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해서 (6)
- 추궁 모드를 통해서 시시비비를 가립니다.
- 추궁 모드: 상대방의 대화를 텍스트로 나타내어 미심쩍은 부분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후 적절한 증거를 제시하면 상대방의 거짓을 밝혀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스킬은 의료와 관련은 없었다.
다만 가일이 변호사라서 유사한 스킬이 생긴 듯싶었다.
"닥터 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갑자기 떠오른 게 있어서요. 푹 쉬세요.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가일과 작별 인사하고 병실을 나왔다.
'뭐. 나쁘지 않았어.'
최기석은 하루를 돌이켜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췌장암 환자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
뒤이어 발생한 응급상황도 잘 해결했으며 스미스에게 보이지 않는 손 디버프를 얻었다.
디버프 기간에 큰 사고만 터지지 않으면 임무를 무사히 완수할 수 있으리라.
"글세, 아니라니까요? 왜 저한테 책임을 떠넘기세요."
"카렌.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솔직히 인정해요. 매번 이런 식으로 나올 겁니까?"
복도 끝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복도 끝 스테이션에 도착하자 데이비드와 카렌이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닥터 최. 너무 억울해요."
카렌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며 말을 이었다.
"5호실에 챈들러 환자 투약 문제에요. 분명 인수인계할 때는 아무 말도 없었는데 갑자기 투약량을 안 줄여 놨다고 생트집을 잡네요."
"이봐요, 카렌. 지금 나한테 덮어씌우는 겁니까?"
데이비드가 얼굴을 구겼다.
"간호사들 일에 의사인 제가 껴드는 건 경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두 분이 허락한다면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네. 제발 그래 주세요."
"맘대로 하시죠."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잘 됐다.'
최기석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평소라면 이런 오지랖을 떨지 않겠지만 새로 얻은 스킬을 써보고 싶었다.
[추궁 - 이의가 있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추궁 모드로 전환합니다.]
"카렌부터 아까 전의 상황을 자세히 말해 주세요."
"네."
카렌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하는 말이 만화 속 말풍선처럼 텍스트로 나타났다. 말이 문자로 나타나면서 이를 두고두고 곱씹을 수 있게 되었다.
[저는 어제 저녁 근무였고, 데이비드는 낮 근무였어요. 우리는 평소처럼 근무 교대 이십 분 전에 인수인계를 하고 있었어요. 인수인계 중 특이사항은 없었죠. 물론 문제가 된 챈들러 환자에 대한 부분도요.]
최기석은 카렌의 대화 텍스트를 찬찬히 훑었다.
그러던 중 마지막 챈들러 환자 부분에서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가 가슴을 간질이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다.
"잠깐만요! 챈들러 환자에 대한 인수인계 사항이 하나도 없었나요?"
"와…… 완전히 없었던 건 아니에요."
카렌이 겁먹은 듯 말을 떨었다.
"하지만 문제가 된 투약 부분에 관한 건 없어요. 하늘에 맹세할 수 있어요."
"정말 문제가 된 게 없습니까? 제가 조세에게 들은 거랑은 다른데요?"
다시 한 번 느껴지는 감각.
최기석이 유도신문을 하자 카렌이 눈에 띄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소…… 솔직히 채혈 실수를 하긴 했어요. 챈들러 환자의 피를 다른 환자 채혈 샘플에 넣었거든요. 하지만 그건 나중에 알아차리고 원 상태로 돌려놨어요."
[새로운 내용이 텍스트에 추가되었습니다.]
'추궁을 제대로 하면 내용이 변하거나 더해질 수 있구나.'
최기석은 알림을 확인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억울해요. 이건 투약과 다른 문제예요."
"왜 다른 문제입니까? 투약 샘플 하나 제대로 구분 못하는 사람이 인수인계는 제대로 들었겠어요?"
데이비드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대화에 껴들었다.
"데이비드. 가만히 있어요."
최기석이 주의를 주자 그가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이제 데이비드의 말을 들어 보겠어요."
"있는 사실대로만 말해 드리죠."
데이비드가 자신만만한 태도로 설명을 이었다.
