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207화 (206/407)

더 높이 (3)

트레이닝 룸.

최기석은 루와이 수술을 집도하느라 바빴다.

위 절제는 이미 끝났으며, 잘린 부위를 봉합하는 중이다.

'확실히…….'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보이지 않는 손의 디버프 영향이 트레이닝 중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래서 진짜 실전 같은 연습이 가능한 것이지만.

디버프로 손이 둔해진 느낌이다.

마치 손목에 모래주머니를 찬 것 같았다.

평소보다 봉합 속도가 느렸고,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정확도도 예전만 못했다.

최기석은 집중력을 유지하며 디버프가 발목 잡는 것을 막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잘라 낸 위의 봉합이 끝났다.

지금부터는 위와 공장을 문합해야 한다.

문득 벽시계를 응시하니 수술한 지 두 시간이 지났다. 예상했던 것보다 삼십 분이 더 지났다.

수술을 서두르는 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수술이 빨리 끝날수록 환자의 회복도 빨라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4-0 Prolene."

끼기기기긱.

니들홀더로 봉합침을 조이고, 위공장 문합에 나섰다.

예상치 못한 출혈을 비롯해 돌발 상황이 몇 번 벌어졌지만, 가상 스태프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넘겼다.

찰칵!

경쾌한 가위 소리와 함께 종료된 수술.

최기석은 수술시간과 종합랭크를 확인하고 트레이닝을 끝냈다.

"으라차차!"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내일 있을 집도 준비는 이걸로 마무리다. 남은 것은 오로지 실전뿐이다.

드르르르륵.

E.

M.

R(전자의무기록)을 살피는데 라훌과 제니퍼가 당직실로 들어왔다.

"미스터 최, 좋은 아침."

"반가워."

두 사람과 인사를 주고받은 후 인수인계에 나섰다.

어제 그가 진료한 환자의 수는 총 열 명이고, 입원한자는 세 명이었다.

"역시 미스터 최는 무시무시해."

"무슨 의미?"

"환자를 엄청나게 받았다고. 어제 마이크는 딱 세 명밖에 진료 안 했잖아. 입원환자는 아예 없었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환자한테 사랑받을 수 있어?"

제니퍼의 농담에 최기석이 피식 웃었다.

"미안하지만 이건 타고난 재능이야. 아무도 못 따라와."

"그래? 이상하게 별로 탐나진 않는데?"

"동감."

가만히 있던 라훌이 대화에 껴들었다.

"근데 오늘 오전 근무, 모건 아니었나?"

"모건이 아프다고 해서 대타로 왔지. 미스터 최는 내가 싫은 눈치인데?"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싫어하는 동기는 아무도 없어. 적어도 아직까지는."

최기석이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오다가 스테이션에서 들었는데 라빈 윌리엄스가 입원했다면서?"

라훌이 화제를 돌렸다.

"맞아. 그저께부터 속 썩이다가 입원했지."

"네가 보기엔 어떤 사람인 것 같아?"

"차분하고, 따뜻하고, 적당한 위트가 있는 사람이야.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데……."

"마음에 걸리는 거?"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아직 알아볼 게 많아서."

최기석은 어제 상태창에 떠오른 라빈의 진단명과 상태를 떠올리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크론병보다 더 지독한 질병.

그것을 치료하지 않으면 라빈에게 미래는 없다.

최기석은 두 사람과 잡담을 나누다가 당직실을 나왔다.

야간 근무와 인수인계가 끝났으니 오늘은 온종일 자유의 몸이다.

하지만 신경 써야 할 일들이 아직 많이 남았다.

타다다다닥.

등 뒤에서 거친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조세가 복도를 질주하고 있었다.

"조세, 바빠요?"

"아, 네. 어제 심전도 abnormal(비정상) 판정 난 게 있는데, 깜빡하고 판독을 안 받아서. 하아악…… 하아악."

조세가 뜀박질을 멈추고, 그의 앞에 섰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알림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띠링!

