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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205화 (204/407)

더 높이 (1)

그날 저녁.

최기석은 기숙사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열 시간에 이르는 긴 수술을 끝냈지만 피곤함은 없었다.

환자 바라기의 체력회복 효과 덕택이다.

"후우……."

입술 사이로 한숨이 흘렀다.

문득 제이스에게 CPR 하던 때가 떠올랐다.

환자를 포기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각성 CPR 버프를 받고서 삼십 분가량 처치하면, 보통 의식을 차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제이스는 그렇지 않았다.

바이탈은 돌아올 줄 몰랐고 심전도는 계속 위태로운 곡선을 그렸다.

그렇게 제이스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결국 얼어붙은 심장의 패시브마저 효과를 잃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직 갈 길이 멀어."

최기석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이스를 살린 것은 스미스였다.

환자를 포기하지 않는 그의 집념이었다.

자신을 비롯한 모든 스태프가 희망의 끈을 놓았음에도, 스미스만큼은 간절히 제이스의 회복을 염원했다.

만약 그 자리에 스미스가 없었다면?

제이스가 수술 중 사망했다면?

제이스를 죽인 것은 병일까 아니면 의사의 모자람일까.

최기석은 후자라고 생각했다.

지이이잉.

떨리는 휴대폰을 확인하자 스미스가 전화를 걸었다.

"네. 헤드 치프."

[자고 있나?]

"아닙니다. 오늘 수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집무실로 와."

스미스는 자기 할 말만 하고 통화를 끊었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 스미스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호출하는 걸까.

최기석은 호기심을 안고 집무실을 찾았다.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었다.

스미스는 집무실 소파에 앉았으며, 그의 맞은편에는 토드가 있었다.

최기석은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토드의 옆에 앉았다.

"둘 다 잠을 안 자고 있었군. 커피라도 한잔하지."

스미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석 잔의 커피를 만들었다.

컵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볶은 커피의 향긋한 냄새가 집무실에 퍼졌다.

"힘든 수술을 끝냈는데 그냥 지나가면 섭섭하잖아? 조금 늦었지만, 우리끼리 회포를 풀어 보자고."

"네."

"알겠습니다."

최기석과 토드가 동시에 대답했다.

"교수님은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지. 수술 끝난 직후는 괜찮았는데, 집무실로 돌아오니 팔다리가 후들거리더군. 나도 이제 늙었나 봐."

최기석의 질문에 스미스가 농담을 섞어 말했다.

"수술 후 몇 분들과 대화를 나눈 거로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토드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질문했다.

"뻔한 이야기야. 한국에서 복강경 수술을 어떻게 배워왔냐, 우리도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 역시 스미스는 대단하다. 수술이 성공했으니 칭찬 일색이었지."

"저도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뭐지?"

"이번 수술에 참관을 허용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질문하는 최기석의 눈이 반짝거렸다.

스미스의 참관 허용은 상식 밖의 결정이다.

본래 써전이란 숙달된 수술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 앞에 보이기 불편한 법이다.

행여나 흠을 잡히고 실수가 나올 수 있기에.

그런데 스미스는 연습조차 하지 않은 수술, 그것도 초고난도의 수술의 참관을 허락했다.

"그건 말하기 곤란하군. 위쪽의 사정이 있으니까."

"……."

"허세를 부리거나 잘난 체하려고 수술을 결정한 게 아니라는 정도만 알아 둬."

"알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스미스가 자세를 고쳤다.

한쪽 다리를 꼬고 턱에 손을 괴었다. 더불어 최기석과 토드를 향해 몸을 잔뜩 앞으로 내밀었다.

자세를 바꾼 것만으로 집무실의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미스터 최, 오늘 수술 어땠지?"

"부족함을 많이 느꼈습니다. 특히 CPR 포기했을 당시를 떠올리면, 아직도 얼굴이 달아오릅니다."

"또 다른 건?"

