석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도련님. 빨리요! 방으로 와 보세요."

최미순 장남의 부인이 황급하게 손짓했다.

이에 양태만과 최기석이 최미순의 방으로 들어갔다.

쥐 죽은 듯이 누웠던 최미순이 눈을 떴다. 그녀는 장남의 손을 꼭 붙잡고 대화 중이다.

"이상혀. 참말로 이상혀. 오늘 아침까지만 혀도 온몸이 아파서 죽는 줄 알았는디. 지금은 그런대로 버틸 먼 하구먼. 죽을 때가 다 돼서 그런가잉?"

"어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내도 시방 내 죽을 때가 됐다는 건 다 알아잉. 괜한 소리 말……."

최미순이 말을 멈췄다.

뒤늦게 들어온 최기석을 알아본 것이다.

"시방. 이게 무슨 일이여? 내가 지금 허깨비를 보고 있는 건가?"

"허깨비라니요. 저 여기 있습니다. 최기석 의사예요."

최미순의 곁에 앉아서 손을 붙잡자 그녀가 굵은 눈물을 흘렸다.

최기석은 자신도 울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같이 울면 모처럼의 귀중한 순간이 울음바다가 되어 버릴 것 같았다.

지금은 울 때가 아니다.

재회의 기쁨과 헤어짐의 아픔.

이 두 가지를 가슴 저 바닥까지 묻어 둬야 한다.

"얘마냥 울기나 해 쌌고. 참 마. 쪽팔린다."

최미순이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외…… 외국에 있다고 들었는디? 여긴 어떻게 왔어잉?"

"어르신 뵙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하여간 말도 잘혀. 자식 놈들한테 내 야기는 다 들었지?"

"……네."

"미안하구먼. 약속을 못 지켜서. 둘째 놈 손주 보기 전까지 건강하기로 했는데. 그라제?"

"괜찮습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아따 왜 안 중요혀? 내가 말만 뺀지르르 해 싸 놓고 약속을 어겼는디."

최미순의 입가에서 한숨이 터졌다.

감정이 복잡했다.

최기석을 다시 보게 된 것은 기쁘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은 불편했다.

"쿨럭. 쿨럭."

최미순이 입을 가리고 기침했다.

손을 치우자 손바닥에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또또 지랄같이 눈이 감기네잉. 매가리를 못 추겠어."

"엄마. 눈 뜨고 있어! 끝까지 정신 차려야 돼."

"아따 그게 내 마음대로 되어야 말이지잉."

최미순의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갔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방에 있는 모든 이가 느끼고 있었다.

최미순과 헤어질 때가 다가왔음을.

"우리 첫째 놈은 다영이 잘 키우고, 우리 둘째 놈은 아이고. 썩을 놈. 니가 빨리 결혼하고 아를 봤으면 최 선생하고 약속을 지켰는디."

"……."

"그래도 빨리 결혼해서 손주 봐야 혀. 살아서는 못 봐도 천당 가서 꼭 볼 테니까. 그리고. 최 선생."

최미순이 최기석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나 때문에 욕 많이 봤어. 그동안 고맙고 미안혀."

"미안하다니요. 그런 말씀 마세요."

"우리 최 선생 목표가 시계 최고의 의사가 되는 거라고 했징?"

"네. 맞습니다."

"최 선생이라면 할 수 있을 겨. 나는 믿어. 나한티 했던 것처럼만 병들고, 서러운 사람들을 치료해 줬으면 좋겠구먼."

"네. 꼭 그럴게요. 약속합니다."

"그랴. 그랴."

최기석의 손을 쓰다듬는 최미순의 손길이 뜸해졌다.

희미하게나마 들썩거리던 눈꺼풀이 이제는 완전히 감겼다.

"이제 정말 갈 때가…… 됐나 부려. 저기서 여…… 영감이 보이는 것 같……."

최미순이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멎으면서 몸이 가볍게 떨렸다.

"아이고. 엄마!"

"어머님! 어머님!"

방안이 순식간에 통곡과 울음의 바다로 넘쳤다.

최기석의 눈에서도 기어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새로운 삶과 특별한 능력을 얻었음에도 그녀를 살릴 수 없었다.

돌멩이라도 얹힌 것처럼 가슴 한쪽이 무겁고 아팠다.

그는 가족들을 위해 조심스럽게 방을 나왔다.

쏴아아아아아.

하늘에서 봄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최기석은 최미순의 마을 근처를 걷고 있었다.

그녀가 수십 년 동안 살아온 장소를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 두고 싶었다.

밤새 내린 비로 땅이 촉촉하게 젖었다.

길옆에 늘어선 꽃들이 흠뻑 물을 머금었고, 물웅덩이에는 푸른 구름이 비쳤다.

어제 밤새 내린 궂은비가 오래전 이야기 같았다.

최기석은 상태창을 확인하고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최미순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와 쌓았던 라포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 세상에 그녀가 없다는 것.

야속한 상태창이 인정하기 싫은 현실을 계속 깨우쳐 주었다.

터벅. 터벅.

최기석은 계속 걸었다.

최미순은 떠났지만, 그녀의 의지는 아직 마음속에 남았다.

세계 최고의 흉부외과의가 되기로 한 그 꿈.

최미순은 그 속에서 아직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그 꿈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최기석은 마을 주변을 한참을 걷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최미순의 작고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조문을 올리고 있었다.

그도 미리 챙겨온 복장으로 오늘 아침 조문을 했다.

상주와 양태만과 짧게 대화를 나눈 후 마을을 빠져나왔다.

그러던 중 근처에 있는 용하다는 의원을 들렀다.

의원의 간판을 보는 순간,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최미순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족과 마을 사람들.

