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것 (3)
"최 선생님!"
건물 바깥으로 나가자 김태환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괜히 먼 곳까지 오신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뭐, 일도 잠깐 쉬고 있는데요. 잠깐만 여기 계세요."
김태환이 자리를 비웠다가 라면 박스를 들고 돌아왔다.
"저번에 제대로 못 챙겨드려서 어찌나 찝찝하던지. 그래서 오늘은 충분히 드실 만큼 챙겨 왔습니다."
"장사하셔야죠. 너무 많이 가져오신 것 같은데."
최기석은 박스 안을 살피며 혀를 찼다. 적어도 한 달은 걱정 없을 라면과 김치가 들어 있었다.
이번에는 특별히 즉석밥까지 추가가 되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침을 꼴깍 삼키시는군요"
"……역시 사장님은 못 속이겠네요."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앞으로 이만한 음식은 항상 챙겨 드리겠습니다. 대신 저희 가족이 몸이 아프면 한 번씩……."
"굳이 이렇게 안 챙겨 주셔도 진료는 해 드립니다."
"최 선생님 성격상 당연히 그러겠지만 일방적으로 받으면 저희가 불편해서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
김태환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먼 곳을 향했으며 놀란 듯 입이 쩍 벌어졌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저…… 저거 사람 아닌가요?"
김태환이 검지로 본관 옥상을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옥상 난간에 한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한 발짝만 더 디디면 추락하는 상황, 주변에서도 남자를 알아보고 우려 섞인 목소리를 냈다.
"어! 어! 떨어진다!"
"저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남자의 몸이 바람에 휘청거리자 말들이 더 많아졌다.
"슬슬 올라가 봐야겠네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네, 선생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건강하시고요."
최기석은 김태환과 헤어진 후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최상층에서 내려 비상구를 통해 옥상으로 향했다.
난간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계속 아른거렸다.
'안 되겠어.'
음식이 든 박스를 통로에 두고 계단을 질주했다.
계단을 서너 개씩 뛰어넘으니 금방 숨이 차고 몸에서 땀이 났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의사 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진리 중 하나, 골든타임.
때로는 아주 사소한 시간 차가 생과 사를 좌우한다.
벌컥!
거칠게 문을 열고 옥상으로 들어갔다.
"미스터 최?"
"경찰인 줄 알았는데."
먼저 도착한 모건과 조세가 최기석을 응시했다.
두 사람 외에도 열 명에 가까운 일반외과와 소화기내과 스태프들이 환자와 대치 중이다.
"하아…… 하아…… 하아……. 어떻게 된 거에요?"
최기석은 숨을 고르며 일행에 합류했다.
"옥상에서 스태프들이 담배 피는 거 아시죠? 그런데 누가 담배를 피우고 옥상 문을 열어 놓았나 봐요. 그사이에 저 환자가 올라와서……."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해. 환자를 위해서라도, 우리 병원을 위해서라도."
조세와 모건이 한마디씩 했다.
최기석은 상황을 듣고 난간에 서 있는 남성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남자는 췌장암 4기.
원격전이까지 일어난 상태로 암세포가 간과 복부로 전이되었다.
시한부 인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자분, 진정하고 내려오세요."
"가족분들도 생각하셔야죠."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 아닌가? 난 이제 끝났어. 몇 개월 못 살다 죽는다고!"
환자의 절규가 메아리처럼 퍼졌다.
스태프가 계속 설득에 나섰지만 환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확실히 마음을 정하지 못했을 뿐, 결심만 하면 언제든지 추락사할 위험이 있었다.
터벅. 터벅.
상황을 지켜보던 최기석이 환자에게 다가갔다.
그의 몸에서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붉은 기운이 실 가닥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폭군의 강림을 사용하셨습니다. 근력과 민첩성이 일시적으로 상승합니다. 일시적으로 환자에게 위압감을 뿜어냅니다.]
"환자분. 빨리 내려오세요. 그러다가 정말 떨어집니다."
"너…… 넌 뭐야? 가까이 오지 마."
"위험하니까 빨리 내려오라고요!"
최기석의 명령에 환자가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스태프들과 티격태격하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 최기석이 분출하는 위압감을 느낀 것이리라.
"……."
"……."
스태프들은 최기석과 환자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에 침조차 편히 삼키지 못했다.
그들 역시 최기석의 카리스마 스탯과 폭군의 강림 스킬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딱 한 번만 더 이야기합니다. 내려오세요. 답답한 게 있으면 같이 풀어야 해요."
"같이?"
"네."
최기석의 대답에 환자가 멈칫했다.
그는 난간을 넘을 듯 말 듯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풀긴 뭘 같이 풀어. 뻐킹! 어차피 죽는 건 나라고. 너희들이 뭘 해 줄 수 있는데. 엉!"
환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환자 제압에 실패하셨습니다. 절망 상태에 있는 환자를 제압할 수 없습니다.]
최기석은 알림을 확인하고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폭군의 강림이 쓸모없다면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상한 것은 상황과 달리 마음은 평온하다는 점이다.
더불어 기이한 확신마저 들었다.
저 환자를 살릴 수 있다는…….