최기석이 느낀 바를 몇 가지 덧붙이자 스미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자세야. 오늘 경험이 약이 되겠군. 토드?"

"저는…… 저도 미스터 최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멋대로 환자가 죽었다고 판단하고 CPR을 멈췄고…… 수술 중에 몇 번의 미스도……."

토드가 변명을 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됐어, 됐어. 그만!"

"죄송합니다."

"토드. 내가 정말 듣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야."

스미스의 눈이 독수리처럼 날카로워졌다.

"폴이 시켰나?"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묻지. 폴이 시켰냐고."

꿀꺽.

토드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숨 막힐 듯한 침묵이 집무실을 짓눌렀다.

두 사람을 지켜보는 최기석조차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자네는 일부러 그래프트 혈관을 잘못 채취하고, 담낭 봉합 시에는 고의 출혈을 일으켰어. 아닌가?"

"아……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는 집중력이 흐트러져서……."

"내 눈을 보고 똑바로 말해!"

스미스의 일갈에 토드가 몸을 떨었다.

여전히 스미스와 눈은 마주치지 못했다.

"사실은…… 폴 교수님이 정교수 자리 하나가 공석인데 저를 추천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폴 교수님을 돕는다는 조건으로……."

"졸렬한 자식."

쾅!

스미스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아무리 자신이 미워도 환자의 목숨으로 장난을 치다니, 폴은 용서받지 못할 인간이다.

"토드. 자네도 공범이야."

"자……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다시는……."

"세상에는 말이야. 두 가지 타입의 인간이 있어. 하나는 실수를 해도 새 출발 할 수 있는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영영 구제받을 수 없는 인간이지."

"……."

"넌 후자다. 내가 헤드 치프로 있는 한 승진은 없어."

"교수님!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질질 짜지 말고 꺼져. 얻어맞기 전에."

스미스가 살기를 뿜어내자 토드가 황급하게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된 거였나?'

최기석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켜보면 토드의 처치나 행동은 그리 신통치 않았다.

그래프트 채취 때도 그랬고, CPR 당시에는 CPR 중지 여론을 만들었고, 담낭결합 때는 미스로 출혈을 일으키기도 했다.

"미스터 최."

스미스의 시선이 최기석에게 향했다.

"솔직히 오늘 수술이 끝나니 자네가 더 탐나더군. CPR을 중단했을 때는 조금 실망했지만, 그것 말고는 흠잡을 때가 없었어."

"……."

"특히 이거 말이야."

스미스가 개흉 심장 마사지 하는 흉내를 냈다.

"뒤늦게 흉부외과의를 불렀다면 늦었겠지. 자네가 있어서 환자가 살 수 있었어.

"아닙니다. 저는……."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잘한 건 잘한 거니까."

"감사합니다."

"오늘 수술이 끝나고 자네가 더 탐나졌어.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일반외과 전공을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스미스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자네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가지 충고하지."

"네."

"의사는 환자만 잘 봐야 하는 게 아니야. 동료 의사들도 살필 줄 알아야 돼."

"동료들 말입니까?"

"그래. 진짜 동료와 동료인 척하는 인간들을 잘 살펴야 한다는 뜻이지. 동료에게 등을 맡기면 든든하지만, 동료인 척하는 인간에게 등을 맡기면 칼을 맞거든."

"……."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건, 사람 구별을 잘하기 때문이야."

"그럼 사람 구별하는 요령이 따로 있습니까?"

"물론. 의사는 크게 세 가지 분류로 나눌 수 있어."

스미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과거 그의 경험이 더해지면서 최기석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띠링!

[숨겨진 임무, 헤드 치프의 배려를 완수하셨습니다. 신규 스탯 성향이 개방되었습니다.]

설명이 끝나자 알림이 울렸다.

최기석은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스미스를 살폈다. 새로 생긴 성향이 스탯창 최상단에 위치했다.

성향: [환자 중심]

스미스의 성향은 환자 중심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해왔던 말과 행동을 살펴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결과다.

