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214화 (213/407)

한국에서 (4)

"부병원장님의 수련 시절이라……."

"네."

"잔을 가뜩 채워 주면 생각해 보지."

최기석이 재빨리 술잔을 채우자 장혁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말해 주는 건 어렵지 않아. 근데 갑자기 그걸 묻는 이유는?"

"정말 만약에, 제가 그동안 부병원장님을 잘못 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동안은 어떻게 생각했는데?"

"출세와 성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직언에 장혁필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찔리는군. 일단 내가 아는 에피소드 한 가지만 들려주겠어."

"감사합니다."

"기석이 너도 어디서 듣고 묻는 거겠지만, 부병원장님은 원래 환자를 끔찍하게 아끼던 분이었지. 인턴 시절부터 환자 바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말이야."

"네. 알고 있습니다."

최기석은 박광수 기자를 통해 조지환의 과거를 들었다.

"부병원장님이 바뀌어 버린 건 아마 그 사건 때문일 거야. 부병원장님이 레지던트 3년 차였을 때의 일이지."

장혁필이 천천히 운을 뗐다.

사건 당시 의진대 병원 응급실로 한 남자가 실려 왔다.

남자는 교통사고로 심각한 흉부 외상을 입은 상태.

조지환은 남자를 진료한 후 수술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치프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 당시 흉부외과 과장에게 연락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싸늘했다.

"수술하지 말고 다른 병원으로 돌려."

"네? 과장님! 이 환자는 당장 수술이 필요합니다! 이송 도중에 죽고 말 겁니다."

"조지환. 내 말이 우습게 들려?"

과장이 싸늘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네가 노티한 대로라면 수술해도 환자가 살아날 가능성은 없다. 쓸데없이 환자 사망률 높이지 말고 당장 이송 보내. 보호자에게는 응급수술이 밀렸다고 대충 둘러대고."

"과장님. 그래도 환자가……."

"의사 생활하기 싫어?"

"……."

"정 답답하면 네가 직접 수술하든가. 왜? 그건 또 자신이 없나? 더 이상 입 아프게 하지 말고 끊어."

조지환은 허탈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마주친 보호자의 눈에서 흐르는 한 줄기 눈물을 발견했다.

"선생님. 수술은 가능한 거죠?"

"……죄송합니다. 응급수술이 밀려서 당장 수술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 수술이 가능한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장혁필은 인근 대학병원에 연락하고 환자와 보호자와 함께 응급실을 찾았다. 그런데 미리 연락했음에도 그쪽 대학병원 역시 수술을 거부했다.

이후 두 번의 퇴짜를 맞고 찾아간 세 번째 병원.

환자는 그곳 응급실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어트렸다.

누군가가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기분이다.

당시 조지환이 느꼈을 참담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상급자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환자를 내쫓고, 다른 병원에서까지 내침을 당했다니…….

의사로서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무력감이 아닐까.

"한잔하자."

"네."

최기석과 장혁필이 잔을 주고받았다.

"부병원장님이 변한 건, 그 직후부터라고 하더군. 환자 바보가 권력의 화신으로 변하는 순간이라고 할까."

"죄송한데 한 가지만 더 여쭤보고 싶습니다. 장 과장님은 부병원장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권력에 눈먼 늙은 여우. 과거에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몰라도 지금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부병원장님이 환자를 위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 안 하시는 거죠?"

"그걸 질문이라고 하나? 네 두 눈으로 부병원장님을 지켜봐 놓고서?"

장혁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최기석을 응시했다.

"혹시 부병원장님이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상상력이 풍부하군. 그럼 환자를 그렇게 위하는 사람이 어째서 권력의 화신이 됐을까?"

장혁필의 질문에 최기석은 가만히 잔을 만지작거렸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한 가지 대답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만화 같은 결론이다.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너무 취해서요."

"암. 그렇고말고. 한 잔 더 하자."

채애애앵.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치고 단번에 술을 비웠다.

이후 그동안 메이죠 클리닉에서 의진대에서 있었던 일을 주고받았다.

근 칠 개월 만의 만남.

둘 다 서로에게 할 말이 많았다.

최기석은 장혁필과 한참 대화하다가 다른 테이블로 옮겼다.

두 번째 테이블은 거의 파장 분위기다.

마취의 신아름은 술주정하는 강하나를 달랬기 바빴으며, 유병세는 자작하며 주변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병세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최 선생님도요. 미국에 있는 동안 오히려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네요."

"하하하. 그래 보이나요?"

최기석은 웃으며 유병세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유 선생님은 의료기기에 대해서 잘 아시죠?"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맞아요. 원래 의공기사 분야에서 일하다가 인공심폐기사로 넘어왔거든요."

"혹시 이쪽을 택하신 계기라도……."

"개인적인 일이라서 말하기 좀……."

유병세가 거리를 두었기에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그래서 의료기기 쪽으로 화제를 이어가다가 본론을 꺼냈다.

"에크모에 대해서는 잘 아시나요?"

"당연히 잘 알죠. 예전에 개발에 참여한 적도 있거든요."

그의 호쾌한 대답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랜만에 복귀해서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실례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최기석은 아버지의 사업 이야기를 요약했다.

아버지 회사가 최근 새로운 에크모를 개발했으며, 잘 작동하던 기기에 갑자기 오류가 생겼음을.

