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높이 (5)
다음 날 오전.
최기석은 의국에서 모니터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미스터 최. 아까부터 뭘 그렇게 봐?"
"별거 아니야."
"에이. 별거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최기석의 모니터를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빈 윌리엄스 기사네."
"맞아. 조금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어서."
"그래? 난 전혀 모르겠던데? 지나가다 마주치면 웃으면서 인사도 해 주고, 다른 환자랑도 잘 지내고 있잖아?"
"그건 표면적인 거고. 속은 다를 수 있어."
최기석이 고개를 저었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살핀 결과 라빈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거기에 극심한 자살 충동까지 말이다.
항상 밝은 태도 때문에 누구도 그가 가진 마음의 병을 모를 뿐이었다.
'우선 가면을 벗겨야 해. 안 그러면 신경정신과에 협진을 요청해도 소용없어.'
최기석은 계속해서 라빈의 기사들을 살폈다.
그와 관련된 최근 기사는 대부분 좋지 않았다.
우선 두 번째 부인과의 이혼설이 있었고, 그 전에는 코카인과 알콜중독을 치료받은 일도 있었다.
딸칵. 딸칵.
몇 가지 기사를 확인하고 라빈의 병실을 찾았다.
더 이상 라빈을 내버려 둘 수 없다.
어릴 적 우상이 허무하게 세상 떠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또 무슨 일입니까?"
라빈이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중요한 할 말이 있습니다."
"난 없는데요?"
"그럼 듣기라도 하세요."
최기석은 폭군의 강림과 추궁 - 이의가 있어! 스킬을 동시에 사용했다. 달라진 분위기를 읽었는지 라빈이 침상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그를 응시했다.
"라빈 당신은 오래전부터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연기로 숨겨 왔죠. 내 말이 틀립니까?"
[또 그 헛소리입니까? 지겹군요. 지겨워. 대체 왜 나를 우울증 환자로 몰고 가는 겁니까?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나는 우울증을 앓아 본 적이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라빈의 말이 만화 속 대화창처럼 떠올랐다.
최기석은 대화창을 꼼꼼히 살피며 반격을 준비했다.
"잠깐만요!"
"뭡니까?"
"정말로 우울증을 앓아 본 적이 없습니까?"
[하…… 한 번도 없다고 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그건 보통 사람이 겪는 우울증일 뿐이에요. 병원에서 진료받을 정도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애초에 내가 우울증을 앓을 이유가 없잖아요.]
[추궁을 통해 새로운 문장이 추가되었습니다.]
최기석은 알림을 확인하고 다시 한 번 추궁에 나섰다.
"방금 라빈은 분명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울증을 앓을 이유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정말 우울증을 앓을 이유가 없었을까요?"
그의 지적에 라빈이 처음으로 동요한 기색을 비쳤다.
눈동자가 요동치고 다리가 떨렸다.
[우울증을 앓을 이유 따위는 없어요. 그러니까 괜히 나를 우울한 놈으로 만들지 말아요.]
"전 라빈이 우울증을 앓을 만한 일을 겪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매스컴에 부인과 이혼설이 났던데. 사실 아닙니까?"
최기석이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 냈다.
'젠장. 대체 왜!'
라빈은 절규하고 싶은 것은 간신히 참아 냈다.
무조건 아니라고 잡아떼면 되는데 대화를 하다 보면 이상하게 그의 화법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
거미줄에 꽁꽁 묶여 버린 것처럼.
[아내와 사이가 안 좋은 건 사실입니다. 이혼을 생각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아내와 사이 나쁜 사람들이 다 우울증을 앓는 건 아닙니다. 닥터 최는 지금 제 감정을 과장하고 있어요.]
"라빈의 말이 맞습니다. 이혼 준비 중이라고 꼭 우울증을 앓는 건 아닙니다."
[이제 좀 말이 통하는군요. 닥터 최, 알겠습니까?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꼴이지만 난 우울증 따위는 앓고 있지 않아요. 그럴 이유도 거의 없고요.]
