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것 (5)
"안녕하세요."
윌리엄이 최기석에게 인사하고 줄리의 옆에 섰다.
"……."
"……."
이어지는 무거운 침묵.
윌리엄은 가족과 최기석을 한 번씩 훑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왜 갑자기 말이 없어요? 혹시 내가 들으면 안 되는 말이라도 했어요?"
"윌리엄 그게 말이다. 네 아빠가 하루라도 빨리 간이식을 받아야 한대. 그런데 나는 간염 보균자라서 이식이 안 되고 천생 네 도움을……."
"싫어요."
윌리엄이 단칼에 말을 잘랐다.
"전에도 말했죠. 난 싫다고. 내가 왜 아빠한테 간을 줘야 해요?"
"윌리엄, 말조심해. 네 아빠 앞이야."
"차라리 잘됐네요. 어차피 아버지도 알아야 할 테니까. 아버지, 저는 간이식을 도와드릴 생각이 없어요."
윌리엄의 선언에 병실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난감하네.'
최기석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자세한 속사정을 모르는 이상 가족 일에 섣부르게 껴들 수는 없다. 설령 안다고 해도 의견을 낼 수 없는 게 의사의 입장이고 말이다.
간이식은 중요한 문제다.
가족이라고 강제할 수 없다.
한국에서도 가족이 이식을 거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닥터 최. 윌리엄에게 뭐라고 한마디 해 주세요."
줄리가 애틋한 시선으로 최기석을 응시했다.
"줄리, 미안하지만 판단은 윌리엄의 몫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간이식에 대한 정보를 주는 것뿐이에요."
최기석이 말을 이었다.
간이식이 가능한지 확인하는 검사, 이식 수술의 소요시간, 공여자의 회복 기간, 발생할 수 있는 후유증 등.
설득 아닌 설명이 끝나자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들었습니다. 역시 안 하는 게 좋겠네요. 상처도 많이 남는 데다가 회복 기간도 기니까요. 아버지, 이 기회에 병원에서 천천히 치료받다가 뇌사자 이식을 받는 게 좋겠네요."
"그래.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억지로 권할 생각 없으니까."
"당신!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선생님이 하루라도 빨리 수술받으라고 했잖아요……."
"됐어. 난 이제 할 말 없어."
제이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창밖을 응시했다.
"윌리엄. 너, 나랑 이야기 좀 하자."
"그러세요."
윌리엄과 줄리가 나가면서 병실에 두 사람만 남았다.
"윌리엄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제이스를 지나치게 적대하는 것 같군요."
"그럴 수밖에요. 저 아이한테 한 짓이 있으니까."
"돌아가신 따님과 관련된 이야기입니까?"
"피곤하니까 이야기는 이쯤 합시다."
"괜한 질문 해서 죄송합니다. 편히 쉬세요."
최기석은 병실을 나와 의국으로 향했다.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당직실에서 인수인계 중이다.
맞은편에는 줄리앙이 삐딱한 자세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제대로 듣는 거 맞아?"
"물론이지."
"그럼 방금 설명한 입원환자 진단명하고 주의사항 말해 봐."
"아…… 그게…… 그러니까……."
말 더듬는 줄리앙을 보며 최기석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인수인계 하면 똑바로 들어. 그러다가 문제 생기면 어떻게 할래?"
"알았으니까 너무 까다롭게 굴지 마. 네 설명 잠깐 못 들었다고 해도 차트로 확인하면 되잖아. 내 말 틀려?"
"이야기해 줘도 안 듣는데 잘도 네 손으로 찾아보겠다."
"미스터 최. 오늘따라 너무 날카로워."
줄리앙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혹시 엠마 앞에서 여자 포스터를 네가 붙였다고 말해서 그런 거야?"
"그거랑 인수인계는 상관없어."
"아닌 것 같은데? 아닌 것 같은데?"
줄리앙의 장난스런 말투에 분노 게이지가 상승했다.
깐죽거리는 것과 말 지어내는 것은 줄리앙을 따라올 자가 없다.
예전에 에단이 했던 말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건 그렇고 미스터 최, 엠마랑 무슨 사이야?"
