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189화 (188/407)

변수 (4)

[그걸 어떻게 아세요? 맞아요. 거즈 한 장이 안 보여요.]

"잘라 낸 비장 쪽을 한번 보실래요. 지혈 중에 한 장이 빠진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통화가 끝난 후 최기석과 레온이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

이윽고 제1보조가 포셉을 치켜들자 피와 식염수에 찌든 거즈가 나타났다.

레온의 말대로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최기석은 놀란 토끼눈으로 레온을 바라봤다.

"아까 말했죠?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이게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과잉기억 증후군을 앓고 있어요."

레온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과잉기억 증후군.

이것은 본인에게 일어난 사건을 전부 기억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을 가진 사람은 몇 년 전, 아니 수십 년 전에 일어난 일마저 생생하게 기억한다.

"놀랍네요. 과잉기억 증후군을 가진 분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그것도 메이죠 클리닉에서."

"다들 그렇게 말하죠."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더 물어봐도 될까요?"

"그럼요."

"레온의 능력은 과잉기억 증후군보다는 서번트 증후군에 가깝지 않나요? 기억력이 초능력자 뺨치는 수준인데."

"날카로운 지적이네요. 비유하자면 과잉기억 증후군은 자서전이고 서번트 증후군은 복사기죠. 하지만 저는 이 능력을 개발해서 서번트 증후군처럼 쓰고 있어요."

"……."

"뭔가를 기억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거기에 내 감정을 싣는 거죠. 방금 전 수술을 예로 들면……."

"본인이 직접 수술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군요. 그러면 자서전적인 기억을 만들 수 있으니까."

"빙고!"

레온이 손가락을 튕겼다.

"미스터 최는 이해력이 빠르네요. 보통 사람들은 설명해 줘도 이해를 잘 못하던데."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미스터 최, 혹시 제가 부러운가요?"

레온이 화제를 돌렸다.

"이건 섣불리 대답할 문제가 아닌 것 같군요."

"왜죠? 이 능력을 사용하면 탁월한 성취를 할 수 있어요. 미스터 최는 모르겠지만 작년 레지던트 공채 수석은 나였어요."

"하지만 레온 입으로 아까 말했잖아요. 과잉기억 증후군은 축복이자 저주라고."

최기석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레온이 본인의 능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음을.

실제로 화제가 과잉기억증후군으로 넘어가면서 그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역시 미스터 최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네요. 이 질문을 하면 백이면 백, 나를 부러워하거든요."

"……."

"그래요. 어쩌면 그래서 미스터 최한테 끌리는 건지 모르겠네요."

레온이 뜻 모를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공은 정했어요?"

"흉부외과에 갈 생각입니다."

"흐음……. 그럼 외과 로테이션을 할 테니 언젠가 볼 수 있겠군요. 그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죠."

레온이 먼저 참관용 수술실을 떠났고 최기석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레온의 강렬한 인상이 아직 뇌리에 선명했다.

다시 펼쳐질 그와의 인연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흘러갈까.

지이이잉.

콜폰의 진동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최기석은 번호 확인한 후 통화를 연결했다.

"네, 교수님."

[최 선생, 지금 바빠요?]

"아닙니다. 방금 막 수술 참관이 끝나서 점심 먹으려던 참입니다."

[그거 반가운 소리네요. 그러면 콜?]

송명진의 장난스런 말투에 최기석은 피식 웃었다.

그는 비밀 제안을 할 때만 유독 이렇게 귀여웠다.

"네. 기숙사 주방에서 뵙겠습니다."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기숙사를 찾았다. 그리고 방 한구석에 숨겨둔 상자를 펼쳤다.

상자 안에는 매운 라면과 즉석밥이 잔뜩 들었다.

얼마 전 공수를 받았기에 아껴 먹으면 한 달은 너끈하게 보낼 수 있었다.

라면과 밥을 챙겨 주방에서 조리를 시작했다.

팔팔 끓는 물에 스프를 넣자 특유의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꿀꺽.

최기석은 마른침을 삼켰다.

