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해서 (3)
"혹시 어제 그 일로 충격받은 거 아니야?"
"걱정해 줘서 고마운데 그건 아니야."
최기석은 휘휘 손을 내저었다.
어제 총기 사건 이후 스태프들은 그에게 우려 섞인 관심과 걱정을 보였다.
그와 달리 최기석은 전혀 정신적인 타격을 받지 않았다.
사건 당시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모건은 어때 보여?"
최기석이 화제를 돌렸다.
"그……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그냥 네 의견이 궁금해서."
"미안. 내가 너무 민감했나 봐."
제니퍼가 쑥스러워하면 말을 이었다.
"어제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의외로 담담하더라. 생각보다 잘 이겨 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네."
최기석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어제 정언명령 사용하기를 잘했다.
정언명령은 격려에 비해서 지속시간이 길고 다양한 효과를 지녔다.
앞으로 계속 효자 노릇을 하리라.
"폴 교수님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잘못한 게 있으면 벌을 받고, 문제가 없다면 잘 넘어가겠지."
총기 사건으로 해당 수술이 재조명되었다.
릭의 아버지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는 바로 폴이었다. 이에 병원 윤리위원회는 조만간 폴이 집도했던 해당 수술을 평가해 적정성 여부를 밝힌다고 했다.
총기 사건이 뉴스로 나가면서 문제를 그냥 넘겨 버릴 수 없게 되었다.
"무슨 문제가 생겨도 모건하고는 상관없겠지?"
"아마도."
최기석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수술의 최종 책임은 집도의에게 있는 데다가 모건은 제2보조였잖아. 모건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그렇겠지?"
제니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최기석은 서랍에 넣어 둔 핸드크림을 손에 발랐다. 손에서 윤기가 흐르면서 기분 좋은 향기가 흘러나왔다.
"웬일이야? 핸드크림을 다 바르고?"
제니퍼가 입을 가리며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최기석은 미용 쪽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의사로서 최소한의 깔끔함을 유지할 뿐.
외형을 꾸미거나 관리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선물 받았거든."
"좋겠다. 벌써 선물도 받고."
"누구한테 받았는지는 안 물어봐?"
"당연히 환자한테 받았겠지. 미스터 최는 환자들한테 잘하잖아."
제니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죠 클리닉은 퇴원하는 환자에게 설문지를 돌린다.
개중에 주치의를 평가하는 항목이 있는데 최기석은 항상 주치의 평가에서 최상위 점을 받았다.
처치뿐 아니라 환자만족도 부분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방금 비웃었던 것 같은데. 착각인가?"
"차…… 착각이야. 완전한 착각이지."
"좋아. 이번엔 그냥 넘어갈게. 그건 그렇고 조만간 다들 첫 집도 들어간다면서?"
"에단한테 들었구나. 맞아. 환자가 생기는 대로 충수 절제술부터 가르쳐 준다고 하더라."
"난 어떻게 되려나?"
최기석이 턱을 쓸어내렸다.
그는 이미 복강경 충수 절제술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다시 충수 절제술을 하기보다는 다른 수술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두 사람은 다가올 집도를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환자 좀 보고 올게. 무슨 일 있으면 콜하고."
"알았어."
최기석이 의국을 떠나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가일의 병실이다.
타다다닥.
가일은 노트북으로 한창 작업 중이었다.
그는 어제 응급실을 통해 입원한 환자로 만성 췌장염을 앓고 있었다.
"가일."
"……."
"가일? 저 왔습니다."
"아, 미안합니다. 집중하다 보니 인사를 못 했네요. 좋은 아침입니다."
"입원 중인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닙니까?"
최기석이 노트북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중요한 소송은 동료분에게 양보하셨겠죠?"
"물론입니다. 어제 선생님이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이번 주에 수술하면 다음 주가 되어야 퇴원할 수 있다고. 어차피 소송에 들어갈 수 없는 몸입니다."
"그럼 왜 계속 작업 중이죠?"
최기석은 의심을 풀지 않고 다시 물었다.
"사건을 넘기더라도 자료조사는 철저히 해 주고 싶어서요. 내 일을 떠넘기는 꼴이 됐으니까."
"그 정도는 동료분도 이해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마음 푹 놓고 쉬세요."
"그거야 그렇지만……."
가일이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내 삶은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휴일에도 일을 붙잡고 살았죠. 덕분에 난 우리 로펌 최고의 승률과 최다 소송건수 기록을 가졌어요."
"……."
"그래서 이렇게 텅 빈 시간은 참을 수 없어요. 지금도 회사 일이 아른거려서 미칠 것 같아요."
"가일."
최기석은 차분하게 가일을 응시했다.
사실 그의 질환은 만성 췌장염뿐만이 아니다.
응급실에서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썼을 때 한 가지 진단명이 더 있었다.
응급이 아니었기에 언급하지 않았을 뿐.
"지금 느낀 증상들을 합치면 일중독입니다."
"일중독이요?"
가일이 코웃음 쳤다.
"난 단지 내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을 뿐입니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된단 말입니까?"
"목표에 매진하는 일을 부정적으로 보는 게 아닙니다. 목표만 생각하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게 문제가 된다는 이야기에요."
"……."
"가끔은 여유를 가지세요. 그게 오히려 더 도움이 됩니다."
그도 제니퍼와 야구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에야 간신히 깨달았다.
일상이 주는 소소한 기쁨이 무엇인지.
그것이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정 할 일이 없다고 하면 제가 숙제를 내 드리죠."
"숙제요?"
"딱 두 가지만 하면 됩니다. 그중 첫 번째는."
최기석은 검지를 펼치면서 말을 이었다.
"드라마를 보는 겁니다."
