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3)
[레벨업 스톤을 사용하셨습니다. 하티의 레벨이 Lv.21로 상승합니다.]
최기석은 아이템을 사용한 후 하티를 소환했다.
위이이이잉.
광채가 뿜어지면서 팅커벨을 닮은 하티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하티의 스킬 중 하나인 바람의 축복.
이것은 치료나 처치를 하지 않을 때 체력을 회복시켜 주는 고마운 스킬이다.
최기석은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하고 싶은 일도 많았고, 해야 할 일도 많았다.
어떻게 하면 모처럼 주어진 휴가를 알차게 쓸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지는 가운데 알림이 머리를 스쳤다.
[경고! 경고! 가까운 곳에 환자가 있습니다.]
하티의 알림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특수 스킬 정찰을 꺼놓지 않았다는 사실에 한 번 놀랐고, 근처에 환자가 있다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랐다.
지금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 다른 집에 응급환자가 생긴 걸까.
의문이 깊어지는 가운데 하얀 빛줄기가 그를 향해 뻗어왔다.
하티가 보낸 신호다.
최기석은 빛줄기를 따라 걷다가 장군이 머리 위에서 맴도는 하티를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집에 돌아온 후 장군이를 살핀 적이 없었다.
알림을 끄고 장군이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이런…….'
장군이의 진단명과 상태를 확인한 순간 얼굴이 구겨졌다.
"장군아. 괜찮아?"
"끄으으으응. 끄으으으응"
장군이가 앓는 소리를 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건강했던 평소와는 다른 모습.
최기석은 장군이를 끌어안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전화 걸어 자주 가는 동물병원이 있는지 물었다.
"영등포 쪽으로 가면 큰 동물병원 있어. 그런데 갑자기 병원은 왜?"
"장군이가 많이 아픈 것 같아서. 혹시 거기 수술도 가능해?
"수술?"
어머니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장군이가 수술받아야 하니?"
"정확한 건 아니지만 그럴지도 몰라"
"에휴…… 어제 저녁부터 몸이 안 좋은 것 같더니…… 그 병원 수술도 해."
"알았어. 진료 끝나면 다시 연락할게."
내비게이션에 동물병원 이름을 찍고 차를 몰았다.
병원을 향하는 도중 장군이가 계속 신음을 흘렸다.
그 구슬픈 소리에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비록 그가 의사라고 해도 장군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가 살피는 건 개가 아니라 사람이었으니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동물병원으로 들어갔다. 대기석에는 제법 많은 애견과 견주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반 병원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반려견 진료 좀 보려고 하는데요."
"전에 진료받은 적 있으세요?"
"네. 있습니다."
최기석은 접수하고 대기석에 앉았다. 그리고 장군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평소에는 자신을 무시하던 녀석이지만 아파하는 걸 보니 측은함이 들었다.
사람이 사는데 몸 아픈 것만큼 서러운 일이 없다.
동물이라고 다르지 않으리라.
"최기석 님, 들어오세요."
긴 기다림 끝에 간호사의 호출이 왔다.
최기석은 장군이와 진료실로 들어갔다.
장군이를 가운데 두고 수의사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어색하기만 했다.
동물 병원에 온 것도, 수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것도 처음이었으니까.
"안녕하세요. 반려견이 어떻게 아프죠?"
"배가 안 좋습니다. 손으로 만졌을 때 땅땅하게 부어 있고요."
"사료는 언제, 얼마나 주셨죠?"
수의사가 장군이를 살피며 물었다.
"제가 준 게 아니라서 정확히 모르겠……."
"크어어어억."
장군이가 그의 말을 끊으며 구토했다.
테이블 위로 시큼한 냄새의 구토물이 흘러내렸다.
"선생님. 장군이가 혹시 AGDV(Acute gastric Dilatation and Volvulus, 급성 위확장 및 염전)에 걸린 거 아닙니까?"
"반려견을 많이 키워 보셨나 봐요? 지금으로써는 AGDV일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복부 팽만이 심한 데다가, 지금 이 소리 들리세요?"
