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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199화 (198/407)

도전 (2)

[응. 공항에서 택시 타고, 메이죠로 가는 길이야. 한 삼십 분 정도면 도착할 것 같아.]

"그럼 미리 말하지. 난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 그랬지.]

정설화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럼 도착할 때쯤 연락해. 데리러 갈게."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전혀 예상 밖의 시나리오,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결단을 내린 후 에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에단. 혹시 바빠요?"

[아니. 휴게실에 쉬는 중인데?]

"잘 됐다. 지금 한국에 있는 애인이 메이죠까지 온다고 하거든요. 사전에 연락 없이 온 거라서 그런데 근처에 데이트 코스 있어요?"

[데이트 코스? 미네소타는 별로 볼 거 없는데…….]

에단이 말끝을 흐렸다.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최기석은 애가 탔다.

멀리서 온 정설화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 본 곳 중에 몇 군데만 알려 줄게. 대신 나중에 날 원망하면 안 된다?]

"절대 그럴 일 없어요."

"그럼 말해 줄게."

최기석은 에단이 불러 준 데이트 코스를 암기하고 통화를 끊었다.

이후 기숙사에서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지이이잉.

때마침 울리는 휴대폰.

우산을 챙겨 클리닉 본관 앞 도로로 나왔다. 택시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깜빡이고 있었다. 이윽고 택시의 좌석 문이 열리더니 정설화가 밖으로 나왔다.

"설화야!"

"기석아!"

최기석이 우산을 씌워 주자 정설화가 그를 꼭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정설화는 최기석의 품에 사정없이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근 한 달 만의 만남.

그동안 자주 연락했음에도 그리움으로 사무쳤다.

통화로는 애틋한 마음을 다 전할 수는 없는 법이기에.

"나도 보고 싶었어."

최기석은 정설화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아직도 그녀가 품 안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이 모든 게 꿈일 것 같았다.

"먼 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

"아이구, 예뻐라. 대체 남자친구가 누구야? 그 사람은 완전 복 받았네."

최기석이 너스레를 떨며 정설화의 볼에 뽀뽀했다. 이에 정설화가 꺄르르 웃으며, 몸을 배배 꼬았다.

"비 맞지 말고 이제 들어가자."

"응."

두 사람은 1층 카페에 자리 잡았다.

"여기가 메이죠 클리닉이구나. 진짜 신기하다. 딴 세상에 온 것 같아."

정설화는 주변을 살피며 눈을 깜빡거렸다.

메이죠의 내부 인테리어는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을 풍겼다.

접수창구나 가운 입은 의사들이 없었다면 미술관이라고 오해할 정도로 말이다.

거기에 백인, 흑인, 히스패닉, 아시아 계열 등등.

다양한 인종을 마주할 수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어. 요즘에야 아무렇지도 않지만"

"일은 할 만하고?"

"이제 완전히 적응했어."

최기석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메이죠에는 하이어 시스템이라는 게 있거든. 수련 성적이 좋은 사람은 특별히 수련 기간을 단축해 줘. 그래서 하이어 시스템으로 외과 수련 기간을 5년에서 3년으로 줄이는 게 목표야."

"그다음에 흉부외과 레지던트로 가는 거지?"

"맞아."

"펠로우까지 기다리다가 나 할머니 되겠다."

정설화가 울상을 지으며, 입술을 내밀었다.

"결과적으로는 네가 펠로우 따는 거랑 1, 2년밖에 차이 안 날걸?"

"그런가? 하여튼 빨리 한국에 돌아왔으면 좋겠다. 타임머신 타고 미래로 뿅 갈 수 없을까?"

"정말 그러면 좋겠다."

최기석은 정설화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고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녀의 손은 아기처럼 보드라웠다.

한 번 쓸어내리면 계속 쓸어내리고 싶었다.

"……."

"……."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말없이 웃었다.

굳이 대화를 이어가려고 하지 않아도 좋았다. 상대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잠깐만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응."

최기석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정설화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잡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잡지의 이름은 월간 메이죠.

놀랍게도 커버 사진이 최기석이었다.