그렇다면 조금 전 집무실을 뛰쳐나간 토드의 성향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죄…… 죄송합니다. 갑자기 잊고 있었던 게 생각나서."

"자네가 보기에 나는 어떤 부류인 것 같나?"

"환자를 생각하는 분입니다."

"내 앞이라서 일부러 그러는 건가? 아니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진심으로 환자를 위하는 분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의 흔들림 없는 대답과 눈빛에 스미스가 미소 지었다.

"충고 명심하고, 앞으로도 멋진 활약 보여 줬으면 좋겠군."

"감사합니다. 헤드 치프."

띠링!

[스미스와 라포가 형성되었습니다.]

NEW [스미스(의료인): 라포 2단계 - 믿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밤은 더욱 깊어갔다.

* * *

다음 날 오후.

최기석은 병동을 돌며 환자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던 중 복도 끝에 있는 1인실 앞에 멈춰 섰다.

라빈 윌리엄스가 입원하기로 한 병실이지만, 그는 어제 병원에 오지 않았다.

간호사가 몇 번이고 연락했지만, 한 번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했다.

문득 불상사가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됐다.

환자를 전부 확인한 최기석은 병동 게시판 앞에 섰다.

게시판에는 다음 주에 있을 의료봉사 지원자를 모집하는 문서가 붙어 있었다.

무급에 자기 시간을 쪼개야 하는 말 그대로의 의료봉사.

지금까지 지원자는 엠마 단 한 명뿐이다.

"미스터 최. 안녕하세요."

서류에 이름을 적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조세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반가워요, 조세. 오늘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아침부터 계속 스크럽이 있었거든요."

조세가 말을 마치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평소와 달리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혹시 어제 일 때문에 그래요?"

"……네."

조세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어제 간이 든 트레이를 떨어트린 후 보이지 않는 손 디버프에 걸렸다.

그것도 지속시간이 무려 한 달인 것을.

"헤드 치프가 인턴 평가 최하점을 주겠다고 한 이후로 무얼 해도 힘이 안 나요."

"내가 조세라도 같은 마음일 겁니다."

최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언명령을 준비했다.

[그런데 어쩌면 어제 일이 약이 될 수 있어요. 헤드 치프에게 지적받은 사람들. 지금은 똑 부러지게 일 잘하는 거 알죠? 예방 주사 맞았다고 생각해요.]

위이이잉.

최기석의 몸에서 뿜어진 빛이 조세를 감쌌다.

[대상의 자신감과 환자 대처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라포 4단계로 인한 특수 버프 재생의 정수가 추가됩니다.]

[재생의 정수: 체력과 멘탈 회복능력이 두 배로 상승합니다.]

[지속시간: 두 달]

"고마워요. 역시 절 위해 주는 사람은 미스터 최밖에 없네요."

"알면 됐어요."

두 사람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 그리고 바빠서 이야기하는 걸 깜빡했는데. 저 일반외과 실습은 이번 주가 마지막이에요."

"아쉽네요. 조세만 한 인턴은 또 없을 텐데."

"말만으로 감사해요. 인수인계는 확실히 하고 갈 테니까. 걱정 마세요."

최기석은 조세와 대화를 마친 후 의국으로 돌아갔다.

제니퍼와 모건, 에단, 라훌이 동그랗게 앉았고, 그 중심에 피자가 놓여 있었다.

"안 그래도 부르려던 참인데. 타이밍 좋은걸?"

"제가 원래 먹을 복은 있거든요."

최기석이 에단의 옆에 앉았다.

피자를 먹으며 어제 있었던 간이식 수술을 비롯해 각종 대화가 오고갔다.

각자 쌓인 게 많았던 만큼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마침 잘됐네.'

최기석은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네 사람을 찬찬히 훑었다.

어젯밤 따끈따끈하게 얻은 신규 스탯 성향을 써 볼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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