[추궁을 통해 새로운 문장이 추가되었습니다.]
다시 울리는 알림.
최기석은 대화창을 분석을 끝내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라빈이 우울증을 겪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를."
[좋아요! 잘난 의사 양반 어디 한 번 맞춰 봐요. 내가 왜 우울증을 겪고 있는지. 증거가 있다면 순순히 인정해 드리리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날 우울증 환자 취급한 대가는 크니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라빈의 성난 얼굴.
최기석은 추궁의 승패가 지금 이 순간에 달려 있음을 직감했다.
[라빈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결정적인 이유를 제시하세요. 실패할 경우 평판이 줄어들고 하이어 시스템 취소 등의 불이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꿀꺽.
최기석은 마른침을 삼키고 라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한 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환자복을 힘차게 걷어 올렸다.
실수도 없고 오판도 없다.
자신의 선택을 100퍼센트 믿고 있었기에.
[지금 뭐하는 겁니까?]
"증거를 보여드리는 겁니다."
[지금 날 가지고 장난치는 겁니까? 대체 증거가 어디 있죠?]
"여기를 보세요."
최기석은 검지로 팔뚝에 있는 작은 주사 자국을 가리켰다.
띠링!
[라빈의 우울증을 앓고 있는 증거로 주사 자국을 제시하였습니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겁니까? 이딴 주사 자국이 대체 왜 내가 우울증을 앓는다는 증거가 되죠?]
"라빈은 과거 코카인 중독이었죠? 이후 코카인을 끊고, 코카인 중독을 예방하는 홍보대사로 활동했고요."
[…….]
"솔직히 말해 주세요. 코카인 다시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아내와 사이가 벌어진 것도 그것 때문일 겁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입원날짜를 어기고 뒤늦게 입원한 것도 코카인 때문이고요."
최기석의 추궁에 라빈이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증거를 내놓으라며 노기를 뿜어냈던 때와는 정반대의 태도다.
그는 마치 세상을 다 잃은 사람처럼 기운이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라빈이 고개를 척 들고 최기석을 노려보았다.
노기가 아닌 광기가 눈에 서려 있었다.
[닥터 최, 날 우울증 환자로 몰려고 작정을 했나 본데 틀렸어. 이 주사 자국은 얼마 전 다른 병원에서 생긴 거라고. 코카인 주사를 맞은 자국 따위는 아니란 말이지.]
대화창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랬다.
추궁 최후의 순간이 찾아왔다.
"그럼 그 병원이 어디 있는지 말해 주시죠. 내가 찾아가서 라빈의 진료기록을 살필 테니까."
[…….]
"이 주사 부위는 팔 근육입니다. 채혈할 수도 없거니와 이 부위에는 근육 주사를 잘 놓지도 않아요. 라빈. 더 이상 변명해도 소용없습니다."
[크하하하하하.]
최기석의 말에 라빈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히스테릭하게 웃었다. 악마가 지상에 내려와서 웃는 듯한, 등줄기에 소름 돋는 웃음이다.
띠링!
[추궁을 통하여 마음의 자물쇠를 해체하였습니다. 환자에게서 필요한 정보를 모두 획득할 수 있습니다.]
'휴우…… 진짜 끝났구나.'
최기석은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냈다.
혹시 대화가 엇나가고 모드가 중단될까 봐 걱정이 많았다.
"라빈. 저는 당신의 주치의입니다. 제게만은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좋습니다. 닥터 최가 어떻게 날 꿰뚫어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 입으로 이야기를 해보겠어요."
라빈이 찬찬히 말을 이었다.
그의 지적대로 라빈은 삼 개월 전부터 다시 코카인에 손을 댔다. 처음에는 재미 삼아 피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숫자가 늘어났다.
연기력은 점점 떨어지고, 코카인을 발견한 아내와의 다툼이 시작됐다.
더불어 주변에서 크고 작은 문제들이 생겨났다.