사진 속 그는 가운을 걸친 채 웃는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정설화는 잡지를 챙긴 후 최기석을 다룬 부분을 찬찬히 살폈다.

"뭘 그렇게 봐?"

"메이죠 월간지. 거의 다 봤으니까 잠깐만 기다려."

이윽고 정설화가 잡지를 내려놓고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최기석을 응시했다.

"이 기사, 어떻게 된 거야? 나한테는 한 마디도 없었잖아."

꿀꺽.

최기석은 대답하지 못하고 마른침만 삼켰다.

"빨리 말해 봐!"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나?"

"다른 사람한테는 네 행동이 용감해 보였을지 몰라도 나한테 아니야. 너무 무모하잖아. 수갑을 찬 상태에서 그 환자가 뛰어내렸으면 어쩔 뻔했어?"

"미안."

최기석은 고개 숙인 채 사과했다.

불사신 칼라일을 설명할 수 없기에 무조건 빌어야 한다.

"기사에는 안 나왔는데 밑에 안전 매트가 깔렸었거든. 그래서 한 번 시도해 봤는데……."

"그거야 네 생각이지. 떨어지다가 불상사가 생길 확률이 더 높았잖아. 한국에서 널 걱정하는 나는 생각 안 해?"

"진심으로 사과할게.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 없을 거야. 무조건 내 몸부터 챙길 테니까 믿어 줘."

"정말이지?"

정설화의 질문에 최기석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불사신 칼라일이 사라진 시점부터 자기 몸을 던지는 행동은 불가능해졌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같은 일이 반복되면 정말 가만 안 있어!"

"알았어. 약속할 게."

이후 최기석은 재빠르게 화제를 돌리며 정설화의 기분을 풀어 주었다.

얼마 전에 벌어진 총기 사건이 다음 달 기사로 밀린 게 불행 중 다행이다. 만약 정설화가 두 기사를 한꺼번에 읽었다면 지옥을 맛보았으리라.

지이이잉.

대화 도중 갑자기 진동 소리가 들렸다.

"내 전화네."

정설화가 휴대폰 번호를 확인하고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만 통화 좀 할게."

"편하게 이야기해."

최기석은 말과 달리 정설화의 통화내용에 정신을 집중했다.

언뜻 남자 목소리가 들렸으며 그녀와 상대방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설화가 다른 남자와 편하게 통화하는 것은 처음 보는지라 괜히 질투심이 들었다.

"휴우…… 진짜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

"그건 너무하잖아. 싫어. 난 안 할 거야. 못해."

정설화가 최기석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고,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떨었다.

"기석아. 정말 미안한데 전화 한 번 받아 주면 안 될까?"

"누구인데?"

"그게…… 사실은……."

정설화가 머뭇거리는 동안에도 휴대폰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우리 아빠야."

"너희 아버지?"

정설화의 아버지는 정진명과는 일면식이 있다.

과거 보육원에서 의료사고 벌어졌을 때 그의 도움을 받았다.

"너희 아버님이 왜 갑자기 나를?"

"얼마 전에 커플링 낀 걸 보고 사귀는 사람이 있냐고 추궁하셨거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너랑 사귄다고 말했어. 귀찮겠지만 부탁해."

"알았어."

최기석은 심호흡하고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아버님. 안녕하세요. 예전에 뵀던 최기석입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네.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아버님도 무탈하시죠?"

[아니. 전혀~ 무탈 못해. 사랑스러운 딸이 웬 놈하고 연애하고 있거든.]

정진명이 빈정거리며 말을 이었다.

[분명 설화하고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게 어찌 된 영문이지?]

"인턴 생활을 하면서 서로 좋아하게 됐습니다."

[서로 좋아하게 됐다라…… 이거 어쩌지? 나는 자네를 싫어하게 될 것 같은데?]

"……."

[국내에 있었으면 소주라도 까면서 담판을 지었을 텐데 그럴 수도 없고.]

"설화가 저를 많이 좋아하고 저는 설화를 더더욱 많이 좋아하고 있습니다. 예쁘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은 뻔질나게 잘하네. 의사가 아니라 변호사를 해야 한 거 아닌가?]