줄리앙이 화제를 돌렸다.
"봉합 연습 한 번 했을 뿐이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없어."
"내가 생각하는 게 뭔 줄 알고?"
"그걸 꼭 말해 줘야 아나?"
"난 24시간 환자랑 동료만 생각하는데?"
"여자 환자랑 여자 동료만 생각하는 거겠지."
최기석의 일침에 줄리앙이 배를 붙잡고 박장대소했다.
"역시 만만치 않다니까."
"쓸데없는 소리는 여기까지야. 난 먼저 퇴근한다."
최기석이 당직실을 나왔다.
오늘따라 병동 복도가 휑했다.
두 시간 전 일반외과 전공의 대부분이 다른 병원 세미나에 참석했던 탓이다.
"입이 있으면 말해 봐요. 네?"
복도를 걷던 중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스테이션으로 거리를 좁히자 데이비드와 조세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데이비드. 이건 명백한 투약 오류 아닙니까? 환자에게 주사제를 바꿔 주면 어떻게 해요!"
"그게 바쁘다 보니까……."
"바쁘면 환자를 대충 봐도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아까부터 되지도 않는 변명만 하는데. 잘못했다고, 실수했다고 하면 될 걸 이렇게 끌고 가는 이유가 뭐죠? 아직도 떳떳합니까?"
조세가 언성을 높였다.
최기석은 상황을 지켜보다가 지나가던 간호사에게 영문을 물었다.
"502병동에 칼슨 환자한테 진통제 처방이 떨어졌는데, 데이비드가 실수로 다른 주사제를 챙긴 모양이에요. 그걸 조세 선생님이 발견했고요."
"……."
"그나저나 조세 선생님 다시 봤어요. 늘 데이비드 때문에 애먹었는데 오늘은 꽉 잡고 있네요."
"동감이에요."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
스테이션을 지나던 중 조세와 눈이 마주쳤다.
최기석은 그가 잘하고 있다는 뜻으로 눈을 찡긋했고, 조세는 그 신호를 알아차렸는지 살짝 미소 지었다.
꾸르르륵.
기숙사에 도착하자 배곯는 소리가 퍼졌다.
인수인계 전까지 연달아 수술보조로 들어갔다. 참아 왔던 허기가 이제야 몰려오고 있었다.
최기석은 배를 문지르며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그런데 도중에 벽을 짚고 서 있는 엠마를 발견했다.
그녀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서 재빨리 부축했다.
"엠마, 괜찮아요?"
"미스터 최? 여기는 왜……."
엠마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물었다.
"배고파서 왔죠. 엠마도 식사 못 했어요?"
"네. 하루…… 종일 누워 있었는데…… 허기가 져서……."
다 죽어 가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자 후끈한 열감이 느껴졌다.
'역시…….'
최기석은 속으로 혀를 찼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자 독감 진단이 나왔다. 컨디션이 안 좋은 상태에서 당직을 섰던 탓이리라.
"일단 방으로 돌아가요."
"저…… 배고픈데……."
"음식은 내가 챙겨 줄 테니까 걱정 말고요."
엠마를 부축해서 해당 호실에 도착했다.
똑. 똑. 똑.
계속된 노크에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룸메이트가 오프라서 아무도 없어요."
"잘됐네요."
최기석은 엠마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이후 카페테리아에서 음식을 가져와 그녀가 먹는 것을 도와주고 병동에서 수액 세트를 챙겨왔다.
푸우우욱.
단번에 혈관을 확보하고 드롭양을 조절했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그럼 해서 안 될 것도 없잖아요? 그리고 아플 때는 수액이 최고예요. 윗년 차한테 말하고 가져온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되고."
"……."
"나중에 한 번 더 올 테니까 푹 쉬어요."
"네."
최기석은 카페테리아로 돌아가 식사를 했다. 그리고 기숙사 침대에 누워 트레이닝 룸에 입장했다.
[트레이닝 룸에 입장하셨습니다(2/3)]
[트레이닝 수술은 기계적 장 폐색증, 보조 스태프의 숙련도는 상으로 확인했습니다. 지금부터 영상을 출력합니다.]
