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높이 (2)
최기석은 네 사람의 스탯창을 확인하고 턱을 쓸어내렸다.
모건과 제니퍼와 에단은 중립이고, 라훌은 성공 중심이다.
자신이 환자 중심이니 스미스가 분류한 세 부류의 의사가 한자리에 모인 셈이다.
스미스에 따른 의사의 삼단분류.
이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성향은 중립이다.
중립이란 말 그대로 환자 중심과 성공 중심 사이에 있는 의사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특성상 무난하게 병원 생활을 한다.
다만 주변의 영향에 따라 성향이 바뀔 가능성이 컸다.
그에 비해 환자 중심과 성공 중심의 의사들은 그 수가 적으며, 성향이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 두 성향에는 명확한 경계선이 있다.
환자 중심 의사들은 치료와 환자와의 공감에 최우선시한다.
반면 성공 중심 의사들은 돈과 명예 획득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과거 의진대 시절을 예로 들면 환자 중심이 송명진, 성공 중심이 조지환인 셈이다.
'뒤통수 맞을 일은 없겠어.'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이용하면, 의사들의 성향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설령 성공 중심 의사가 환자 중심 의사인 척을 한다고 해도 미리 알아차릴 수 있으니 말이다.
"미스터 최. 모레 집도 있는 거 알지?"
"아…… 루와이 수술 말씀하시는 거죠?"
"맞아. 있다가 시간 여유 있을 때 전화해. 수술 방법도 설명해 주고, 모형으로 미리 연습도 시켜 줄 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간식 시간이 끝난 후 곧바로 수술실을 찾았다.
오늘은 당직이 있는 날, 근무 전까지 필요한 동영상을 촬영할 예정이다.
최기석은 참관용 수술실 좌석에 앉아 모니터를 응시했다.
때마침 한 건의 루와이 수술이 예정되어 있었다.
집도를 기다리던 중 상태창을 띄워서 임무를 살폈다.
현재 진행 중인 임무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하이어 시스템을 얻기 위한 재료 아이템 임무, 두 번째는 트레이닝 룸에 200번 입장하는 임무. 세 번째는 내일 있을 루와이 수술을 무사히 끝내는 임무다.
'내일만 넘기면…….'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손 디버프가 걸려 있다.
다만 내일 집도를 성공적으로 끝내면, 디버프가 그를 위협할 일은 많지 않았다.
즉 이번 주가 핵심 임무들을 완수할 고비다.
지이이잉.
문이 열리고 스태프들이 로젯으로 들어왔다.
[용의 눈을 사용합니다. 동영상 모드를 통해 수술 모습을 저장합니다.]
'시작해 볼까?'
그의 시선이 모니터를 향했다.
* * *
그날 저녁.
최기석은 두 눈을 감은 채 당직실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다.
낮에 촬영한 루와이 수술 동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는 중이다.
처음으로 난이도 있는 수술을 집도하게 되었다.
그것도 동기들 중에서 가장 먼저.
완벽하게 집도하고 싶은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수술을 복기하다가 당직실을 벗어나 외과 중환자실로 향했다.
윌리엄이 자고 있었기에 에어 샤워를 하고, 제이스의 격리 병실로 들어갔다.
"제이스. 몸은 좀 어때요?"
"아. 닥터 최. 왔습니까?"
제이스가 최기석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무리하지 말고 누워 있어요. 벌써부터 건강한 척할 필요 없으니까."
최기석의 농담에 제이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몸은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아요. 그…… 뭐야…… 복강경 수술을 해서 그런 건가요?"
"맞습니다. 보통 간이식 수술을 하면 한 달가량의 회복 기간이 필요한데, 제이스는 2주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제이스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흠흠…… 솔직히 처음에는 닥터 최가 미덥지 않았어요. 외국에서 온 것 때문에 얕잡아 봤던 것도 있고, 설령 치료를 잘한다고 해도 제까짓 것이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
"하지만 오랫동안 입원하면서 생각이 180도 바뀌었어요. 닥터 최는 제 마음의 병까지 고쳐 주었죠."
제이스는 조심스럽게 최기석의 손을 붙잡았다.
그동안 그가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진심으로 느꼈다.
더군다나 그가 신경정신과에 협진 요청을 한 덕분에 딸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고 말이다.
"내가 살아있는 한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을 겁니다. 정말 고마워요."
"제이스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닙니다. 그저 제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죠. 만약 그래도 빚진 기분이 든다면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세요."
"좋습니다. 무엇이든지."
"퇴원 후에……."
최기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건강을 잘 지키세요. 절대로 병원 신세 질 만큼 아프면 안 됩니다."
"……겨우 그겁니까?"
"이게 얼마나 지키기 힘든지 모르는군요. 제 부탁은 말씀드렸으니 장담한 것처럼 꼭 지켜 주세요."
"알았습니다."
두 사람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최기석은 제이스와 대화를 나누다가 중환자실을 나왔다.
지이이잉.
때마침 울리는 콜폰, 번호를 확인하니 내과다.
"일반외과 당직의 기석 최입니다."
[메리에요. 응급실에 탈장 환자가 있는데, 좀 봐주세요.]
"수술이 필요해요?"
[그런 건 아닌데…… 일단 내려와요. 직접 와서 보는 게 더 빠를 테니까.]
"알았어요."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응급실로 향했다.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아닌데 외과의 도움은 필요하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호출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응급실에 도착하자 메리가 한 침상 앞에 서 있었다. 그 앞에는 백인 남성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이 환자예요?"
"네. 증상만 들어서는 서혜부 탈장인 것 같은데, 환자가 손을 못 대게 해서."
메리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럼 올라가요. 이 환자는 내가 처치해서 보낼 테니까."
