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3)
"우와. 대박이다. 라빈 윌리엄스를 실제로 보다니……."
정설화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라빈 윌리엄스.
할리우드에서 손꼽히는 배우이자 코미디언이다.
죽은 사람의 사회, 유만지, 굿월헌팅 등등.
여러 작품에서 따뜻하고 코믹한 연기를 해왔으며, 한국에서도 인기와 인지도가 높았다.
'어째 느낌이…….'
최기석은 라빈 윌리엄스를 지켜보며 턱을 쓸어내렸다.
그가 일반외과 계열 클리닉으로 갔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기석아. 너도 신기하지?"
"어? 어."
"표정이 영 신통치 않은데?"
정설화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긴 메이죠는 세계 각지의 유명인이 몰려오는 병원이니까. 어쩌면 라빈 윌리엄스도 명함 못 내밀지 모르겠다."
"그건 아니야. 나도 배우는 오늘 처음 봤어."
"그럼 왜 그렇게 반응이 뚱해? 혹시 뚱이야?"
정설화의 스폰지 팝 개그에 최기석은 할 말을 잃었다.
못 본 사이에 강하나에게 아재 개그 특강이라도 받았나…….
"하하하. 진짜 웃긴다. 대박."
최기석의 과장된 리액션에 정설화가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가자."
최기석은 정설화의 손을 잡고 바깥으로 나왔다.
새카맸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파랗게 변했다.
비는 완전히 그쳤으며, 커다란 가로수에 무지개가 떴다.
"데이트를 시작하려니까 날씨가 좋아졌네. 하늘도 우리를 인정한다는 뜻 아니겠어?"
"아휴. 닭살."
정설화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건데도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은 차를 차고 도로로 나섰다.
"어디로 갈 거야?"
"미네소타가 생각보다 즐길 게 없더라고. 지인한테 물어봤더니 호수 구경이 제일 좋을 거래."
"……."
"미네소타는 오대호 주변에 있어서 호수가 많아. 그래서 일만 개의 호수가 있는 주라는 별명도 있지."
"호수가 만 개나? 과장 아니야?"
"크고 작은 걸 합치면 정말 그 정도 된대."
"대단해. 땅이 넓으니까 그럴 수도 있구나."
정설화가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갈 곳은 오대호 중 하나인 슈페리어 호수야."
"기대된다."
정겹게 회포를 푸는 사이 슈페리어 호수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차를 주차하고 호수 입구를 지났다.
"우와! 바다 같아. 이게 정말 호수야?"
정설화는 넓게 펼쳐진 호수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진짜 바다 같다."
최기석 역시 호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호수는 하늘을 담은 것처럼 푸르렀다.
조금 과장하면 하늘과 호수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시원하게 부는 바람과 파도처럼 부서지는 호숫물이 경치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너무 좋다."
"나도."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죠 건물 안에 갇혀 있다가 탁 트인 자연을 마주치니 속이 뻥 뚫렸다. 더불어 호수의 아름다운 풍경이 온몸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팔짱을 낀 채 호수를 따라 걸었다.
"혹시 메이죠에서 괴롭히는 사람은 없어?"
정설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느 곳에서 일하든지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이 문제인 법이다.
외국이라면 그 정도가 특히 더 심할 것이고 말이다.
그동안 잘 적응하고 있다고 말해 왔지만 100퍼센트 믿기는 어려웠다.
"없는데?"
"솔직히 말해 줘. 힘든데 억지로 견디지 않기로 했잖아."
정설화가 진지한 눈빛을 보냈다.
"으음…… 정확하게 말하면 괴롭히려는 사람은 몇몇 있는데 괴롭힘을 당해 주고 있진 않아."
"뭔가 복잡한 대답이네."
"그렇지?"
최기석은 웃으며 정설화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내 성격이 예전 같지 않잖아. 누가 건드린다고 해서 당해 주지는 않는다고. 데이비드라는 남자 간호사도 그랬고, 소화기내과에 메리라는 의사한테도 그랬고."
