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190화 (189/407)

변수 (5)

제니퍼가 자신만만하게 말해 준 야구 재미있게 보는 팁.

그것은 응원하는 팀을 정하는 것이었다.

"뭐야. 그 김빠지는 얼굴은?"

제니퍼는 실망한 최기석을 보고 팔짱을 꼈다.

"뭔가 대단한 걸 줄 알았거든."

"원래 사소한 팁이 위대한 법이야. 그러니까 미스터 최도 빨리 응원 팀을 정해. 우리 클리닉이 미네소타에 있으니까 홈팀인 미네소타를 응원하는 게 어때?"

"그러지 뭐."

최기석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문득 마운드에서 배트를 휘두르는 한 선수가 눈에 띄었다.

놀랍게도 선수는 아시아계다.

그러고 보니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한국 야구선수들이 제법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제니퍼. 저 선수 이름 알아?"

"아, 병호 강? 맞아! 저 선수가 한국 출신이지!"

제니퍼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잘 됐다. 병호 강 소속이 미네소타니까 더 경기 보는 재미가 있겠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네."

최기석은 타격 연습 중인 강병호를 응시했다.

낯선 땅, 다른 인종.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에서 자신이 겹쳐졌다.

"미네소타 라이언스는 어떤 팀이야?"

"후후후. 미스터 최가 드디어 관심을 갖기 시작했네? 미네소타는 한마디로 꼴찌 팀이야. 작년 시즌에는 승보다 패가 많았어."

제니퍼가 말하던 도중 두 손을 활짝 펼쳤다.

"그건 무슨 뜻인데?"

"작년 시즌에 100패를 넘게 했다고. 사람들은 미네소타를 ICBP라고 불러. It can't be possible, 미네소타가 잘나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소리지."

"어쩐지……."

최기석은 관중석을 살펴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홈구장임에도 불구하고 미네소타 응원석은 제법 자리가 비었다. 선입견 때문인지 팬들의 응원에서 열기가 잘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우리 둘 다 응원 열심히 해야겠는데?"

"우리?"

제니퍼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미스터 최. 미안하지만 우리 둘은 함께할 수 없어. 사실 난 시카고 블랙삭스 팬이야."

"이…… 이럴 수가……."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메이죠에서는 동료지만 오늘 여기서만큼은 적이라는 사실!"

제니퍼의 선전포고가 가슴을 찔렀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최기석은 휴대폰으로 시카고 팀에 대해 알아보았다.

시카고의 올 시즌 성적은 상위권이다.

현재 아메리칸 리그에서 4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꼴인가?'

최기석은 쓴웃음을 지으며 마운드로 시선을 돌렸다.

1회 초, 미네소타의 공격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팡! 팡! 팡! 팡!

최기석은 응원봉을 두드리며 홈팬들의 구호를 따라했다.

제니퍼의 말이 맞았다.

응원하는 팀이 생기고 감정이입이 되자 자신도 모르게 야구에 빠져들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심판이 낭랑하게 외치며 손을 치켜들었다.

1, 2번 타자가 삼진당하고 3번 타자가 외야 아웃을 당하면서 미네소타의 공격은 허무하게 끝났다.

"미스터 최. 지금부터 지옥을 경험할 거야."

"지…… 지옥?"

"미네소타는 투수진이 약해. 특히 오늘은 에이스인 어빙이 빠져서 더 힘들 걸?"

제니퍼가 마운드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1번 타자는 번트로, 2번 타자는 깔끔한 안타로 출루에 성공했다.

비록 3번 타자가 삼진으로 물러났지만 4번 타자가 2루타를 터뜨리면서 시카고가 1점을 획득하고 만루를 만들었다.

'하아…… 피 말리네.'

최기석은 어느새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병원에서는 응급상황이 생기더라도 얼어붙은 심장으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일상에서 마음을 가다듬는 것은 쉽지 않았다.

따아아악!

장타가 터졌다.

수비수가 공을 잡았지만 3루 주자가 발 빠르게 홈으로 돌아왔다.

"잘한다! 클레인!"

제니퍼가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했고, 최기석은 처음으로 그녀가 얄밉다는 생각을 했다.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해 보자.'

