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2)
'에이. 설마.'
최기석은 휘휘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조지환의 행동은 환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항상 본인의 승진과 명예만을 탐닉해 왔다.
과거 폐이식 환자를 내친 일은 물론이요, 치료하기 쉬운 환자만 골라서 수술하는 등 자승진만을 위하는 행보를 걷지 않았던가.
분명 주변에 다른 동료들이 있어서 성향을 잘못 읽었으리라.
순환기 내과 근처에 도착하자 낯익은 사람이 말을 걸었다.
의대 동기이자 순환기내과 레지던트인 김진이다.
"어라? 기석이 아니야?"
"오랜만이다."
"메이죠에 갔다고 들었는데. 여긴 웬일이냐?"
"휴가받았거든."
"메이죠는 의사한테 휴가도 주는구나. 나도 휴가받았으면 좋겠다."
김진이 부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짜식. 그럼 영어공부 열심히 해서 넘어오던가."
"……그렇게 말하니까 또 싫어지네. 그냥 한국에 있으련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설화는 뭐해?"
"휴게실에서 쉬고 있어. 방금 막 PCI(경피적 관상동맥 우회술) 끝냈거든."
"네가 보기에 설화 어때? 내과 생활 잘하는 것 같아?"
"뭐. 두말할 필요가 있나? 벌써 순환기내과 에이스인데? 김철우 교수님 제자인 데다가 웬만한 처치도 혼자서 다 해. 어제는 ICD(삽입형 제세동기)까지 이식하더라."
"진짜 에이스네."
최기석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한 줌의 불안이 있었다.
정설화가 내과 생활을 힘들게 하는데, 정작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응급실 내려가야 하는데. 나중에 술이라도 한잔 빨자."
"그래. 수고."
김진과 헤어진 후 정설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와. 대박! 내가 막 전화하려고 했는데.]
"역시 우린 통한다니까? 뭐 하고 있어?"
[휴게실에서 쉬는 중이야 PCI 했더니 너무 힘들어.]
정설화가 한숨 쉬며 말을 이었다.
[근데 우리 영상 통화하면 안 돼? 자기 얼굴 보고 싶어.]
"그게…… 영상통화는 조금 있다가 하자. 지금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좀 그래."
최기석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자신이 곁에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정설화, 그녀를 생각하니 아까부터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자기는 뭐 하고 있어?]
"방금 막 수술 끝내고 휴게실로 가는 중이야."
[어. 음…… 휘플 수술?]
[휘플 수술? 그거 진짜 어려운 수술 아니야? 신규 레지던트가 휘플 수술 보조도 들어가?]
"후후후. 나니까."
최기석의 너스레에 정설화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따라 더 보고 싶다. 흉부외과 심장 클리닉이 뜨면서 우리도 덩달아 바빠졌거든. 베드는 늘 차 있는 데다가 진상 환자도 많고.]
"……."
[이럴 때 자기가 있으면 좋을 텐데.]
정설화의 목소리에 피곤함이 묻어났다.
"나…… 나도 당장 의진대로 가고 싶다."
최기석은 감정을 추스르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간절히 바라면 혹시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까?"
[무슨 뜻?]
"차원의 문이 열리면서 내가 의진대로 이동한다든가 하는 거 말이야."
[상상만 해도 좋지만 그럴 리가 없잖아.]
"세상일은 모르는 거지. 나도 휴게실에 거의 다 왔다."
최기석은 순환기 내과 복도를 가로질러 정설화가 있는 휴게실 앞에 섰다.
벌컥!
힘차게 문을 열고 정설화를 응시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정설화의 표정이 가관이다.
두 눈이 당장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으며 입은 쩍 벌어졌다.
"기…… 기석아?"
"설화야.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최기석은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연기를 펼쳤다.
"이거 꿈 아니야? 어떻게 미국에서 한 번에 한국으로 넘어오지?"
"……."
"정말 하늘이 우리를 도와준 거 아니야?"
"아…… 몰라! 바보!"
"바보 아니거든요?
최기석은 정설화의 옆에 앉아 그녀의 볼을 쭉 잡아당겼다.
그러자 멍하게 있던 정설화가 난폭하게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크윽. 아프다. 못 본 사이에 손이 더 매워졌어."
"치. 맞을 짓을 하니까 그렇지."
정설화는 삐친 표정을 풀고 그의 팔을 꼭 품에 안았다.