최기석이 에피소드 몇 가지를 짤막하게 들려주었다.
그제야 정설화가 안심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더 잘하고 있었구나. 역시 내 남자야."
"당연하지. 그건 그렇고 순환기내과는 어때?"
"나도 잘 지내고 있어. 아까 김철우 교수님이 과장으로 승진했다고 했잖아. 그러면서 순환기내과 클리닉 환자를 나한테 보내고 계셔. 나를 믿는다는 거지."
"역시 내 여자네."
최기석은 정설화의 볼에 뽀뽀를 퍼부었다.
"꺄아아악. 그만해. 다른 사람들 본단 말이야."
"뭐. 어때 여긴 미국이라고. 더 진한 것도 할 수 있어."
"몰라!"
정설화가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피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정설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짠! 이거 봐!"
그녀가 가방에서 사진기를 꺼냈다.
"웬 사진기?"
"생각해 봐. 그동안 우리 둘이 찍은 사진이 얼마나 되는지."
"그러고 보니까 열 장도 안 되겠는데? 그마저 다 휴대폰 사진이고 스티커 사진 같은 건 한 번도 찍은 적 없고."
"그래서 챙겨 왔어."
정설화가 만면의 미소를 띠며 사진기를 들어 올렸다.
"이건 찍고 나서 바로 출력도 할 수 있어. 신기하지?"
"……미안."
최기석이 풀 죽은 목소리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런 건 내가 미리 챙겨야 했는데."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꼭 남자만 이벤트를 준비해서 여자를 기쁘게 해 주는 건 아니잖아. 반대도 있을 수 있어."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내가 누누이 말했지? 네 마음만 변하지 않는다면, 난 언제나 곁에 있다고."
"그래. 고마워."
최기석이 정설화를 꼭 끌어안았고, 정설화는 가만히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제 사진 찍자."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
두 사람은 호수 주변을 걸으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각자의 독사진은 물론이요, 주변 사람에게 부탁해서 함께 있는 사진도 잔뜩 찍었다.
소중한 추억을 남기는 시간.
최기석과 정설화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이건 지갑에 껴놓는 게 어때?"
정설화가 출력한 사진 중 세 장을 검지로 가리켰다.
하나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머리 위로 하트를 만드는 사진, 다른 두 개는 호수를 배경으로 찍은 독사진이다.
"제일 잘 나온 것만 찍었네."
"당연하지."
두 사람은 사진을 나눠 가진 후 호수를 빠져나왔다.
날이 어두웠기에 인근 호텔에 투숙했다.
"우와. 예쁘다!"
먼저 샤워를 하고 나온 정설화가 창가에서 바깥을 응시했다.
호수를 직접 보는 느낌과 호텔에서 보는 느낌, 낮에 보는 느낌과 밤에 보는 느낌이 또 달랐다.
"난 설화가 제일 예쁜 것 같은데?"
최기석은 정설화에게 다가가 백허그를 했다. 이에 정설화가 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나도 알아."
"배고프지? 저녁은 뭐 먹을래?"
"괜찮아. 조금 있다가 먹어도 될 것 같아."
정설화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천진난만한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최기석은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에 보드라운 살결이 느껴졌다. 막 샤워를 끝내서인지 감미로운 꽃향기가 났다.
정설화는 아무 말 없이 최기석의 키스를 받았다. 하지만 최기석의 손을 감싸고 있는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호흡은 가빠졌으며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흐으으응."
그의 손이 위아래로 나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신음이 터졌다.
"감질나서 안 되겠어."
"응? 꺄아아아악."
최기석은 정설화를 두 팔로 안은 후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혔다.
그리고 스킨쉽을 나누며 서서히 그녀의 겉옷을 벗겼다.
매끈한 피부와 고혹적인 속옷을 보는 순간 이성의 끈이 끊겼다.
이윽고 두 사람의 격렬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 * *
다음 날 새벽.