[인수하기 전의 일이에요. 챈들러의 주치의인 제니퍼가 투약 중인 가리엔의 용량을 줄이자고 말했죠. 그래서 저는 곧 퇴근하니 다음 근무자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하겠다고 했어요. 나는 인수인계할 당시 분명 카렌에게 투약량을 줄여 달라고 말했습니다.]
데이비드의 설명 역시 말풍선처럼 그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
최기석은 텍스트를 읽으며 생각에 잠겼다.
카렌 때와는 다르게 가슴을 간질이는 감각이 없었다.
"잠깐만요! 챈들러의 주치의가 제니퍼가 맞습니까?"
"뜬금없이 왜 그러세요? 그거야 E.
M.
R로 확인해 보면 되잖아요."
한심하다는 듯한 데이비드의 표정.
"주치의가 바뀌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확인차 물어본 겁니다."
최기석은 태연하게 둘러댔다.
사실 본인이 생각해도 바보 같은 이의제기였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 데이브와 카렌이 최기석의 판결을 기다렸다.
최기석은 전열을 가다듬은 후 데이비드와 그의 말풍선을 응시했다.
"데이비드. 제니퍼가 가리엔의 용량을 줄이자고 했다고 했죠?"
"네. 그게 무슨 문제가 있죠?"
"제니퍼가 E.
M.
R에 오더를 안 남겼습니까? 제니퍼가 제대로 오더를 남겼다면, 카렌이 놓쳤을 것 같지 않은데."
"깜빡했나 보죠. 주치의들이 오더 잊어버리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데이비드가 빈정거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카렌에게 투약량을 줄여달라고 말한 게 확실합니까? 그렇게 말해야겠다고 생각만 했던 건 아닌가요?"
"정말 확실하다니까요! 혹시나 카렌이 까먹을까 포스트잇까지 붙여 놨다고요."
데이비드가 모니터 근처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포스트잇 중 하나를 가리켰다.
띠링!
[새로운 증거 포스트잇이 추가되었습니다.]
[포스트잇: 데이비드가 카렌을 위해 남긴 메모. 챈들러의 환자 번호와 해당 약물의 감량 정도가 적혀 있다.]
"카렌. 이래도 변명할 수 있어요? 카렌 때문에 내가 제니퍼에게 얼마나 혼났던 줄 알아요!"
데이비드가 큰소리를 친 반면 카렌은 믿기지 않는 듯 두 눈을 깜빡거렸다.
"닥터 최. 전 이런 메모 못 봤어요. 정말이에요!"
"이제 지루한 말장난은 그만둡시다. 닥터 최가 보기에도 카렌의 실수가 맞죠?"
데이비드가 최기석의 판정을 재촉했고, 최기석은 그에 개의치 않고 포스트잇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증거가 나타난 순간 감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포스트잇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잠깐! 이의가 있어요!"
최기석의 낭랑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깜짝이야. 증거까지 나온 판국에 대체 뭡니까?"
"이 포스트잇, 아무리 봐도 이상하잖아요."
"이상할 게 뭐가 있죠? 환자 번호도 제대로 적혀 있고, 약물하고 감량 정도도 정확한데."
"중요한 건 포스트잇의 위치입니다."
최기석이 포스트잇을 가리키자 카렌이 뒤늦게 몸을 들썩거렸다.
"어머? 정말이네? 포스트잇이 모니터 하단부에 붙어 있어요."
"그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
"지금 모니터 하단부에 붙어 있는 메모는 전. 부, 오. 늘 남. 긴. 메. 모. 예. 요. 데이비드, 카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오늘 급하게 메모를 단 거 아닙니까?"
"그…… 그럴 수가."
데이비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동요한 것도 잠시뿐, 데이비드가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었다.
"포스트잇의 위치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제 실수로 여기다 붙인 거니까."
"그러면 다시 한 번 정리하겠어요. 데이비드는 어제 인수인계 시간 컴퓨터 하단 부분에 포스트잇을 붙였다는 거죠?"
"바로 그겁니다!"
데이비드가 만면의 미소를 띠었다.
[텍스트가 수정되었습니다.]
[데이비드는 어제 인수인계 당시 실수로 컴퓨터 하단부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닥터 최의 탐정 놀이도 끝날 때가 됐군요. 어떻습니까?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건 카렌이 맞죠?"
"뻔뻔한 건 데이비드 당신이야."
최기석이 데이비드를 노려보았다.