"그냥 들어서는 모르겠고 직접 기계를 봐야겠네요."

"그럼 혹시……."

"네. 회사에 직접 가서 확인해 볼게요. 내일은 일이 있어서 안 될 것 같고 모레 어때요?"

"저야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최기석은 환하게 웃으며 유병세와 술잔을 부딪쳤다.

오늘따라 유독 술이 달았다.

* * *

다음 날 아침, 최기석은 어머니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요? 아침 안 드신대요?"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어. 어제 야근이 늦어서 근처 찜질방에서 잔다고 하더라."

어머니의 말에 반찬이 목에 걸렸다.

아무래도 에크모 사업이 심각하게 꼬인 모양이다.

야근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집에 오지 않는 건 더욱 드물었다.

"네 아빠는 원래 힘들어도 내색 안 하잖니. 지금 속이 얼마나 타고 있을까."

"너무 걱정하지 마. 조만간 좋은 일이 있을 테니까."

"왜? 우리 아들이 발 벗고 나서 보게?"

"발은 아니고 소매쯤?"

그의 농담에 어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 달은 유독 사건이 많네. 네 아버지도 그렇고 장군이도 그렇고. 아 참. 장군이는 어떻게 됐니?"

"급성 위확장 염전이라고, 위가 팽창하고 비틀리는 병에 걸렸어. 수술은 잘 끝났고 내일쯤 데리러 가면 될 거야."

"다행이네. 그나저나 우리 아들 이러다 수의사까지 하는 거 아닌지 몰라. 장군이 아픈 것까지 꿰뚫어 보고."

식사가 끝나고 어머니가 출근했다.

최기석은 오늘도 혼자 남아 집을 지키게 되었다.

'가만 보자.'

베란다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 문제는 내일 해결하면 되고, 정설화와 여행 갈 장소는 이미 예약을 끝냈다.

어제 의진대 회식까지 참석했으니 오늘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굳이 꼽자면 트레이닝과 신경외과 공부 정도?

지이이잉.

소파에 두었던 휴대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라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통화를 연결했다.

"여보세요?"

"우와. 진짜 통화됐네. 선생님 혹시 예전에 입원했던 최미순 환자 기억합니까?"

"그럼요. 목소리를 들으니까 둘째 아드님 같은데.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양태만입니다. 기억해 주시는군요."

양태만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외국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통화가 안 될 줄 알았는데. 전화를 받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외국 생활하는 건 맞는데 최근에 휴가를 왔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양태만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고, 최기석은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표정이 점점 심상치 않게 변해갔다.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곧바로 집을 나섰다.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차를 타고 비탈진 길을 오르고 있었다.

현재 위치는 어느 산골짜기, 길옆으로는 오로지 푸른 산만이 펼쳐졌다.

'하아…….'

문득 바라본 하늘이 어두웠다.

저 멀리서 새까만 먹구름이 몰려왔고, 바람도 난폭해졌다. 언제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차가 논두렁길을 지나 마을 주차장에 멈췄다.

최기석은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통화할 때 들었던 입구 초입에 빨간 기와집, 그것이 금방 눈에 들어왔다. 녹슨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오셨습니까?"

양태만이 다가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원래는 집에서 푹 쉬셔야 하는 건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도 어르신을 꼭 뵙고 싶었어요. 지금 상태는 어떠십니까?"

"오전 내내 끙끙 앓다가 진통제 맞고 잠시 잠드셨습니다. 왕진 온 의사가 그러는데,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라고……."

양태만이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죄송하지만 잠깐 어르신을 봬도 될까요? 조용히 얼굴만 보겠습니다."

"암요. 물론이죠."

최기석이 마루로 향하자 최미순의 자식과 친적들이 그를 알아보고 일제히 인사했다.

그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조심스럽게 최미순의 방으로 들어갔다.

최미순은 아이처럼 평온하게 잠들었다.

오전 내내 아파서 몸부림쳤다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르신.'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오전에 통화한 결과 최미순이 말기 암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위암 수술 한 번, 폐암 수술을 한 번씩 했지만 결국 세 번째 전이 부위가 나왔다.

야속한 하늘은 끝내 그녀를 데려갈 모양인 듯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히포크라테스의 써봤지만, 그녀의 상태는 응급에 Near Death다.

임종이 가까웠다는 뜻이다.

최기석은 그녀에게 페인킬러를 사용하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주사를 맞기 싫다고 투정부리던 모습.

남몰래 양갱을 챙겨주던 모습, 걸쭉한 사투리를 하며 미소 짓던 모습 등등.

그녀와의 추억이 머리를 스쳤다.

아쉬웠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그녀를 지켜보는 것뿐이라는 사실이.

최기석은 최미순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방에서 나왔다.

"선생님. 음료수라도 한 잔 드릴까요?"

"주시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양태만이 내민 비타민 음료를 마시던 도중 냉장고 위에 있는 약 봉투를 발견했다.

"가족 중에 아프신 분이 있나 봐요?"

"아. 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 약을 먹고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용한 의원이 있거든요."

"아. 그런가요?"

최기석은 대답하면서 약 봉투를 살폈다.

"혹시 어디가 아프시죠?"

"그냥 감기입니다."

"알레르기 비염이 있거나 하신 건 아니죠?"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시죠? 뭔가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신지……."

"네. 이거 때문에요."

최기석이 약봉지를 흔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