수의사가 장군이의 배를 두드리자 통통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가 AGDV의 전형적인 증상입니다. 증상이 심해지기 전에 잘 데려오셨네요."
급성 위확장 및 염전은 대형견에서 종종 발생한다.
위가 팽창하다가 몸통 축을 중심으로 비틀리는 질병을 말하는데 치사율이 40퍼센트에 가까웠다.
"혈액 검사와 방사선 검사 후 필요한 처치를 하겠습니다. 자세한 건 검사 결과가 나와야 하겠지만, 수술이 필요할 가능성이 큽니다. 위의 위치를 고정해 줘야 하거든요."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진료실을 나와 처치실로 이동했다.
동물병원 간호사가 장군이에게 수액 놓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푸우우욱.
카테터가 피부를 찔렀지만, 혈관을 꿰뚫지 못해서 피가 맺히지 않았다.
간호사는 카테터를 움직여 혈관을 찾으려 했고, 그럴 때마다 장군이가 구슬픈 신음을 흘렸다. 움직일 힘도 없어 쳐졌던 녀석이 뒤척거리며 발악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보조하던 다른 간호사와 최기석이 애를 먹었다.
"괜찮다면 제가 라인을 잡아도 될까요?"
"견주님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전 의사입니다. 수의사는 아니지만, 라인 잡는 일은 할 수 있어요."
최기석은 지갑에서 의진대 병원 명함을 꺼냈다.
비록 의진대 병원 의사는 아니지만 메이죠 클리닉 이야기를 하면 오히려 의심을 살 것 같았다.
"정말 의사세요?"
"네. 의심나면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으음…… 그럼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장군이 혈관이 잘 안 보여서……."
"네.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장군이를 바라보며 머리를 쓸어 주었다.
"이제 괜찮아. 안 아프게 끝내줄게."
장군이가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등을 혀로 핥았다.
최기석은 손을 깨끗이 씻은 후 알콜솜으로 장군이의 발을 넓게 소독했다.
그리고 토니켓으로 발 상단 부를 묶고서 혈관을 찾았다.
'좋았어. 이만하면…….'
주사기를 손에 쥐고 과감하게 피부를 찔렀다.
푸우우우욱!
주사침 부분에 빨간 피가 고였다.
[뱀파이어 칭호 효과가 발동합니다. 주사를 이용한 처치 성공률이 100퍼센트가 되며, 통증은 50퍼센트 감소합니다.
"우와. 한 번에 성공하셨네요?"
"ABGA도 하는데요. 뭐."
"이제 검사실로 들어갈게요."
최기석은 장군이가 검사받는 장면을 지켜보고 의사와 다시 마주했다.
"문진했던 대로 급성 위확장 및 염전이 맞습니다. 우선 복부에 찬 가스를 빼기 위해 감압을 해 줄 거고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위 고정 수술도 진행하겠습니다."
"선생님. 혹시 수술 참관이 가능할까요?"
"저희 병원은 수술 참관은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대기실에서 기다려 주세요. 수술 시간은 두 시간 정도로 보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하는 수 없이 대기석으로 돌아왔다.
초조하게 수술을 기다리던 중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다른 사람의 애완동물을 훑었다.
동물의 질환이라고 해서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떤 개는 방광염을 앓고 있었고, 어떤 개는 녹내장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다.
띠링!
도어벨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허겁지겁 동물병원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뱀이 들려 있었다.
"저기. 혹시 파충류도 진료됩니까? 우리 콘이 며칠째 먹이도 안 먹고, 잘 움직이지도 않아요."
"죄송합니다. 저희는 개와 고양이 진료만 하는 병원이라서요. 특수 동물 진료는 다른 곳에서 보셔야 합니다."
"그럼 근처에 파충류 진료 보는 곳 없나요? 이러다가 우리 콘 죽을 것 같은데."
남자가 발을 동동 굴렀다.
"강서구 쪽에 협력 병원이 있는데 그쪽으로 가 보시겠어요?"
"감사합니다."
남자가 명함을 받고 쌩하니 병원을 떠났다.
최기석은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서 흉부외과 응급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의 모습이 겹쳐졌다.