정진명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다음 스케줄이 있으니 통화는 이쯤 하지. 만약에라도 설화 눈에서 눈물이 흐르면, 자네 눈에서는 피눈물이 흐를 테니까 각오하라고.]

살벌한 협박과 함께 정진명이 통화를 끊었다.

"아빠가 뭐래?"

"어? 별거 없어. 설화한테 잘해 주라고 하시던데?"

최기석은 들은 말을 최대한 순화시켰다.

"괜히 귀찮게 해서, 미안. 우리 아빠가 원래 뒤끝이 심하거든. 지금 통화를 안 했으면 아마 아빠가 직접 너한테 전화했을 거야."

"잘했어. 어차피 결혼 전에도 한 번 봬야 하는데 뭐."

"겨…… 결혼?"

최기석의 말에 정설화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최기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계속 앉아 있으니까 지루하지? 나랑 병원 투어하자."

"좋아."

최기석은 정설화를 데리고 클리닉 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병원이 워낙 넓고 볼 것이 많았기에 걷는 만으로 데이트가 되었다.

"괜찮으면 송 교수님도 뵙고 갈래?"

"의진대에 있던 송 교수님?"

"여기까지 온 김에 소개해 주고 싶어. 직접 뵌 적은 없지?"

"응. 가자."

두 사람은 흉부외과 헤드 치프 집무실로 향했다.

똑. 똑. 똑.

노크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최 선생. 웬일이에……."

송명진이 그의 곁에 있는 정설화를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기석이 여자친구 정설화입니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허허. 무슨 영광까지야. 설화 씨 이야기는 최 선생한테 많이 들었어요. 이렇게 직접 보니까 훨씬 참한데요?"

"감사합니다."

송명진의 칭찬에 정설화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가만히 서 있지 말고, 거기 소파에 앉아요."

송명진은 간단한 다과상을 차린 후 두 사람 맞은편에 앉았다.

오늘 처음 봤지만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는 것을 한눈에 알 볼 수 있었다.

"날씨도 궂은데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아닙니다. 고생은 송 교수님과 기석이가 더 많을 텐데요. 해외에서 의사 생활 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니까요."

"허허. 마음씨도 고와라. 최 선생, 임자를 제대로 만났는걸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송명진과 최기석이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

"설화 씨는 자부심을 품어도 돼요. 최 선생을 이해하고 품어줄 수 있는 여자는 지구를 통틀어도 몇 안 될 테니까."

"……네."

"순환기내과 전공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맞죠?"

"맞습니다."

"순환기내과에서는 아마 김철우 교수 실력이 가장 좋을 겁니다. 김 교수한테 많이 배워 둬요."

"안 그래도 설화는 김 교수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교수님이 저를 챙겨 주시는 것처럼요."

"오호. 김 교수의 인정을 받았다라……."

최기석의 설명에 송명진이 턱을 쓸어내렸다.

"외모만큼 실력도 뛰어난 모양이군요. 김 교수, 깐깐하기로 유명한데 말이죠."

"김 교수님은 얼마 전에 순환기내과 과장님이 되셨습니다."

"잘 됐군요. 그럼 순환기내과가 삐딱하게 돌아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

세 사람의 대화는 삼십 분 가까이 이어졌다.

송명진에게 응급 스케줄이 잡히면서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되었다.

"휴우…… 떨려서 죽는 줄 알았네."

정설화가 멀어지는 송명진을 보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좋은 분이라서 긴장할 필요 없는데."

"그건 알지만, 마음이 또 그렇지 않잖아."

"하여간 똑순이라니까. 슬슬 데이트하러 가자. 비도 딱 그쳤네."

최기석이 창밖을 응시하며 말했다.

두 사람은 흉부외과 병동을 빠져나와 로비에 도착했다.

로비는 평소와 달리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특이한 점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누군가를 쫓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기석아. 저 사람, 봐봐!"

정설화가 검지로 한쪽을 가리켰다.

할리우드 배우 라빈 윌리엄스, 그가 일반외과 클리닉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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