라면이 이렇게 귀하고 맛있는 음식인지 한국에서는 미처 알지 못했다.

"벌써 끓이고 있어요?"

때마침 송명진이 주방으로 들어왔다.

"교수님. 오셨어요?"

"최 선생은 일 봐요. 난 밥하고 김치를 준비할 테니까."

송명진이 즉석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냉장고에서 총각김치를 꺼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대화조차 잊은 채 식사에 나섰다.

후르르릅. 아삭.

면발 넘기는 소리와 총각김치 씹는 소리가 주방에 퍼졌다.

두 사람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맺혀갔다.

"아흐으으. 잘 먹었다."

송명진이 웃으며 냄비를 내려다보았다.

라면국물에 밥을 말아서 싹싹 먹어 치웠다.

냄비는 설거지가 필요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최 선생 덕분에 입이 호강하는데요? 메이죠 클리닉에서 라면을 먹게 될 줄이야."

"운이 좋았습니다."

최기석은 수저를 내려놓으며 쩝쩝 입맛을 다셨다.

식사가 끝냈지만 어쩐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이 허전함은 어떻게 채워야 할까.

"교수님. 간식 드시겠습니까?"

"간식?"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돌아온 최기석의 손에는 또 라면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 그건 너무 사치 아닌가요? 차라리 편의점에서 다른 걸 사먹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송명진이 그의 의도를 읽고 우려를 표했다.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최 선생, 뜻대로 해요."

송명진이 고개를 돌렸다.

마치 공포영화 속 끔찍한 장면을 못 본 척하듯이.

퍽! 퍽! 퍽! 퍽!

최기석은 라면봉지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팔꿈치로 찍었다.

팔꿈치 끝에서 조각나는 라면의 감촉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일용할 양식이 간식으로 변하는 순간,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과감하게 물리쳤다.

적당히 라면을 부순 후 봉지를 뜯어 스프를 뿌렸다.

"교수님. 드세요."

최기석의 말에 송명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드드득. 와드드득.

라면 부서지는 소리가 식욕을 자극했다.

최기석도 송명진을 따라 라면 조각을 입에 넣었다.

짭짤하고 매콤한 스프맛과 바삭거리는 식감이 일품이다.

"……."

"……."

최기석과 송명진은 서로를 보며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라면 과자를 먹길 잘했다는데 공감한 것이다.

"허허. 먹는데 정신이 팔려서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도 못했네요."

"특별히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암. 있지요."

송명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칭찬 좀 하려고요. 얼마 전 자살시도 환자 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헤드 치프 회의 때 스미스에게 들었는데 복강경 충수 절제술까지 집도했다면서요?"

"아. 네."

"최 선생은 보면 볼수록 대단해요. 각종 사건의 중심에 있는 것도, 그 사건을 무사히 해결하는 것도 말이에요."

최근 최기석이 겪은 두 가지 사건은 레지던트 초년 차가 극복하기 힘든 일이다.

자살시도 환자를 구하는 일이 어디 쉬운가.

경찰과 구급대원, 병원 스태프들이 진이 빠지게 설득해야 환자가 살아날까 말까다. 그런데 최기석은 수갑을 이용해 환자를 단시간에 그것도 무사히 생환시켰다.

그뿐만이 아니다.

누구에게 배운 적 없는 복강경 수술까지 성공시켰다.

의진대에 이어서 메이죠에서도 범상치 않은 행보를 이어 가는 셈이다.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니라 최 선생이 과하게 활약하고 있는 겁니다. 동기들하고 최 선생을 비교하면 금방 답이 나오죠."

송명진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이럴 때 일수록 정신 똑바로 차려요. 평가라는 건 한 번에 뒤집힐 수 있으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여자친구와는 잘 지내고 있죠?"

송명진이 화제를 돌렸다.

"네. 자주 연락하고 지냅니다. 오늘 오전에도 통화했고요."

"흠흠…… 눈치 없이 연애사에 껴든다고 생각하지 말고 잘 들어둬요. 여자친구 이름이 설화 씨였나요?"