[돌발 임무, 내겐 너무 두려운 심전도를 획득하셨습니다. 조세의 심전도를 판독할 경우 500 P.

P를 제공하고 체력 두 단계를 회복합니다.]

"줘 봐요. 내가 판독해 줄게요."

"네? 미스터 최가요?"

조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반외과 레지던트가 순환기내과 일을 하겠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말 안 했었나요? 난 한국에 있을 때 흉부외과 전공했어요. 웬만한 심전도는 다 볼 수 있는데."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최기석은 조세가 내민 심전도 기록지를 훑었다.

"이건 동성빈맥이에요. 심박동이 170회 정도로 높은 데다가 여기 있는 P파가 먼저 측정됐던 T파에 합쳐졌거든요."

"동성빈맥이 뭐죠?"

"심박수가 매분 100 이상인 상태를 말해요. 혹시 이 환자 진단명 알아요?"

"위암 수술로 입원했는데, 검사 도중에 갑상성 기능 항진증이 발견됐습니다."

"그럼 딱 들어맞네. 갑상성 기능 항진증이 동성빈맥의 원인 중 하나거든요."

"아…… 그렇구나. 고마워요, 미스터 최. 오전 회의 전까지 판독 못 받으면 큰일 날 뻔했는데."

"앞으로 심전도 판독은 나한테 맡겨요."

"고맙습니다."

조세가 재차 감사 인사를 하고 의국으로 돌아갔다.

'슬슬 내 일을 해야겠다.'

보상을 확인한 최기석이 걷기 시작했다.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기숙사에서 이영호의 봉합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

한 달 만에 보내준 영상, 그 속의 이영호는 이전보다 한층 성장한 실력을 뽐냈다.

일취월장이라는 말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비록 거리는 멀리 떨어졌지만, 그가 얼마나 진심으로, 또 열심히 노력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딸칵.

동영상을 확인한 후 이영호가 보낸 논문을 훑었다.

논문 감상평 또한 요즘 들어 부쩍 날카로웠다.

"좋네, 좋아."

최기석은 이영호의 성취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지켜봐 주는 송명진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지이이잉.

이영호에게 전화를 연결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메일을 남기고, 일반외과 병동으로 향했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환자를 살피는 도중 휴게실에 있는 라빈 윌리엄스를 발견했다.

라빈은 다른 환자와 마주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으며, 중간중간 보여 주는 리액션은 시원시원했다.

누가 봐도 상대와의 이야기를 즐기는 모습이지만, 그의 마음은 손톱만큼도 편하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최기석은 휴게실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라빈. 잠깐 시간 좀 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우리 이야기는 잠시 후에 마무리 짓죠."

이윽고 두 사람은 라빈의 병실에 자리 잡았다.

"혹시 사인이 더 필요합니까?"

라빈이 농담으로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아니요. 사인은 충분히 받았습니다. 제가 진짜로 알고 싶고 필요한 건 따로 있죠."

"편히 말해 보세요."

"이거 하나만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최기석이 종이뭉치를 내밀었다.

바로 자살 충동에 관한 심리를 분석하는 설문지다.

"설마 내가 자살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예방 차원에서 하는 일입니다. 제 환자에게는 전부 돌리고 있어요."

"아이러니한 일이군요. 나처럼 유쾌한 사람에게 이런 설문지를 부탁하다니…… 뭐. 닥터 최가 원한다면 해야겠지만. 당장 할 필요는 없는 거죠?"

"네. 오늘 저녁까지만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최기석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라빈. 당신은 뛰어난 배우예요. 맞습니까?"

"허. 갑자기 왜 뚱딴지같은 소리를 합니까?"

"본인이 본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자기 인식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뛰어난 배우라…… 부족한 건 많지만, 늘 최선을 다해서 연기했다는 것만큼은 자부할 수 있습니다."

"라빈의 연기솜씨라면 설령 불행하더라도 행복한 척 연기하는 게 가능하죠?"

최기석의 질문에 라빈이 돌처럼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라빈의 눈동자에 뜨거운 불길이 일어났다.