"내가요? 닥터 최가 날 싫어하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이런 문제로 다른 간호사를 감싸고돌 겁니까?"
"감싸고도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뿐이에요."
"참나. 그럼 증거를 대 보세요. 내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증거를!"
스테이션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
세 사람은 한동안 침묵 속에 서로를 응시했다.
"이제 알 것 같군요. 데이비드가 말한 증거를."
최기석은 검지로 CCTV를 가리켰다.
"데이비드. 당신은 분명 본인의 입으로 말했어요. 어제 인수인계 시간에 포스트잇을 붙였다고. 그러면 CCTV에 그 포스트잇을 붙이는 영상이 남았겠죠?"
"……."
"그럼 우리 셋이서 CCTV 영상을 확인하면 되겠군요. 어때요?"
"크으으윽."
데이비드가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피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데이비드는 속으로 수없이 욕지거리를 되뇌었다.
사실 카렌에게 인수인계를 제대로 하지 않은 건 자신이다. 다만 그 책임을 신규 간호사인 카렌에게 떠넘길 수 있다고 판단해서 이런 작전을 벌였고 말이다.
가짜증거가 발목을 잡을 줄이야.
"아무 죄가 없다고 방방 뛰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럽니까?"
최기석의 말에 데이비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전혀 의외의 인물이 대화에 껴들었다.
"데이비드. 닥터 최의 말이 사실입니까?"
복도 끝에서 책임간호사가 튀어나왔다.
"헤…… 헬렌?"
"두고 간 물건이 있어서 돌아왔는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군요. 데이비드, 대답하세요. 닥터 최의 말이 사실이냐고요."
책임간호사의 살벌한 눈빛에 데이비드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죄송합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이 문제는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군요. 나랑 이야기 좀 할까요?"
"……네."
헬렌과 데이비드가 자리를 떠나면서 스테이션에 평화가 찾아왔다.
"닥터 최. 정말 고마워요."
카렌이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닥터 최가 아니었으면 제 잘못으로 몰렸을 거예요."
"저보다 카렌이 고생 많았죠. 데이비드가 계속 몰아붙이는 바람에 당황했죠?"
"네. 데이비드 나쁜 새끼! 무슨 문제만 생기면 전부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고."
"그래도 책임간호사 선생님이 오늘 이야기를 들어서 다행이네요. 이만한 일이면 잘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요."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
최기석은 카렌과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기숙사로 돌아갔다.
신규스킬
'추궁 - 이의가 있어!'
의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이만한 능력이라면 의료사고 시에도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으리라.
꾸르르르륵.
뒤늦게 밀려오는 허기.
최기석은 샤워를 마치고 카페테리아를 찾았다.
* * *
다음 날 오전.
최기석은 침대에 누워서 손을 휘젓고 있었다.
트레이닝 룸에서 휘플 수술 수련 중이다.
'미치겠네.'
그의 얼굴이 휴지처럼 구겨졌다.
암 조직이 있는 췌장 머리 부분을 절제하던 중 실수로 혈관을 건드렸다. 메스가 살짝 빗나갔을 뿐인데도 주변이 금방 피바다로 변했다.
치이이이익.
가상 스태프가 석션에 나섰다.
최기석은 타이밍을 보다가 전기 소작기로 출혈 부위를 지졌다.
다시 이어지는 수술.
최기석은 천신만고 끝에 절제술을 끝내고, 복합 장기 봉합술에 들어갔다.
췌장-공장 문합술, 담관-공장 문합술, 십이지장-공장 문합술이 차례대로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수술복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휴우……."
최기석은 한숨 쉬며 손에서 니들홀더를 놓았다.
[트레이닝을 종료합니다. 종합 랭크 F. 환자가 수술 중 사망하였습니다. 수술 소요시간은 11시간입니다.]
[신규 수술 마스터리 휘플 수술이 생성되었습니다.]
[휘플 수술: 0/5]
휘이이이잉.
하얀빛이 쏟아진 후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최기석은 이마에 손을 얹은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해 보는 일반외과 최고난도의 수술.
실패가 당연하지만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누워 있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쏴아아아아.
창밖에서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미국에서도 유비무환(비가 오면 환자가 없다)이 통하려나?"
중얼거림이 방에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