그럴수록 라빈의 자괴감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치료가 끝난 후 집에 돌아가서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코카인에 휘둘리는 것도 싫고, 아내하고 다툰 것도 싫고, 연기력이 망가지는 것도 보기 싫었어요. 그래서 모든 걸 한 번에 끝내고 싶었어요."
최기석은 말없이 그의 옆에 앉아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영혼 없는 뻔한 위로는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라빈이 자신을 지탱할 수 있을 때까지 지켜봐 주는 것뿐이다.
"닥터 최.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죠?"
"지금 당장 답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수술 끝날 때까지 마음 편하게 먹으세요."
최기석은 라빈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고마워요. 캡틴. 전부 솔직하게 털어놓아 줘서."
"……고마운 건 저예요. 닥터 최. 정말 고마워요."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
띠링!
[라빈과 라포를 형성하였습니다. 자살 충동이 일시적으로 소멸하였습니다.]
NEW 라포 4단계 - 신뢰
"오늘은 이만 푹 쉬세요. 내일 또 찾아오겠습니다. 그럼 이만."
최기석은 담담하게 병실을 떠났다.
* * *
나흘 뒤.
최기석은 의국에서 환자 오더를 입력하고 있었다.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문득 상태창을 확인하는데 아이템창에 암흑 인장이 생겼다.
디버프 보이지 않는 손의 지속시간이 끝난 것이다.
더불어 중요 임무인 스미스의 인정을 받아라는 완료 상태가 되었다.
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얼마나 땀을 흘렸던가.
반짝거리는 완료창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뿌듯했다.
드르르륵.
의국을 나와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때마침 데이비드가 다른 간호사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랬다.
오늘은 그가 해고당하는 날이다.
"닥터 최도 그동안 저 때문에 고생 많았습니다."
데이비드가 최기석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고 최기석은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럼 다들 수고하세요."
데이비드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고 스테이션을 벗어났다.
그런데 바로 그때다.
타다다닥.
최기석이 갑자기 그의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데이비드. 나한테 할 말 없어요?"
"글쎄요. 딱히 없는데……."
데이비드는 최기석의 얼굴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를 보고 있으면 당장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매독에 감염된 것도 모르는 불쌍한 옐로우 멍키.
"아. 생각해 보니까 딱 한 가지 있어요."
"뭐죠?"
"건강에 주의하라고요. 닥터 최는 오프 때도 쉬지 않고 일하니까."
"거짓말 마. 더러운 자식아."
최기석은 폭군의 강림을 사용하고 데이비드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데이비드가 겁먹은 얼굴로 몸을 움찔거렸다.
"갑자기 왜 이래요?"
"그걸 몰라서 물어?"
최기석은 가운 주머니에서 주사기를 꺼냈다.
"이 주사기에 장난쳤지? 그래서 내가 뚜껑 열 때 밀어서 찔리게 만들었잖아."
"……."
"근데 말이야. 내가 찔린 건 이 주사기가 아니야. 주사 직전에 네 시선을 돌리고 주사기를 바꿔치기했거든."
"아……."
데이비드는 당시를 떠올리며 입을 쩍 벌렸다.
["잠깐. 데이비드. 저 환자 누구죠?"
최기석이 환자와 재사용 주사기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누구 말이죠?"
데이비드도 최기석과 같이 병동 복도를 응시했다. 하지만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금 목발 짚고 지나간 환자 있었는데."
"병동에 목발 쓰는 환자는 없습니다."
"착각인가?"
]
맞다.
주사를 놓기 전 잠시 넋 놓고 있었던 때가 있었다.
"네가 처음 건넨 주사기를 봤는데, 바늘침 부분에 핏방울이 맺혔더군. 그래서 또 수작 부린다는 걸 알아차렸지."
"그럼 대체 왜……."
"알면서도 왜 주삿바늘에 찔렸냐고?"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지. 그동안 날 감염시켰다고 생각하면서 낄낄거렸겠지만 난 멀쩡해. 결국, 당한 건 또 너라고. 불쌍한 데이비드."
"……."
"잘 가. 멍청아(Good bye, nerd)."
최기석은 데이비드에게 귓속말하고 유유히 병동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