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1)
최기석은 가만히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모처럼의 오프 날.
오전에 수술 동영상을 촬영하고, 나머지 시간은 느긋하게 보낼 예정이다.
상태창을 띄워서 그동안 모은 일반외과 수술들을 살폈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것은 역시 암이었다.
위암, 간암. 대장암, 췌장암, 담낭암까지.
동영상이 뒤죽박죽이었기에 수술 방법과 병기에 따라서 보기 좋게 분류했다.
'확실히 매력적이긴 해.'
최기석은 작업을 끝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GS를 그레이트 써전이라고 했던 스미스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이제 이 주가량 수련했지만, 일반외과는 팔방미인 같은 구석이 있었다.
우선 외과 계열에서 수술이 가장 많았다.
그로 인해 다양한 케이스의 환자를 만날 수 있었고, 여러 과와 협진을 가졌다.
써전들의 솜씨가 좋아서 배울 것도 많았다.
만약 흉부외과에 대한 포부가 없었다면?
분명 일반외과를 전공으로 선택했으리라.
최기석은 이어서 상태창에 있는 스킬과 젬, 그리고 아이템들을 차례대로 훑었다.
새로운 능력을 얻은 후 1년 9개월이 지난 시점.
지금까지 얻은 보상들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펠로우가 끝나면 과연 자신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졌다.
'아쉽네.'
최기석은 영혼의 눈물을 응시하며 턱을 쓸어내렸다.
NEW [영혼의 눈물: 유니크]
-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정. 거짓 없는 마음에서 새로운 기적이 만들어진다.
- 영혼 활성을 완료하면 특수효과 초각성을 얻습니다.
- 영혼 활성(80/700): 집도에 성공한 경우, 직접적인 수술 보조를 할 경우 영혼 활성 스택이 상승합니다(단순 보조는 포함하지 않습니다) - 특수효과 초각성: 일시적으로 모든 처치 능력치 2단계 상승합니다. 지속시간은 반나절이며, 초각성 효과가 끝나면 일시적으로 탈진에 빠집니다.
영혼의 눈물은 최미순에게 얻은 귀중한 아이템이다.
안타깝게도 트레이닝 룸에서의 수련으로는 영혼 활성 스택을 쌓을 수 없었다.
최기석은 능력들을 살피다가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아침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가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오늘 오프였어?"
라훌이 식판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맞아. 너도 오프?"
"나도 오프야. 하필이면 비 오는 날에 쉬다니. 환자도 별로 없는 날인데."
"비 오면 환자 없는 건 미국도 똑같구나."
최기석은 피식 웃은 후 스프를 떠먹었다.
"혹시 어제 줄리앙 소식 들었어?"
"왜? 사고라도 쳤어?"
"되묻는 걸 보니까 모르나 보네. 사고라고 하면 사고라고 할 수 있고, 불상사라고 하면 불상사라고도 할 수 있지."
"궁금하게 하지 말고 말해 봐."
"흠흠…… 그게 말이야. 어제 저녁에 엠마한테 고백했다가 차였댄다."
"대단하다, 대단해."
최기석은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클리닉에 들어 온 지 이주밖에 안 된 파릇파릇한 신규 레지던트가 상급자에게 사랑 고백을 하다니.
"혹시 이거 다른 사람들도 알아?"
"줄리앙이 자기 입으로 말하고 다녔으니까 대부분 알걸? 근데 의외다. 룸메이트인 네가 이걸 모르다니."
"어제는 한 번도 못 봤으니까."
최기석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줄리앙을 보면, 내가 아는 프랑스 사람에 대한 상식이 깨지는 것 같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이렇게까지 가벼운 녀석인 줄 몰랐는데."
"동감이야."
라훌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제는 고마웠다. 네가 스크럽 서 준 덕분에 몸이 한결 편해졌어."
"그런 부탁이라면 언제라도 오케이야. 외국 땅에 있는 것도 서러운데 몸까지 아프면 더 서러우니까."
"미스터 최도 부탁할 게 있으면 말해. 두 손 걷어붙이고 도와줄 테니까."
"오케이. 기억하지."
"그건 그렇고…… 헤드 치프 스크럽은 어땠어?"
라훌이 눈을 반짝거리며 화제를 돌렸다.
그가 진짜로 관심을 가진 부분이 이곳임을, 최기석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생각 없이 들어가면 욕먹기 딱 좋더라."
"어떤 면에서?"
