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 (2)
"뭐가 그렇게 대박인데?"
[조지환 과장님이 부 병원장이 됐고, 장 교수님이 흉부외과 과장이 됐다니까요. 요즘 의국이 뒤숭숭해서 숨도 못 쉬겠어요.]
"결국 그렇게 됐구나."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버 팀과 노우드 팀의 균형이 깨지면서 장혁필이 최후의 승자가 됐다.
예상했던 바지만 사실이 되니 느낌이 또 달랐다.
사실 그는 두 사람 다 좋아했다.
장혁필에게는 능구렁이 같은 매력이 있고, 권일수에게는 우직한 매력이 있었다.
그 둘 중 어느 쪽이 위고, 어느 쪽이 아래라고 할 수 없었다.
내심 둘 다 잘되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차가웠다.
애초부터 두 사람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었다.
"피곤하겠다. 장 과장님은 요즘 어때?"
[박용일 교수님을 포섭해서 세력을 넓히고 있어요. 조만간 과를 완전히 장악할 거 같아요.]
"장 과장님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권 교수님 쪽은?"
[권 교수님은 오전 회의도 안 들어오세요. 수술 스케줄도 대폭 줄이셨고요. 퇴직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이영호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선배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장 과장님이 권 교수님을 잡겠죠? 권 교수님은 알아주는 소아흉부외과 권위자인데.]
"아닐 걸?"
[네?]
"장 과장님이라면, 권 교수님의 자리에 다른 사람을 앉힐 거야. 장 과장님이 요리하기 편한 인물로. 굳이 기 쌔고 자기보다 연차 높은 하급자를 곁에 둘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게 되는 건가요? 저는 그냥 권 교수님이 잘 되기를 바랐는데.]
"마찬가지야."
최기석은 한숨 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권력 다툼이라는 게 그리 녹록하지 않아."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이영호가 화제를 돌렸다.
[선배는 메이죠에서 수련 잘하고 있죠?]
"물론. 여기서도 스펙터클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최기석이 자살시도 환자 구했던 이야기를 덧붙이자 이영호가 낄낄대며 웃었다.
[역시 선배는 대단해요. 조만간 동료들한테 미움 사겠는데요? 선배랑 있으면 이상하게 환자가 꼬인다고.]
"안 그래도 그게 제일 걱정이다. 하여튼 봉합 연습하는 동영상 찍어서 보내줘. 보고 나서 첨언해줄 테니까."
[네. 선배. 수고하세요.]
"그래. 너도 건강하고."
최기석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영호와 통화했더니 한국에 가고 싶어졌다.
왕복하는 시간을 계산하면 3일짜리 오프는 받아야 할 텐데, 그런 날을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산책을 끝내고 일반외과 병동을 찾았다.
환자들을 살피는데 맞은편에서 마이크의 어머니 줄리아가 다가왔다.
"선생님. 우리 마이크가 이상해요."
"마이크가요?"
"네. 오늘 아침부터 이불만 뒤집어쓰고 누워 있어요. 그 좋아하던 만화도 안 보고요. 아침은 아예 안 먹었어요."
"같이 가시죠."
최기석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안 그래도 마이크에게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다. 오프임에도 환자들을 살폈던 것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드르르륵.
"마이크, 선생님 왔어.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마이크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최기석과 인사를 나눴다.
"수술도 잘 끝냈는데 왜 그렇게 누워 있어? 선생님이 아직 선물을 안 줘서 그래?"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뭐 때문에 그런데?"
"수술 깨고 나서부터 계속 기분이 이상해요. 자꾸 수술대에 누워 있었던 때가 떠올라요. 선생님이랑 다른 선생님이 대화하던 것도 또렷이 기억나고요."
"기억나는 것 중 하나만 말해볼래?"
"선생님이 계속 저보고 괜찮다고 잘 참고 있다고 말해 줬어요."
마이크가 말을 마치고 스스로 이불을 걷었다.
잔뜩 움츠리고 있는 모습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수술 중 각성을 겪은 상당수가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경험한다.
당시의 경험이 그만큼 강렬하기 때문이다.
"근데요. 선생님. 그게 꿈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너무 무서웠어요. 선생님 말소리가 들리는데 저는 말을 할 수가 없고 몸도 안 움직였어요."
"마이크가 무서워하는 건 당연해."
최기석은 침대에 걸터앉아 마이크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수술 중 각성이 어떤 것인지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이해력이 좋은 마이크는 어느 정도 알아들은 눈치다.
"제가 경험한 게 실제로 있었던 일인 거죠?"
"그래. 드물기는 하지만 분명 있는 일이지."
최기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마이크는 수술 중 각성을 아주 잘 이겨냈어. 넌 최고라고."
"……."
최기석의 칭찬에도 마이크는 대답 없이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아직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모습이다.
'여기서 써봐야겠다.'
최기석은 상태창을 열고 폭군의 강림을 확인했다.
어제 스킬 북으로 레벨업 하면서 하위 스킬이 새롭게 생겼다.
바로 정언명령이다.
[정언명령]
- 사용 대상: 라포 3단계 이상, 환자 또는 동료에게 유익한 방향으로만 가능합니다.
- 사용 효과: 상대가 플레이어의 말을 기억하고 그 말에 커다란 영향을 받습니다.
- 지속시간: 3개월 이상.
마이크는 정언명령을 사용하기 좋은 대상이다.
이를 이용하면 마이크가 마음속 그림자를 떨쳐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이크. 잠깐 선생님 좀 볼래?"
"……네."
최기석은 정언명령을 사용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또래의 아이들 중 너처럼 용감한 아이는 없어. 수술 중 각성을 이겨낸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거든.]