그들이 더 이상 이런 곳에서 진찰받게 둘 수는 없다.

"어떻게 오셨어요?"

데스크에 있는 간호사가 말을 걸었다.

"진료받으러 왔습니다."

"이 동네분은 아닌 것 같은데…… 처음 오셨죠? 이거 작성해 주세요."

최기석은 종이에 이름과 주민번호와 주소를 적은 후 진료실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전문의 박기춘이라는 명패가 최기석을 다시금 어처구니없게 만들었다.

"어디가 아파서 왔죠?"

박기춘이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훌러덩 까진 이마가 천장 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여기가 아픕니다."

"가슴? 혹시 어디 부딪쳤어요?"

"아니요."

"젊은 양반이 담배를 자주 피우나?"

"그것도 아닙니다."

최기석의 대답에 박기춘이 얼굴을 찌푸렸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제대로 말해야 할 거 아니에요? 지금 의사 앞에서 장난하는 겁니까?"

"저는 정말로 가슴이 아픕니다. 바로 당신 때문에."

최기석이 흉흉한 눈빛을 쏘아 내자 박기춘이 겁먹은 듯 눈을 깜빡거렸다.

"여기 문제가 되는 게 한둘이 아니더군요."

"……."

"우선 간판부터 짚고 넘어갈까요?"

최기석이 검지로 창밖에 있는 간판을 가리켰다.

[박 의원. 내과. 정형외과. 소아과. 피부과. 비뇨기과. 이비인후과. 안과.]

"간판이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죠?"

"문제는 없지만, 의도가 아주 불순합니다. 순진한 시골 분들에게 만능 의사처럼 보이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간판만 보면 모든 과목에 정통한 사람처럼 보이니까요."

"……."

"전문의 자격증 없죠?"

최기석의 질문에 박기춘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전문의가 의원을 차리면, 간판 앞에 해당 과목을 붙여야 한다.

예를 들면 '박기춘 이비인후과 의원'이라는 간판을 다는 것이다.

또 다른 방식으로는 '박기춘 이비인후과, 진료과목 - 소아과, 내과'가 되는 방식이다.

반면 전문의가 아닌 사람은 의원 앞에 과목을 붙일 수 없다.

'박기춘 의원, 진료과목 - 이비인후과, 소아과'가 되는 것이다.

즉 간판만 보면 진료하는 의사가 전문의인지(레지던트 과정 수료), 일반의(레지던트 과정 미수료)인지 알 수 있는 셈이다.

"게다가 우리 박기춘 의원께서는 전문의 자격증도 없으신데, 전문의 명패를 달고 있군요."

"너…… 너 누구야?"

박기춘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의사입니다. 박기춘 의원님과 똑같은 일.

반.

의.

죠."

"어린놈이 어디서 행패야, 행패는! 헛소리하지 말고 썩 꺼져. 더러운 꼴 보기 싫으면."

"더러운 꼴은 제가 아니라 그쪽에서 볼 것 같은데요?"

최기석은 가방에서 성분명이 적힌 약 봉투 몇 개를 흔들어 보였다.

"그…… 그건?"

"처방을 너무 환상적으로 하셔서 놀랐습니다. 거의 모든 처방에 스테로이드 약물이 들어가 있더군요. 아주 단순한 감기부터 두통까지 말입니다."

스테로이드 약물을 과다 복용하면 골다공증, 당뇨, 신장부전 등이 발생할 수 있다. 심한 경우 신부전증으로 투석을 받아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런데 박기춘은 마을 사람들에게 스테로이드를 남발했다.

단기간에 염증을 가라앉히고, 통증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스테로이드 처방할 때 필요한 설명은 물론 안 하셨겠죠?"

"그래서 어쩌라고. 엉?"

박기춘이 도리어 성을 냈다.

"법대로 해. 정 우리 의원이 꼴 보기 싫으면 보건복지부에 신고하시던가."

"당신, 최저야. 의사라면 이딴 식으로 처방 내리면 안 돼."

최기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조만간 마을 사람들이 전부 알 게 될 거야. 당신이 어떤 약을 처방했는지, 왜 용하다는 소리를 들었는지 말이야."

"……."

"이 마을에서 장사는 끝났다고. 가.

짜. 전.

문.

의. 나리."

쾅!

최기석은 진료실을 나와 진료비를 수납하고 차에 올라탔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스테로이드 오남용에 관한 법률은 마련되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박기춘을 처벌한 근거가 없다는 뜻이다.

지금으로써는 마을 사람들이 의원을 보이콧 하게 하는 게 유일한 무기다.

"이 세상에는 사기꾼들이 너무 많아."

최기석은 한숨을 쉬며 차를 몰았다.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차를 몰고 강남에 있는 커피숍을 찾았다.

휴대폰을 보니 약속 시간이 10분가량 남았다.

"아버지. 저에요."

통화를 걸자 아버지가 곧바로 받았다.

[어. 그래 무슨 일인데?]

아버지의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어제 집에 안 들어오셨잖아요. 걱정돼서 전화 드렸어요."

[회사 일이니까, 넌 신경 안 써도 돼.]

"솔직히 제 입장에서 신경 안 쓸 수가 없잖아요. 엄마나 동생도 다 걱정하는데."

[마음은 고맙다. 하지만 네가 도와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저는 아니지만 제 지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죠."

[지인?]

"네. 한 30분 정도 있다가 아버지 회사 찾아갈게요. 제 지인 중에 의공학자가 있어서요."

[허허. 쓸데없는 짓을…….]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죠. 그럼 회사 찾아가 봐도 되는 거죠?"

[그래라.]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카페 입구를 응시했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유병세와 한 낯선 남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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