"……워요."
"뭐라고요?"
"고맙다고요!"
메리가 두 뺨을 붉히며 자리를 벗어났다.
설마 그녀의 입에서 먼저 고맙다는 말이 나올 줄이야.
최기석은 해가 서쪽에서 뜬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환자분. 어디가 제일 불편하시죠?"
"사타구니가 부풀어 오른 것 같아요. 거북하기도 하고요."
"우선 침상에서 일어나 똑바로 서세요. 제가 직접 검사할 거니까 놀라지 마시고요."
촤르르륵.
주변에 커튼을 친 후 환자가 기침하도록 유도했다.
그 상태에서 환자의 아랫배와 넓적다리를 만져 보았다. 서혜부에 둥근 표면을 가진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번에는 침상에 걸터앉아서 배에 힘줘 보세요."
"네."
자세를 바꿔서 촉진해도 덩어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메리가 예상한 대로 환자는 서혜부 탈장이 맞았다.
서혜부 탈장이란 복벽의 약한 부분을 통해 장기가 사타구니로 빠져나오는 현상이다.
"아. 씨……."
환자의 얼굴이 갑자기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최기석의 손이 사타구니에 닿은 후 엄한 물건이 불룩하게 솟아올랐다.
환자가 서둘러 몸을 돌렸지만, 최기석은 보고야 말았다.
상상하지 못한 크기의 물건을…….
외국 남자들은 바지를 맞출 때, 물건을 넣을 공간까지 따로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조금 전 본 것을 생각하면 반드시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습니다.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흠흠…… 치료는 잠잠해진 다음에 해도 괜찮죠?"
"그쪽이 편하면 그렇게 하세요."
이윽고 최기석이 본격적인 정복술에 나섰다.
그는 환자를 침대에 눕힌 후 탈장이 된 서혜부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장기를 밀어 올렸다.
'피곤하네.'
장기는 약 올리듯 들썩거릴 뿐 좀처럼 원위치로 돌아가지 않았다.
몇 번의 씨름 끝에 간신히 장기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다시 한 번 서혜부에 손을 얹었지만 만져지는 것은 없었다.
"이제 끝난 건가요?"
"네. 집으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만, 조만간 외래진료를 받아야 합니다."
"치료는 끝났다면서요."
"도수 정복술은 일시적인 처치입니다. 완전히 교정하려면, 수술로 탈장된 부위를 막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지금 같은 상황이 계속 벌어집니다."
"……네."
환자가 힘없이 대답했다.
처치를 끝낸 최기석은 홀가분하게 병동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스테이션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영화와 TV에서만 보던 라빈 윌리엄스가 병동을 찾은 것이다. 그를 보기 위해서 꽤 많은 환자들이 주변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마침 오셨네요. 이분이 라빈의 주치의인 기석 최입니다."
라빈과 대화 중인 카렌이 최기석을 발견했다.
"기석 최? 반갑습니다. 라빈이에요."
"기석 최입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최기석은 라빈과 악수를 했다.
그가 기억하고 있던 것과 달리 라빈은 많이 늙었다.
머리는 희끗희끗했으며,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패었다.
그런데도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그윽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원래는 어제 입원하는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미안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겨 버렸거든요. 그래서 전화도 제대로 못 받았습니다."
"사정이 있었다면 어쩔 수 없죠. 그럼 병실로 들어가실까요?"
최기석은 라빈 윌리엄스 그리고 동행한 부인 켈리와 1인실로 향했다.
병실에서 대화가 이어졌다.
라빈 윌리엄스가 앓고 있는 크론병에 대한 설명, 수술 날짜와 방법에 대한 것이 주된 화제였다.
"피곤할 텐데 그만 가 봐요."
"알았어요. 라빈. 내일 다시 올 테니까 푹 쉬어요."
켈리가 떠나면서 최기석과 라빈만 병실에 남았다.
"조금 의외였습니다."
"무슨 뜻이죠?"
최기석의 질문에 라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빈이 1인실을 택했으니까요. 당연히 VIP실에 입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VIP라니요. 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라빈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일반 병실에 입원해서 평범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그랬군요. 라빈. 미안하지만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에요."
"펜하고 종이를 가져올 테니 사인을 부탁드립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라빈의 팬이라서요."
"내가 출연한 영화 중에 기억나는 게 있나요?"
"물론이죠."
최기석이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죽은 사람의 사회, 유만지, 굿월헌팅, 미스터 다웃파이어, 최근작으로는 미술관이 살아 있다가 있죠."
"……."
"거기다 고전 애니메이션 알라진에서 램프의 요정 더빙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하하. 정말 내 팬이 맞군요."
라빈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병원에서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펜하고 종이 가져오세요. 사인은 몇 장이라도 해 주겠어요."
최기석은 당직실에서 필요한 도구를 챙겨, 라빈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라빈이 넉넉하게 열 장의 싸인을 해 주었다.
함께 사진을 찍는 것은 덤이었고 말이다.
최기석은 오랜만에 자신이 의사라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 버렸다.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을 절대로 잊지 못할 거예요."
"나야말로 고마워요. 닥터 최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어요."
라빈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럼 편히 쉬세요.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시고요."
최기석은 병실을 나와 당직실로 돌아왔다.
긴 당직 시간 동안 루와이 수술을 돌려보고, 트레이닝 룸에서 실습도 할 예정이다.
'바보같이.'
동영상을 보기 전 라빈의 병실에 휴대폰을 두고 온 것이 떠올랐다.
다시 라빈의 병실 앞에 선 최기석.
그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더 없이 유쾌해 보이던 라빈이 침상에 걸터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마치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크론병이 문제가 아니었군.'
그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