"맞습니다. 정설화입니다."

"최 선생은 설화 씨 놓치면 안 돼요. 최 선생을 돕고 싶어서 전공으로 순환기내과를 선택했고 이렇게 외국에 나와서도 최 선생을 기다려주고 있잖아요."

"……."

"앞으로 이만한 사람 다시 못 날 겁니다. 그러니까 평생 함께할 사람이라 생각해요."

"안 그래도 결혼까지 생각 중입니다."

"그러면 다행이고요."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송명진이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했고 오랜만에 색다른 숙제를 내볼까요?"

"저는 좋습니다."

최기석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메이죠에 입성한 후 송명진의 케어는 의의로 줄었다.

새벽에 논문을 보내는 것 외에는 가르침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기석이 아직 흉부외과 소속이 아니었기 때문이지만.

"자. 내 숙제는 이겁니다."

송명진이 가운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내밀었다.

"교수님. 이건?"

"왜요? 숙제가 마음에 안 들어요?"

"그게 아니라 너무 뜻밖이라서……."

최기석은 말끝을 흐리며 손에 들린 물건을 바라보았다.

송명진이 건넨 것은 야구티켓이다.

그것도 오늘 저녁 미네소타 라이언스와 시카고 블랙삭스가 맞붙는 따끈따끈한 경기다.

"놀지 않고 일만 하면 바보가 된다는 말 알죠? 그러니까 오늘은 맘 편히 놀고 와요."

"……."

"한국에서는 쉴 여유가 없어서 못 쉬었지만 메이죠는 다르잖아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럼 슬슬 뒷정리를 합시다."

설거지와 테이블 정리를 마친 후 송명진과 헤어졌다.

최기석은 방으로 들어가서 손에 들린 야구티켓 두 장을 내려다보았다.

"흐음…… 애물단지네."

* * *

그날 오후.

미네소타 라이언스의 홈구장 타켓팅 필드.

그곳으로 한 대의 차량이 들어섰다.

"먼저 내려. 난 주차하고 따라갈게."

"알았어. 플라자 앞에서 봐."

제니퍼가 밝게 웃으며 차에서 내렸고 최기석은 차를 주차한 후 플라자를 향해 걸었다.

그의 표정은 어둑한 하늘만큼 어두웠다.

사실 그는 야구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야구를 비롯해 다른 스포츠에도 흥미가 없었다.

송명진이 티켓을 주지 않았다면 수련하는 동안 야구장에 올 일은 없었다.

'나만 이런가?'

최기석은 걸으면서 주변을 훑었다.

경기장 주변에는 구단 유니폼을 입은 사람과 각종 응원도구로 무장한 사람들로 붐볐다. 몇몇 사람들은 끼리끼리 뭉쳐 오늘 시합에 대한 열띤 대화를 나눴다.

이들에게는 야구가 단순한 경기가 아닌 축제로 보였다.

문득 미국의 4대 스포츠(야구, 농구, 미식축구, 아이스하키)의 열기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스터 최!"

플라자에 도착하자 제니퍼가 힘차게 한 손을 흔들었다.

"벌써 간식까지 샀어?"

"귀한 티켓을 구해 줬는데 간식은 내가 사야지."

제니퍼가 씽긋 웃었다.

두 사람은 경기장 주변을 둘러보다가 시간에 맞춰 관람석으로 이동했다.

"미스터 최, 우리 VIP석이었어? 진작 말하지!"

제니퍼는 좌석 주변을 훑으며 아이처럼 들뜬 모습을 보였다.

VIP석은 좌석 간의 거리가 멀어 쾌적하고 선수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해서."

"아하! 이제 알겠다. 미스터 최는 야구 별로 안 좋아하는 구나."

"딱히 싫어하지도 않아."

"그게 그거잖아."

제니퍼가 멀뚱하게 서 있는 최기석을 강제로 앉혔다.

"그럼 내가 알려 줄게. 야구 재미있게 보는 법."

"야구 재미있게 보는 법? 그런 것도 있어?"

"당연하지."

제니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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