최기석은 미네소타 선수들이 마운드로 등장하거나 빠져나갈 때 격려를 사용했다.

[격려 스킬 사용에 실패하셨습니다.]

연달아 실패 알람이 울렸다.

선수들과 라포가 없었던 탓인지, 그의 격려를 단순한 응원으로 생각했는지 모든 스킬이 빗나갔다.

단 한 명, 강병호를을 제외하고.

최기석이 한국말로 격려하자 강병호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미네소타에서 오직 그만이 격려 효과를 받은 것이다.

이어지는 경기.

시카고 쪽으로 흐름이 차츰 기울었다. 시카고의 투수진은 미네소타의 타자진을 단단하게 옭아맸으며 타자진은 야금야금 점수를 갉아먹었다.

5회 말 양 팀의 점수 차는 6:0.

일방적인 흐름을 보면 역전은 불가능해 보였다.

'아직 남은 게 있나?'

최기석은 두근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 특유의 울렁거림은 식스센스의 전조, 그리고 그 전조는 생생하게 말하고 있었다. 경기를 끝까지 봐야 하는 이유가 분명 있다고.

"차라리 시카고를 응원하라고 할 걸 그랬나?"

"괜찮아. 난 미네소타가 마음에 드니까."

제니퍼의 말에 최기석이 고개를 저었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사실 꼴찌 팀을 응원하는 건 힘들고 슬프거든."

"그건 그렇지만 나는 느낄 수 있어. 오늘 미네소타는 뭔가 보여 줄 거야."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전광판이 관중석을 비쳤다.

팬들은 활기차게 손과 응원도구를 흔들었다. 관중석을 차례대로 훑던 영상이 곧 최기석과 제니퍼를 비추었다. 동시에 전광판 화면 외곽이 하트 모양을 띠었다.

'이…… 이건?'

야구의 문외한인 최기석도 알 수 있었다.

지금이 바로 키스타임이라는 것을.

놀란 얼굴로 제니퍼를 응시하자 제니퍼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키스해! 키스해!"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가 따가웠다.

그런데 어색한 긴장감이 감도는 찰나, 반전이 펼쳐졌다.

카메라 앵글이 한 번 더 움직였다.

이제 전광판 속 하트에는 최기석과 켄터치 치킨 할아버지를 닮은 중년 사내가 위치했다.

스피커로 흐르는 달달한 음악.

앵글이 작정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씨…….'

최기석은 속에서 하는 욕조차 다 뱉어 내지 못했다. 켄터치 치킨 할아버지 과감히 그에게 키스를 했던 것이다.

"와하하하하!"

"최고다! 최고."

관중들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최기석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손등으로 입을 계속 훔쳤다.

이러려고 야구장에 온 것인지 자괴감이 들었다.

키스타임이 끝나고 다시 시작된 경기.

식스센스의 예감과 달리 미네소타는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오히려 점수 차만 1점 더 벌어졌다.

그렇게 찾아온 8회 초, 주자가 두 명 나가 있는 상황에서 7번 타자 강병호가 타석에 들어섰다.

팡!

후우우웅! 팡!

매서운 직구가 연달아 미트에 꽂혔다.

초구는 깔끔하게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갔고 제2구에는 헛방망이가 나갔다.

'침착하게 가자. 침착하게.'

강병호는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KBO에서 4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했다.

비록 미네소타에 와서 부상과 부진으로 마이너리그로 강등당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아직 가슴에는 그때의 자부심이 남아 있었다.

타격 자세를 잡기 전 뒤로 돌아 관중석을 응시했다.

"강병호 선수! 파이팅! 힘내세요!"

한 한국인 관중이 팔이 빠지도록 응원봉을 두드리고 있었다.

강등당한 후 처음으로 뛰는 메이저 경기라서 그럴까.

그의 응원이 뼈에 사무치도록 고마웠다.

'간다!'

배트를 손에 꼭 쥐고 타격자세를 잡았다.

쎄에에에엑.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벼락처럼 날아들었다.

강병호는 체인지업임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공의 낙폭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간의 고난과 역경을 떨쳐내듯 있는 힘껏 공을 때렸다.

빠아아아악!

통쾌한 타격음과 함께 공이 쭉쭉 뻗어나갔다.