"참나. 나보고 시시껄렁한 드라마 따위를 보라는 겁니까?"
"네. 꼭 보셔야 합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노트북으로 문서 작업하는 것보다 더 많은 걸 가르쳐 줄 테니까요. '보스턴 리갈하이'라는 드라마를 전 시즌 다 보세요. 법정 드라마라서 좀 더 공감하면서 볼 수 있을 겁니다."
최기석은 중지를 펼치며 말을 이었다.
"두 번째는 매일 10분 이상 가족과 통화하는 겁니다. 가족하고 이야기 잘 안 하시죠?"
"그거야. 뭐……."
가일이 말을 얼버무리며 시선을 피했다.
예상대로 가족 이야기에 켕기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일은 잠시 내려놓고 제 말을 따라주세요. 알겠습니까?"
"……."
최기석과 가일의 시선이 팽팽하게 충돌했다.
이윽고 가일이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서는 닥터의 말을 들어야지. 별수 있겠습니까?"
"분명 후회 없을 겁니다."
최기석은 가일이 법정 드라마를 보는 것까지 확인하고 병실을 나왔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윌리엄의 병실.
어제 윌리엄은 간이식 적합 테스트에 통과해서 입원 수속을 밟았다.
드르르륵.
병실로 들어가자 윌리엄이 자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인 줄리는 보호자용 매트에서 성경을 읽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괜찮으시면 바깥에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최기석의 제안에 줄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사람은 스테이션 근처 벤치에 자리 잡았다.
"이제 한 시름 놓으셨겠습니다."
윌리엄이 테스트에 통과하면서 생체 간이식 수술 날짜가 이틀 뒤로 잡혔다. 이 순간이 오기까지 마음고생이 제일 심했던 사람은 바로 줄리다.
"네.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윌리엄을 설득하느라 진땀 뺐던 걸 생각하면……."
줄리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윌리엄이 마음을 바꾼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사실 대단한 건 없었어요. 그동안 윌리엄에게 감추고 있었던 이야기를 해 줬죠."
"감추고 있었던 이야기요?"
"사실 세상을 떠난 둘째 딸은 입양해 온 아이예요. 아주 어렸을 때 데려와서 윌리엄은 입양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요."
줄리의 설명이 이어졌다.
입양한 둘째 딸이 제이스의 사업 초기 파트너의 자식이라는 사실.
그 딸이 성장하면서 약간의 정신지체가 발견되었다는 사실, 둘째 딸에게 좀 더 관심을 가지면서 생긴 윌리엄의 불만 등등, 숨겨진 이야기들을 듣고서 윌리엄이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것이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네. 일찍 털어놨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텐데 계속 미루다 보니……."
"지금이라도 오해가 풀려서 다행입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줄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수술은 잘 끝나겠죠? 만약 수술이 잘못돼서 남편과 아들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저는…… 못 견딜 것 같아요."
"이번 수술의 집도의는 일반외과 헤드 치프입니다. 실력이 가장 좋으신 분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최기석은 줄리를 다독이며 격려를 사용했다.
휘이이잉.
그의 몸에서 뿜어진 포근한 빛이 줄리를 휘감았다.
[격려 스킬을 사용하셨습니다.]
[보호자의 면역력, 재생력, 자신감이 대폭 상승합니다.]
"지금은 믿고 기다리는 게 최선이겠죠."
줄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성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푹 쉬세요. 저녁때 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최기석은 줄리와 헤어진 후 화장실을 찾았다. 차가운 물로 세수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스크럽까지 한 시간 남았다.
* * *
수술실 D 로젯 앞.
스미스를 비롯한 일반외과 스태프들이 모여 있었다.
"환자는 췌장암 2기 B형입니다. 검사결과 TNM 분류로 T3N1M0 판정을 받았습니다. 현재 암 조직은 췌장의 머리 부분에 위치했으며 이로 인해 췌장 머리 부분, 위의 유문 부분, 총담관과 담낭 및 공장의 일부까지 절제할 예정입니다."
"……."
"절제가 끝난 후 재건술이 펼쳐지며 췌장-공장 문합, 담관-공장 문합, 위장-공장 문합이 포함됩니다."
에단의 짤막한 브리핑이 끝났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최기석은 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오늘 수술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었다.
첫째로는 그가 신규 레지던트로는 처음으로 스미스의 보조를 서게 되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오늘 수술을 통해 보이지 않는 손의 디버프를 얻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수술 그 자체에 있었다.
오늘 펼치는 수술의 이름은 휘플 수술이다.
일반외과 수술 중에서도 난이도가 손가락 안에 드는 힘든 수술.
스미스의 휘플 수술을 직접 도우며 동영상으로 남길 수 있다는 건 커다란 재산이라 볼 수 있다.
"다들 잘 들었지?"
잠자코 있던 스미스가 스태프를 마주 보고 섰다.
"네."
"잘 들었습니다."
"수술은 대략 일곱 시간 정도 걸리고, 전이를 추가로 발견하면 더 늦어질 수도 있다."
"……."
"힘들다고 처치를 대충하거나 정신 놓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네!"
"우리에겐 단순한 일곱 시간이지만 환자에게는 이 시간에 평생이 걸려 있다."
스미스가 한마디 덧붙이고 스크럽에 나섰다.
벅. 벅. 벅. 벅.
솔 문지르는 소리가 경쾌하게 퍼졌다.
'디버프도 끝났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겠지?'
최기석은 소독하면서 곁에 있는 에단을 곁눈질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스태프들이 일제히 로젯으로 들어갔다.
집도의 헤드 치프 스미스.
제1보조 펠로우 토드.
제2보조 레지던트 에단.
제3보조 레지던트 최기석.
특별 어시스트 인턴 조세.
휘플 수술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