"닥터 최. 당신은 경찰이 아니라 의사입니다. 유도 질문 따위 하지 마세요."

"……."

"그리고 그 질문의 뜻은 지금 내가 불행한데, 행복한 척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까?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요.

라빈이 두 주먹을 쥔 채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가 분노를 쏟아 내고 있음에도, 최기석은 평온한 태도를 유지했다.

"보기 싫으니까 썩 꺼져요!"

"제 말이 언짢았다면 사과드립니다. 사실은 현실에서도 연기가 가능한지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최기석은 다시 사과하고 병실을 나왔다.

라빈의 분노를 샀지만, 그것은 오히려 성과였다.

대화 중 과거에 얻은 마음의 눈을 사용했는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불같이 화를 내는 라빈의 마음이 보랏빛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역시…….'

스테이션을 스치는 찰나 누군가가 최기석을 불렀다.

뜻밖에 그 주인공은 데이비드다.

"닥터 최.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나요?"

"지금 바쁜데……."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부탁 좀 드릴게요."

데이비드가 통 사정하는 바람에 스테이션과 조금 떨어진 창가에서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무슨 일이죠?"

"저기…… 지금 와서 이런 이야기하는 게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그의 뜬금없는 사과에 최기석은 놀란 토끼 눈을 떴다.

천하의 개 쌍x인 데이비드가 먼저 잘못을 시인하다니…….

"제가 저번에 카렌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우려던 일로 퇴사하게 된 거 아시죠?"

"네. 알아요."

"메이죠를 떠날 날이 오니 병원 생활을 어떻게 해 왔나 반성하게 되더군요. 그동안 저는 너무 이기적이었습니다. 백인이 아닌 스태프들에게는 차갑게 굴었고요. 요즘은 생각하면 할수록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데이비드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못되게 굴었던 분께 사과드리는 중이에요."

"그래요? 잘못은 뉘우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은데."

"그 점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메이죠에서 다시 일하고 싶어서 용서해 달라는 게 아니고, 그저 잘못을 깨달아 사과하는 것뿐이에요."

"으음……."

최기석은 별다른 대답 없이 턱만 쓸어내렸다.

"그간 쌓인 일이 사과 한 번으로 풀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여간 제가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그럼 이만."

데이비드가 할 말을 마친 후 스테이션으로 돌아갔고, 최기석은 그의 뒷모습을 한참 지켜봤다.

잘못을 뉘우친 데이비드라…….

뜨거운 아이스크림처럼 어색한 조합이다.

최기석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제 갈 길을 갔다.

* * *

다음 날 오전.

최기석은 의국에서 환자 처방을 입력하고 있었다.

선천성 거대결장으로 입원했던 소아 환자와 변호사 가일이 퇴원하면, 남은 담당 환자가 세 명으로 줄었다.

바로 라빈과 윌리엄, 제이스가 그 주인공이다.

윌리엄과 제이스가 조만간 소화기내과로 전과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환자는 라빈뿐인 셈.

CAP(의사 일인당 맡는 환자의 수)이 이처럼 줄었던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뚜두두둑.

최기석은 가볍게 목을 꺾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스터 최. 마침 있었네."

에단이 미소를 지으며 당직실로 들어왔다.

"게시판에 레지던트 포인트 붙은 거 확인했어?"

"네. 아까 확인했습니다."

오전 회진이 끝난 후 일반외과 신규 레지던트들의 상점과 별점을 기록한 문서가 게시되었다.

최기석은 상점 10점에 벌점 0으로 신규 레지던트 수석을 차지했다. 상점 4점인 모건과 상점 3점인 라훌이 그 뒤를 이었고 말이다.

"우리 과에서 상점 10점을 받은 건 미스터 최가 처음이야. 이러다가 정말 하이어 시스템까지 이용하겠는데."

"꼭 그래야죠. 전 하루라도 빨리 흉부외과에 가고 싶거든요."

"섭섭한 소리 하네."

에단이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슬슬 루와이 수술하러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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