"우와와와."

"홈런이다. 홈런!"

"병호 강! 병호 강! 병호 강!"

미네소타 팬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기립해서 강병호를 찬양했다.

그의 홈런은 가뭄 속의 비보다 달콤했다.

"제니퍼 봤어? 장외홈런이라고! 장외홈런."

최기석은 아이처럼 방방 뛰었다.

환자를 구했을 때처럼 짜릿한 흥분이 몸을 휘감았다.

강병호의 홈런으로 양 팀의 스코어는 7:3이 되었다.

이후 미네소타는 기세를 몰아 7:5까지 따라붙었으나 결국 시카고에게 패배했다. 불펜이 3점을 더 내주면서 상승세가 꺾인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내가 너무 좁게만 살았구나.'

최기석은 경기장을 나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 * *

오프가 끝나고 이틀이 지났다.

그동안 최기석은 메이죠의 스타로 거듭났다.

자살시도 환자를 구한 일로 클리닉 월간지의 표지 모델이 되었으며 월례회에서는 우수 직원 표창을 받았다.

신규 레지던트로서는 전례가 없는 일.

이제 메이죠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가 되었다.

더불어 정들었던 환자들이 하나둘 그의 곁을 떠났다. 마이크는 수술 중 각성의 후유증을 잘 이겨 내고 퇴원했으며 한국전에 참전했던 토마스도 건강히 떠났다.

"슬슬 가 볼까?"

최기석은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새롭게 시작하는 한 주,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들이 쌓여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병동에 도착했다.

드르르륵.

당직실로 들어가자 모건과 제니퍼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최기석은 두 사람과 인사를 주고받은 후 자리에 앉았다.

"너희 둘 조금 수상한데?"

"뭐가?"

"인수인계할 때만 되면 항상 나만 빼놓고 먼저 이야기하잖아."

최기석의 지적에 모건이 시선을 피했다.

활발한 제니퍼조차 대답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렸다.

"앞으로 미스터 최도 껴 줄게."

"됐거든요? 두 분이서 계속 오붓한 시간 보내세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데?"

"하여간 그런 거 아니라고."

"빨리 인수인계하자."

모건과 제니퍼가 짝짜쿵을 맞춰 화제를 돌렸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며 최기석은 피식 웃었다. 전부터 어렴풋이 눈치채고는 있었지만 오늘로써 두 사람의 관계가 확실해졌다.

"어제 새벽에 환자 두 명이 입원했는데 이 사람들 미스터 최가 맡아야 할 것 같아."

"나는 cap이 다 차서 말이지."

제니퍼의 말에 모건이 덧붙였다.

cap이란 레지던트가 주치의로서 감당하는 환자의 숫자다.

메이죠 클리닉의 최대 cap은 5명, 의진대에 비해 수가 3배가량 적은 편이다.

"오케이."

"그럼 환자 브리핑 시작할게."

제니퍼가 차분하게 인수인계에 나섰다.

최기석은 중요한 것들을 메모하며 새 환자들에 대한 치료 계획을 구상했다.

이윽고 10분에 걸친 인수인계가 끝났다.

제니퍼는 병동을 떠났고 최기석과 모건은 회의 준비를 위해 의국으로 향했다.

"두 사람 다 잘 있었어?

복도 맞은편에서 마주친 에단이 손을 흔들었다.

"오프 때 잘 쉬셨나 보네요. 얼굴이 훨씬 밝아 보여요."

"나도 그런 것 같아. 그동안 제대로 못 쉬어 쌓인 게 많았나 봐."

최기석의 말에 에단이 환하게 웃었다.

그동안 보였던 어두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예전의 활기찬 모습을 되찾았다.

최기석은 뒤늦게 떠오르는 게 있어 그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예상대로 스미스의 디버프인 보이지 않는 손이 사라졌다.

디버프 지속시간이 이미 끝났기에.

'설마 이건!'

에단의 상태창을 살피던 중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에단에게 암흑 인장이 생겼다.

분명 예전에 살폈을 때는 없었던 아이템이거늘…….

딱!

고민하던 최기석은 이내 손가락을 튕겼다.

드디어 찾았다.

암흑 인장을 얻을 수 있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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