"헤드 치프는 집도 중에도 스태프의 행동을 다 지켜보고 있어.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라고 방심했다간 큰코다칠 거야."
최기석은 스크럽을 서며 느낀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아직은 그가 좋은 인간인지 나쁜 인간인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일단은 잘해 주다가 후자라고 판단되면 이자까지 쳐서 갚아 주면 된다.
"고마워. 도움 많이 됐다."
라훌이 싱긋 웃었다.
"그러면 다행이고. 푹 쉬어."
최기석은 라훌과 카페테리아에서 헤어진 후 병동을 찾았다.
동영상 촬영 전에 할 일이 있었다.
의국에 들러서 서류철을 챙긴 후 제이스와 윌리엄의 병실로 들어갔다.
중환자실에 있던 제이스가 일반 병실로 돌아오면서 부자가 나란히 한 병실에 입원했다.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안녕하세요. 몸은 좀 어떠세요?"
"그리 나쁘지는 않군요."
"저도 그럭저럭 괜찮아요."
최기석의 질문에 제이스와 윌리엄이 대답했다.
"내일 있을 생체 간이식 수술에 대해 설명해 드리고 서명을 받으려 합니다."
"……."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 잘 들어 주세요."
최기석이 차분하게 설명을 이었다.
생체 간이식술의 필요성과 방법, 시술 전후의 주의사항,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
이번 수술이 메이죠에서 처음 행해진다는 사실까지 덧붙였다. 두 사람이 불안해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사실을 속일 수는 없었다.
중간중간 질문을 받다 보니 설명만 이십 분이 넘었다.
"충분히 알았습니다."
제이스가 서명을 끝내고 동의서를 내밀었다.
반면 윌리엄은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동의서와 최기석을 번갈아 바라봤다.
"닥터 최. 이 수술 정말 괜찮아요?"
"무슨 뜻이죠?"
"이 수술, 메이죠에서 처음 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아버지와 나를 실험대상으로 쓰는 거 아닙니까?"
윌리엄이 팔짱을 낀 채 물었다.
"두 분으로서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술의 집도의는 일반외과 최고의 써전인 헤드 치프 스미스입니다. 수술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마쳤고요."
"그래도 별로 내키지 않아요."
"복강경 수술을 원치 않는다면 개복수술을 하셔도 됩니다."
찌이이이익.
최기석은 제이스에게 받은 동의서를 곧바로 찢어 버렸다.
그 행동에 제이스와 윌리엄이 놀란 토끼 눈을 했다.
"저…… 저기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아닙니다. 환자가 원치 않는 수술을 억지로 권하고 싶지는 않아요."
최기석은 일반적인 생체 간이식 수술에 대해 설명했다.
복강경 수술보다 흉터가 크게 남으며, 회복기간이 길다는 이야기에 이르자 월리엄이 휘휘 고개를 저었다.
"다…… 닥터 최. 그냥 복강경 수술 받을게요."
"방금 전 실험대상은 원치 않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메이죠 클리닉인데 아무렴 알아서 잘해 주겠죠. 아까는 미안했습니다."
"그럼 동의서를 다시 뽑아 오겠습니다."
최기석은 병실을 나온 후 벽에 등을 기댔다.
"휴우……."
참았던 한숨이 터졌다.
윌리엄이 튕기기에 일부러 강하게 나갔다. 복강경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구질구질하게 설명했다면, 분명 윌리엄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으리라.
윌리엄에게는 청개구리 기질이 있었으니까.
이로써 중요한 고비를 넘겼다.
복강경 수술을 고대하고 있는 스미스에게 한 소리 듣지 않아도 된다.
지이이잉.
의국에서 동의서를 출력한 후 병실로 돌아갔다.
제이스와 윌리엄은 동의서를 받자마자 서명해서 건넸다.
"그럼 두 분 모두 편히 쉬세요."
인사를 건네고 병실을 나오는데 뜻밖의 장면을 목격했다.
저 멀리서 메이죠 직원과 대형견이 다가오고 있었다.
병원에 개라니…….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일반외과 레지던트 기석 최입니다. 각종 알레르기와 위생, 그 밖에 여러 가지 문제로 개는 병동 출입이 불가능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특별한 아이예요."
직원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저는 애니멀 테라피실의 스태프 클라이드라고 합니다. 505호실에 입원한 테리의 치료를 돕기 위해 왔습니다."