처음 최기석이 휴게실로 들어왔을 때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조금 전까지 통화 중이었던, 당연히 미국에 있어야 하는 최기석이 의진대 휴게실로 왔기에.
차원의 문이라는 게 정말 존재하는 건가.
진지하게 그런 생각마저 했다.
그녀는 최기석이 웃으며 자신의 볼을 잡아당길 때야 눈치챘다.
그가 과거의 자신처럼 몰래 한국에 왔음을.
"수련하느라 바쁘지 않아? 어떻게 왔어?"
"예전에 하이어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 했지? 조기 진급해서 일주일짜리 휴가받았어."
최기석은 그동안의 일을 간략하게 요약했다.
"그랬구나. 하여간 너무 좋다."
정설화는 방긋 웃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넘치는 기쁨으로 이곳이 병원 휴게실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영상 통화할 때는 잘 몰랐는데. 머리 많이 길렀네."
"앞으로 계속 기르려고. 나 다 알아. 사실 네가 내 긴 머리 좋아하는 거."
"아닌데? 단발도 좋아하는데?"
"흥. 거짓말해도 소용없어. 표정에 다 드러났는데."
이윽고 두 사람은 서로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최소 나흘에 한 번씩 통화함에도 대화는 끊어질 줄 몰랐다.
"나 이번 주에 계속 당직이야. 대신 주말에 오프 붙여서 쓸 수 있는데. 주말에 데이트 어때? 기석이 너도 가족하고 시간도 보내야 할 거고."
"그래. 모레 보자. 그동안 여행코스 알아볼게."
최기석은 말을 마치고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게 뭐야?"
"선물."
최기석은 라빈의 친필 사인을 건넸다.
* * *
다음 날 아침.
최기석은 부모님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한 상 가득 펼쳐진 한식에 밥공기를 두 그릇이나 비웠다.
"저녁에 외식이라도 할까?"
"오늘은 힘들 것 같아요. 의진대 흉부외과 사람들하고 회식하기로 했거든요."
"그래? 그럼 내일은 괜찮지?"
"네. 좋아요."
어머니의 물음에 최기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미국 생활을 잘하고 있다니까 다행이다. 말도 잘 안 통하는 데다가 인종차별까지 받으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는데."
"그런 면도 없지는 않지만, 실력을 더 중요하게 여기더라고요. 제가 한국에 있었을 때부터 원래 솜씨가 좋았잖아요."
최기석은 일부러 허세를 부렸다.
걱정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서.
작전이 성공했는지 두 분 다 환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최기석이 아버지를 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보여?"
"걱정거리 있으면 식사를 잘 못하시잖아요."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야. 조만간 잘 해결될 거고."
아버지가 더 묻지 말라는 듯한 어투로 답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최기석이 화제를 돌렸다.
"준기는 일찍 나갔나요?"
"아마 한 달쯤 됐을 걸? 레스토랑에서 친해진 선배가 기술 가르쳐 준다고 해서 일찍 출근하고 있어."
"이러다 저보다 준기가 먼저 성공하겠는데요?"
"기석아. 형제끼리 그런 게 중요하니?"
"농담이에요. 농담. 열심히 일하는 게 보기 좋다는 뜻이에요."
어머니의 말에 최기석이 한마디 덧붙였다.
식사 후 아버지가 먼저 집을 나섰다.
"엄마. 아버지한테 무슨 일 있어요?"
"그게 말이야…… 얼마 전 아빠 회사에서 에크모를 새로 개발했거든."
"우와. 사업을 크게 벌이셨네요."
최기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에크모의 구매 가격은 대략 일억 원, 의료기기 중에서도 가격이 손에 꼽히는 수준이다.
"근데 납품 직전에 문제가 생겼나 봐. 오류가 생겨서 제대로 작동이 안 된데. 그래서 일주일 넘게 야근하고 골머리 썩는 중이란다."
"……."
"나서지 말고 그냥 알고만 있어. 네 아빠 성격 알지?"
아버지는 자신의 고민이나 힘든 점을 잘 털어놓지 않았다.
심지어 가족에게조차도.
고민을 털어놓는 것 자체가 상대에게 짐을 준다고 생각하는 스타일이다.
"네. 입 다물고 가만히 있을 게요."
"그래. 모처럼 집에 왔으니까 편하게 쉬고. 저녁 때 보자."
어머니가 떠나면서 집에는 최기석만 남았다.
터벅. 터벅.
원을 그리며 자신의 방을 크게 돌았다.
아버지 사업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 계속 신경 쓰였다.