만약 복부 대동맥류를 앓고 있는 환자가 있다면, 그 환자는 여러 병원을 헤매다가 결국 대학병원에 가야 한다.
대학병원을 제외하면 흉부외과가 있는 곳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상념에 빠져드는 찰나 젊은 여자가 급하게 동물병원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품에는 고양이가 안겨 있었다.
"저기요. 우리 미란이 좀 봐주세요. 얘가 갑자기 숨을 안 쉬어요."
"숨을 안 쉰다고요?"
접수하던 간호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선임 간호사를 데리고 와서 고양이 진료를 보게 했다.
"안 되겠어. 당장 CPR 해야 돼."
선임 간호사가 고양이의 뒷다리를 잡고, 고양이의 머리가 바닥을 보게 하였다.
퍽! 퍽! 퍽!
손등으로 고양이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후 사람에게 하듯이 하임리히법으로 기도를 확보했다.
"인공호흡은 제가 할게요."
후임 간호사가 고양이의 입을 막은 후 코로 숨을 불어넣었다.
이어지는 심장 마사지.
두 간호사의 CPR로 고양이는 간신히 바이탈을 회복했다.
"정말 감사해요."
"아닙니다. 당연한 일인데요. 일단 접수하시고 진료도 받으셔야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처음 본 동물 CPR이 신기하기만 최기석.
그는 자신도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똑같이 처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후아…… 오늘은 이상하게 바쁘네."
"정말요. 환자가 평소보다 두 배는 많은 것 같아요. 원래 오전에는 이렇게 안 바쁜데."
간호사들이 대화하면서 최기석을 응시했다.
그들이야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본 것이지만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환타 칭호가 동물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닐까.
오랜 기다림 끝에 장군이의 수술이 끝났다.
최기석은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의식 없는 장군이를 살폈다.
수술이 무사히 끝나면서 상태가 보통으로 돌아왔다.
진단명도 뜨지 않았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다만 경과 관찰을 위해 이틀 정도는 입원하는 게 좋겠어요."
"네. 그렇게 해 주세요."
최기석은 진료비를 계산하고 병원을 나왔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아프다'라는 깨달음을 얻은 채.
* * *
그날 저녁.
최기석은 의진대 흉부외과 회식 자리에 참여했다.
그리운 얼굴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뜻깊은 자리였다.
치이이이익.
고기가 익고 술잔이 돌면서 이야기꽃이 활짝 피었다.
"그러고 보니까 윤 교수님만 안 보이는데요?"
"오늘 자리가 좀 불편하다가 안 왔어."
김태식의 대답에 최기석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회식 자리를 불편해하는 이유를 한 번에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어제 의진대를 방문해서 세이버 팀과 대화할 때도 윤지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 맞다! 김 선생님. 축하드려요."
"갑자기 왜?"
"윤 교수님하고 교제 시작하셨다면서요?"
"벌써 아네? 누구한테 들었어?"
김태식의 질문에 곁에 앉은 이영호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말해야 할걸 왜 네가 말하냐? 혼나 볼래?"
김태식이 장난스럽게 이영호의 옆구리를 쳤다.
"하여간 잘됐네요. 두 분 잘 어울려요. 앞으로도 잘 지내실 거고요."
"암. 그래야지. 내가 지혜 씨 행복하게 해 줄 테니까."
"사석에서도 교수님께 존댓말 쓰세요?"
"누나라고 말하는 건 아직 어색하더라고. 조만간 호칭 정리해야지."
김태식이 윤지혜와의 연애 과정을 한 보따리 풀었고, 최기석은 이를 잘 들어 주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회식한 지 한 시간이 지났다.
최기석은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장혁필의 자리로 향했다.
"이게 누구야? 메이죠의 영웅 최기석 아니야?"
"과장님이 그러지 마세요. 저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아요."
"괜찮아, 괜찮아. 죽기 전에 CPR 해 줄 테니까."
장혁필이 취기 오른 얼굴로 껄껄 웃었다.
"저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 봐도 될까요?"
"뭐든지."
"조지환 부병원장님의 수련 시절이 궁금합니다."
최기석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조지환 부병원장의 성향이 환자 중심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