휘이이이잉.
알림과 함께 시야가 바뀌었다.
최기석은 어느새 수술대 앞에 서 있었고, 그의 주변에는 가상의 스태프가 위치했다.
기계적 장 폐색증.
이것은 주로 과거 외과 수술을 받았던 환자에게서 나타난다.
주원인은 수술 후 수술 부위에 피부나 막들이 엉겨 붙어서 장이 막혀 버리는 것으로, 일반외과에서 응급수술이 필요한 대표적인 케이스 중 하나다.
국내에서는 유명 연예인이 위 밴드 수술의 후유증으로 장 폐색증을 앓았다.
이후 수술 도중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기도 했고 말이다.
'대체 수술을 어떻게 했길래…….'
당시를 떠올리자 분노가 치솟았지만, 얼어붙은 심장이 감정을 누그러트려 주었다.
"지금부터 장 폐색증 수술을 시작한다."
최기석의 외침에 가상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은 재빠르게 복부를 소독하고 수술 부위에 방포를 씌웠다.
"메스."
소독간호사에게 메스를 받아 환자의 복부를 갈랐다.
근막과 근층, 복막이 차례대로 갈라지고 장기가 드러났다.
'여기구나.'
그의 시선이 십이지장의 한 부분에 고정되었다.
십이지장 중간에 심한 유착이 있었다.
그로 인해 십이지장에서 심한 팽창과 괴사가 진행 중이었다.
더불어 십이지장에 대장이 꼬이는 감돈 현상까지 벌어졌다.
최기석은 우선 손으로 감돈된 부위를 풀어 주었다.
장기를 잡아당겨서 위치를 조절해 주는 처치.
처음 하는 처치지만 동영상 속 집도의를 따라 하자 어렵지 않게 성공할 수 있었다.
"메스."
소독간호사에게 메스를 받아 유착이 일어난 머리 부분과 꼬리 부분을 차례대로 잘랐다.
치이이이익.
스태프들이 썩션과 전기소작에 나서면서 출혈이 멈췄다.
"지금부터 십이지장 문합술을 시작한다."
그의 말에 제1보조가 손으로 잘려나간 십이지장의 양쪽 끝을 손으로 밀착시켰다.
"4-0 Prolene.
(비흡수성 봉합사)"
끼기기긱.
니들홀더로 봉합침을 조인 후 본격적인 문합에 나섰다.
단순 단속 봉합으로 십이지장을 한 땀 한 땀 정성껏 꿰맸다.
제1보조가 장기를 흔들림 없이 잡아 주었기에 제 실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었다.
문합 종료 후 포셉으로 문합 부위를 가볍게 눌러 주었다.
공기를 비롯해 기타 누출이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다.
다행히 문합 부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복부를 닫는 것으로 수술은 끝이다.
[기계적 장 폐색증 수술에 성공하셨습니다. 종합 랭크 B.]
휘이이잉.
알림과 함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최기석은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수술이 끝나자 안타까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연예인이 다시 떠올랐다. 더불어 그에게 수술했던 집도의에 대한 분노도 밀려왔다.
비록 트레이닝이지만 자신도 수술에 성공했다.
그런데 그 전문의라는 사람은 대체 수술을 어떻게 했단 말인가.
어쩌면 장 폐색증 수술을 하지 않은 건 아닐까.
단순히 위 밴드만 제거했다면, 그 도중에 다른 장기를 건드린 거라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지이이이잉.
갑자기 울린 콜폰이 상념을 방해했다.
"조세. 무슨 일이에요?"
[선생님, 죄송한데 잠깐 병동으로 와 주시겠어요? 마이크의 상태가 안 좋아서요.]
"마이크가 왜요?"
[열이 있는 데다가 복통을 호소하고 있어요.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바로 갑니다."
최기석은 벌떡 일어나서 병동으로 달렸다.
병실에 도착하자 마이크가 침상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고, 곁에 있는 조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선생님. 배가 너무 아파요. 죽을 것 같아요."
마이크가 최기석을 발견하고 울상을 지었다.
"괜찮아. 이제 선생님이 왔으니까."
최기석은 마이크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하필 이 타이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