"애니멀 테라피실이요? 그런 곳도 있습니까?"
"A.
T를 모르시는 걸 보니 신규 닥터군요."
클라이드가 말을 이었다.
애니멀 테라피는 신경정신과 치료의 일종이라고 한다.
정서가 불안정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하며 일주일에 2회, 한 시간 동안 치료가 진행된다고 한다.
"애니멀 테라피가 궁금하다면, 병실 밖에서 구경하셔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최기석이 대답하자 대형견이 다가와 그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이 아이는 품종이 뭐죠?"
"사모예드라고 합니다. 이름은 찰리라고 하죠."
"찰리."
이름을 불러 주자 찰리가 신나게 꼬리를 흔들었다.
주인이 와도 개무시하는 어느 집의 어느 개와는 차원이 다른 붙임성이다.
"이 아이 정말 귀엽네요. 얼굴은 웃는 상이고 눈이 무척 똘망똘망한데요?"
"그래서 치료견으로 많이 쓰입니다. 치료 시간이 다 됐으니 그만 가야겠어요."
최기석은 병실 바깥에서 찰리와 클라이드를 지켜보았다.
애니멀 테라피.
이름은 거창했지만 특별한 치료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환자와 찰리가 함께 스킨십하고 노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애초에 병원에서 개를 심리치료 도구로 쓴다는 것 자체가 파격적인 발상이지만 말이다.
'확실히 대단하단 말이지.'
최기석은 메이죠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끼며 수술실로 향했다.
오전 일과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로젯에서 수술을 참관하고 있었다.
필요한 동영상은 이미 다 촬영한 상태로 응원 목적의 참관 중이다.
집도의가 모건이었으니까.
모건은 충수돌기염으로 찾아온 환자에게 응급수술을 하고 있었다.
일반외과 신규 레지던트 중에서는 최기석 다음으로 집도에 나선 것이다.
최기석의 시선은 모니터에서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
두 주먹에는 어느새 힘이 들어갔다.
동기의 수술이라서 남 일 같지 않았다.
더욱이 모건은 총기 사건의 후유증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기에.
모니터 속 모건이 손으로 막창자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막 창자 끝에 위치한 충수돌기를 찾는 과정이다.
이윽고 모건이 맞은편 스태프와 시선을 교환하고 전기 소작기를 손에 들었다.
치이이이익.
하얗게 퍼져나가는 하얀 연기.
이윽고 부풀어 오른 충수돌기가 곡반으로 떨어졌다.
'끝났다.'
최기석은 그제야 굳었던 표정을 풀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모건은 첫 집도의 무게감을 잘 이겨 냈다. 수술하는 모습만으로는 그가 신규 레지던트라는 것을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
최기석은 그가 복부를 닫는 것을 확인하고, 로젯 앞에 대기했다.
"모건. 첫 집도 축하해."
"미스터 최? 보고 있었어?"
로젯에서 나온 모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지. 완전히 베테랑이던데?"
"어려운 수술도 아니었는데 뭐. 그리고 널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지."
"그건 당연한 거고."
최기석의 농담에 모건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커피라도 한잔할까?"
"물론."
두 사람은 일층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삼십 분 가까이 이야기를 하는데 전화가 왔다. 번호를 확인하니 정설화의 전화다.
"난 그만 올라가 볼게. 오프 때까지 얼굴 보는 건 지긋지긋하니까 기숙사에서 푹 쉬라고."
"네, 네.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모건과 인사하고 통화를 연결했다.
"설화야. 보고 싶었어?"
[흥! 거짓말. 요새 통 전화 없더라?]
"미안. 너무 바빠서 그랬어. 마음씨 넓은 설화가 이해해 주라."
[장난이야. 난 그런 걸로 안 삐져.]
정설화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 뭐 하고 있어?]
"자기 생각."
[그건 매일 매 순간 해야 되는 거니까 빼고.]
"카페에서 커피 마셔. 오늘은 의료 공부 안 하고, 편하게 쉬어 보려고."
[잘하고 있네. 앞으로 오프 때는 무조건 쉬어.]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최기석은 휴대폰 너머의 빗소리를 들었다.
"설화야. 한국도 지금 비 와?"
[아니. 맑은데?]
정설화의 말투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그래? 비가 안 오는데 왜 빗소리가 들리지?"
최기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창밖을 응시했다. 순간 무언가가 번뜩 머리를 스쳤다.
"너. 혹시 미네소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