최기석은 졸린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정설화와 하루 더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달콤한 오프는 이미 끝났다.
'벌써 이렇게 됐나?'
시간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현재 시각 오전 3시,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 씻고 바로 출발해야 한다.
하필 오프 후 오전 근무가 걸렸다.
'어디 갔지?'
최기석은 정설화가 곁에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거실로 나갔다. 그런데 먼저 일어난 그녀가 주방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설화야. 뭐해?"
"식사 준비. 빨리 씻고 나와."
"알았어."
최기석은 샤워를 마치고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로 먹음직스러운 미역국과 햇밥이 놓여 있었다.
"미역국을 직접 했어? 꼭두새벽에?"
"직접 한 건 아니고…… 인스턴트 제품 사와서 몇 가지 재료만 넣었어."
"잘 먹을 게."
최기석인 미역국을 떠먹고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가 끓여준 것 같은 깊은 맛이 났다. 미국에서 처음 먹는 미역국이라서, 그 의미도 남달랐다.
"설화야. 나 감동했어."
"이 정도 가지고 뭘. 출근해야 하니까 든든하게 먹어."
정설화는 최기석이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얼마 자지도 못했는데 피곤하지?"
"전혀. 미역국을 먹었더니 날아다닐 것 같은데?"
최기석은 먹은 것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고 고마워. 다음번에는 내가 한국으로 갈 게. 그때는 1박 2일로 여행 가자."
"좋아. 기대할게."
"공항에 도착하면 꼭 연락하고, 사랑해."
"나도."
최기석은 정설화와 입을 맞춘 후 주차장에서 차를 탔다.
정설화를 두고 혼자 떠나는 게 가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믿고 기다려 준 만큼 나중에 더 큰 보답을 하는 수밖에.
세 시간이 지난 후 메이죠 클리닉에 도착했다.
최기석은 차를 주차하고, 곧바로 병동으로 올라갔다.
"안녕하세요. 닥터 최."
카렌이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카렌. 괜찮으면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데이비드 이야기죠? 여기서 해도 돼요. 이미 소문이 쫙 돌았으니까."
카렌 옆에 앉은 간호사가 대화에 껴들었다.
"맞아요. 이제 숨길 일이 아니에요."
"그럼 혹시……."
"저번에 책임간호사 선생님이 데이비드를 끌고 간 건 기억하시죠?"
"당연하죠."
"그다음 날. 그러니까 닥터 최가 오프일 때 데이비드의 처분이 결정 났어요. 데이비드는요."
카렌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이번 달까지만 일하기로 했어요."
"잘됐네요."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비드는 인종차별주의자고, 업무 능력은 바닥이었다.
한마디로 일반외과 병동에 해를 끼치는 존재, 그의 해직 이야기에 앓던 이가 빠진 느낌이다.
"안 그래도 다들 좋다고 난리예요. 감사해요. 이게 다 닥터 최 덕분이에요."
"저뿐 아니라 카렌도 한몫했죠."
"그래도 이번 달 말까지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옆에 있던 간호사가 한마디 했다.
"무슨 뜻이죠?"
"데이비드, 그 인간이 닥터 최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뒤끝이 심해서 다들 못 건드리고 있었는데……."
"충고 감사합니다. 기억할게요."
최기석은 간호사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당직실로 들어갔다.
어제 당직자였던 모건과 오늘 근무자인 제니퍼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좋은 아침. 미스터 최."
"어제는 잘 쉬었어?"
최기석은 두 사람의 인사를 받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를 향한 모건과 제니퍼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두 사람은 실실 웃더니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나만 빼고, 왜 그래?"
"흠흠. 별건 아니고 어제 좋은 시간을 보낸 것 같아서."
"좋은 시간?"
"꼭 말해 줘야 하나?"
모건이 목덜미를 가리켰기에, 최기석은 거울로 목덜미를 확인했다.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키스 마크, 속칭 쪼가리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아, 이거? 아…… 아무것도 아니야. 인수인계나 빨리하자."
최기석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