"……정말요?"
[암. 당연하고말고. 그건 누가 와도 선생님이 보장할 수 있어. 그때 일이 떠올라서 힘든 건 알지만 마이크는 용감해서 잘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그렇지?]
"네!"
마이크가 밝게 웃으며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언명령: 용기가 환자에게 각인되었습니다.]
- 자신감과 위기극복능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우울증 죄책감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대폭 하락합니다. 첫 스킬 사용 보너스로 지속시간이 6개월로 연장됩니다.
'다행이네.'
최기석은 알림을 확인하고 미소 지었다.
스킬 사용한 후 마이크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이 정도면 수술 중 각성을 이겨내기에 충분하리라.
"엄마! 나 배고파!"
마이크가 그의 곁에 서 있던 줄리아를 응시했다.
"아침 생각 없다고 거른 건 너잖아."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에휴. 편의점 갔다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줄리아는 싫은 척하면서도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최기석은 마이크와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병실을 나왔다.
새로운 스킬 정언명령을 성공적으로 사용했다.
이것은 앞으로 환자의 동료의 멘탈을 관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떻게 보면 격려의 상위버전이랄까.
"미스터 최!"
돌아보니 제니퍼가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늘 오프 아니야?"
"맞아. 할 일이 없길래 잠깐 환자 보러 나왔어."
"굳이 일을 만들어서 하지 마.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푹 쉬라고."
"안 그래도 지금부터 그럴 생각이야."
"그건 그렇고 헤드 치프가 미스터 최를 보자는데?"
"며칠 안 나오실 거라고 들었는데, 벌써 복귀하셨어?"
"응. 정상 출근하고 회의도 들어가셨어."
"고마워. 바로 가 볼게."
최기석은 스미스의 집무실에 도착해서 문을 두드렸다.
노크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근처에 있었나 보지? 호출하기 무섭게 오는군."
"네. 병동에 있었습니다."
최기석은 스미스의 맞은편에 앉아서 말을 이었다.
"용무가 있어서 얼마간 자리를 비우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일은 잘 처리하셨습니까?"
"그럼. 아주 만족스러웠어."
스미스가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은 넓고 의료는 끝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할까. 내가 최고라는 자부심이 오랜만에 깨졌지. 앞으로 더 노력해야겠어.
"……."
"그건 그렇고 내가 쉬는 동안 아주 어마어마한 일을 벌였더군."
스미스가 자살환자 구한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에서 수갑으로 자살환자를 구했다는 경찰의 기사를 본 적 있습니다. 상황이 비슷해서 따라 해 봤는데 결과가 좋았습니다."
"잘못 했으면 둘 다 죽을 뻔했다는 거 알지?"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네의 용기를 칭찬했지만 내 의견은 달라. 다시는 그런 허튼짓 하지 말라고. 다른 사람을 돕는 건 좋지만, 거기에 자신의 목숨을 걸지는 마. 다시 한 번 이런 일이 생기면 내 입에서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최기석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살 환자를 구한 일로 계속 칭찬을 받았건만 스미스만은 이것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뜻밖의 반응이다.
사실 불사신 칼라일 아이템을 믿고 나섰지만, 이를 타인에게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쉽지만 답답함을 감내하는 수밖에…….
"그리고…… 어제저녁에 집도를 했다고 들었어. 충수돌기염으로 입원한 소아 환자였지?"
스미스가 날카로운 눈으로 물었다.
"네. 맞습니다. 검사 결과 응급이라고 판단하여 티칭 레지던트와 소화기 외과 과장과 통화해서 승인받았습니다."
"세미나 때문에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말이야. 솔직히 믿을 수가 없군. 개복수술이 아니라 복강경 수술을 했다고 들었는데 맞나?"
"맞습니다."
"한국에서는 레지던트 초년 차도 복강경 수술을 집도하나?"
"그건 아닙니다."
"첫 집도에 해본 적도 없는 복강경 수술을 성공 시켰다라…….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스미스가 턱을 쓸어내리며 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복강경 수술을 택한 이유를 듣고 싶군."
"검사로 천공과 복막염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항생제로 염증의 크기가 예전에 비해 줄어든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빠른 회복을 위해 복강경 수술이 좋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정말 빼닮았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를 보면 수련 시절에 내가 떠오른다고."
스미스가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나도 자네처럼 물불 안 가리고 환자를 살폈어. 후배가 뭐라고 하던, 동기가 뭐라고 하던, 선배가 뭐라고 하던지 간에 내 고집을 밀어붙였지. 하지만 말이야. 내가 계속 그렇게 생활했다면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
"답은 노."
스미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충고하는 거야.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건 바로 나라고. 환자를 소중히 여기는 건 좋지만, 환자보다 중요한 게 자기 자신이야. 알아들었나?"
"알겠습니다."
"그래. 잊지 마. 내가 있어야 비로소 환자가 있다는 걸."
스미스의 조언이 가슴에 파고들었다.
최기석은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네, 혹시 일반외과를 뜻하는 GS의 약자를 알고 있나?"
"물론입니다. GS는 General Surgery의 약자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왜……."
예상외의 질문에 최기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난 안 그래. 내 생각에 GS의 G는 General이 아니라 Great지."
"그레이트 써전 말씀이십니까?"
"바로 그 말이야. 미스터 최도 알겠지만, 일반외과는 외과 계열에서 가장 많은 환자를 수술하는 과지. 당연히 외과 중 으뜸이라고 볼 수 있어."
"……."
"혹시 그레이트 써전이 될 생각은 없나?"
스미스의 말이 은은하게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