문제는 그가 아버지를 도와드릴 만한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의사지 의공학자가 아니었기에.
"휴우……."
고머리를 쥐어뜯다가 책상 앞에 앉았다.
해답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잠시 쉬어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딸칵. 딸칵.
마우스를 클릭하며 정설화와 여행갈 장소를 물색했다.
다행히 마음에 드는 곳이 금방 나타났다.
예약을 끝낸 후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신경외과라……."
중얼거림이 방에 퍼졌다.
저번 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신경외과와는 도통 인연이 없었다.
한 번도 신경외과에서 수련한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경험이 없는 만큼 더 긴장할 필요가 있었다.
더군다나 신경외과에 있는 동기들은 최기석보다 6개월 먼저 수련하고 있지 않은가.
일을 제대로 못했다가는 비교당할 수밖에 없다.
조기진급자 실력이 이것밖에 안 되냐는 비아냥도 들을 수 있고 말이다.
"스크럽 들어가면 뇌도 보겠구나."
일반외과의 전쟁터가 소화기관, 흉부외과의 전쟁터가 심장과 폐라고 한다면 신경외과의 전쟁터는 머리와 뇌다.
물론 척추 진료를 보기는 하지만 정형외과와 일부 겹치는 부분이 있으니까 말이다.
신경외과 스크럽을 생각하니 벌써 가슴이 설렜다.
최기석은 자신이 천상 써전이라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트레이닝 룸에 입장했다.
한국에 왔더라도 최대 입장 횟수인 3회는 꼭 채울 생각이었다.
그래야 수술의 감을 잊지 않는다.
[트레이닝 룸에 입장하셨습니다(1/3). MIDCAB(최소침습 관상동맥 우회술)영상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스태프 난이도를 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휘이이이잉.
환한 빛이 쏟아지고 눈앞에 수술실이 펼쳐졌다.
최기석은 목을 뚜두둑 꺾고 콘솔 앞에 앉았다.
과거에는 MIDCAB도 트레이닝이 가능하구나 하고 신기해했다면, 지금은 MIDCAB을 정복하고자 하는 욕심이 더 컸다.
"지금부터 MIDCAB 수술을 시작한다."
최기석의 지시에 가상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은 절개창을 내고 투관침과 카메라 포트를 삽입했다.
그러자 콘솔에 달린 모니터에 흉강 내부의 모습이 고스란히 비쳤다.
'가자.'
핸들에 손을 얹고 집도에 들어갔다.
카메라 포트로 시야를 확보한다는 점.
자신의 손이 아닌 로봇을 사용한다는 점.
이 두 가지를 제외하면 CABG(관상동맥 우회술)과 MIDCAB의 차이는 없었다.
최기석은 자신감을 가지고, 내흉동맥을 박리해 나갔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손동작에 맞춰 기계음이 울리고 로봇팔이 움직였다.
그동안 꾸준히 연습한 덕분에 손놀림은 경쾌하면서도 정확했다.
'이 느낌이라면…… 할 수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확신이 강해졌다.
과거에는 자신이 로봇을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요즘은 자신이 직접 수술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였다.
최기석은 내흉동맥을 박리한 후 이를 대동맥에 연결했다. 그리고 다른 한쪽 끝을 협착이 생긴 관상동맥 하단부에 이어 주었다.
로봇이 문합하는 만큼 수술 중에 잔떨림은 없었다.
문합의 견고함 역시 손으로 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휴우…… 끝났다."
정상적인 혈류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트레이닝을 종료합니다. MIDCAB의 종합 랭크 C입니다.]
휘이이잉.
트레이닝이 끝나면서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더불어 쉴 틈 없이 터지는 알림.
[도전 임무, MIDCAB을 정복하라를 완수하셨습니다. 특별 보상으로 레벨업 스톤(펫 전용)을 제공합니다.
[로봇 공학 스킬이 한 단계 상승했습니다. 특수효과가 재생이 추가됩니다.]
[로봇공학 Lv.3]
- 로봇 수술을 할 경우 로봇을 다루는 능력과 로봇 처치 속도가 1.5배 상승합니다.
- 레벨이 증가할수록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 최대 레벨은 5단계입니다.
- 특수효과 재생: 수술 후 환자의 회복력이 2배 증가하며 감염 위험이 2배로 낮아집니다.
[MIDCAB 마스터리가 생성되었습니다. MIDCAB: 2/5]
최기석은 상태창을 확인하며 미소를 지었다.
"펫 전용 레벨업 스톤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