'식스센스의 효과인가? 그렇다면 분명히 환자를 살릴 방법이 있다는 건데…….'
최기석은 잠시 뒤로 빠져 생각에 잠겼다.
지리멸렬한 대치상황 속에 상황이 커졌다.
옥상에는 경찰들이 자리 잡았고 건물 아래는 에어매트 작업이 한창 진행되었다. 사건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촬영에 나서기도 했다.
'그래. 그거라면.'
최기석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손가락을 딱 튕겼다.
언젠가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자살 기도 환자를 멋있게 구했던 경찰관의 소식을.
최기석은 경찰을 간신히 설득해 수갑을 얻었다. 그리고 수갑을 가운 주머니에 넣은 채 다시 환자에게 향했다.
"또…… 또 너야?"
환자가 미간을 찌푸렸지만 담담하게 거리를 좁혔다.
이윽고 경찰과 다른 스태프들이 도달하지 못한 거리까지 전진하는데 성공했다.
아직까지 유지 중인 폭군의 강림과 카리스마의 영항이다.
터벅. 터벅.
최기석은 거침없이 더 걸어서 환자의 코앞에 섰다.
이제 팔만 뻗으면 환자와 닿을 수 있었다.
"닥터! 위험합니다. 물러나세요."
"환자가 닥터를 붙잡고 떨어질 수 있어요."
지켜보고 있던 경찰이 한마디씩 했지만 최기석은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어.'
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한 뒤 결심을 굳혔다.
어차피 그에겐 불사신 칼라일이 있다. 혹시나 문제가 생긴다면 아이템이 자신을 지켜 주리라.
"환자분. 정말 죽을 생각은 없으시죠? 살길이 막막해서 충동적으로 올라온 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환자가 성질내며 말을 이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죽어야 해. 방법이 없어."
"위로가 안 될 거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가족분들을 다시 생각해 보세요. 이런 식으로 세상을 떠나면 가족들이 얼마나 슬퍼하겠습니까?"
"그건……."
환자가 머뭇거리는 사이 최기석의 두 눈이 번쩍거렸다.
휘리리릭. 찰칵!
최기석은 가운에서 수갑을 꺼내 환자의 한쪽 팔목에 채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
환자는 물론이요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까지 놀라 몸을 들썩거렸다.
"지…… 지금 뭐…… 뭐하는 거야?"
"정 죽고 싶으면 저랑 같이 죽으시죠."
"너 미쳤어?"
"네. 미쳤습니다. 계속 죽으려고 하는 환자분 때문에 미쳤다고요."
최기석이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외로운 싸움은 이제 그만두세요. 환자분 말대로 어차피 죽을 거라면, 그 전까지 좋은 추억을 만들고 편히 눈 감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
"알고 계셨죠? 그래서 지금까지 뛰어내리지 못했던 거 아닙니까?"
최기석의 말에 환자가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나…… 나보고 대체 어쩌라는 거야."
"난간 바깥으로 나오면 됩니다. 그리고 그건 환자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힘든 일이 아니에요. 아주 조금만 몸을 움직이면 됩니다."
"……아. 진짜."
최기석은 갈등하는 환자를 타일러 난간 넘는 것을 도왔다.
드디어 상황 종료.
환자의 안위가 확보된 순간 경찰과 스태프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찰칵!
두 사람을 이어 주던 수갑이 풀렸다.
환자는 스트레쳐카에 실려 사라졌고 몇몇 경찰들과 스태프가 최기석 주변에 자리 잡았다.
"미스터 최, 괜찮아요?"
조세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조금 힘드네. 잠깐 앉아 있을게."
최기석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폭군의 강림을 장시간 유지했던 탓인지 진이 빠졌다.
사지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용기가 대단하군. 어떻게 하면 그 환자에게 수갑 채울 생각을 했지? 혹시라도 잘못 됐으면……."
모건이 말끝을 흐렸다.
"하면 될 것 같더라고. 한국에서 비슷한 내용의 기사를 봤거든. 그때는 의사가 아니라 경찰이 주인공이었지만."
"못 당하겠어. 미스터 최는."
"지금이라도 알았으니까 다행이네."
최기석은 모건이 내민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문득 올려다 본 하늘이 호수처럼 푸르렀다.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수술 스크럽을 끝내고 병동으로 향했다.
"닥터 최. 자살하려는 환자를 구했다면서요?"
"수갑까지 채우면서 막았다던데. 정말 멋있어요."
스테이션을 지나는데 간호사들이 칭찬을 쏟아냈다. 낮에 있었던 일은 이미 클리닉 전체로 퍼진 후였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해야죠."
최기석은 머쓱한 표정으로 인사하고 의국에서 잡무를 처리했다.
일약 스타가 된 것이 기쁘지만은 않았다.
오늘 사건으로 그를 향한 스태프들의 기대치는 더욱 올라갈 것이다. 그 기준을 맞추지 못한다면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었다.
'피곤해. 사회생활이라는 건.'
그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걸렸다.
드르르륵.
문이 열려서 고개를 돌리자 조나단이 서 있었다.
"바쁜가?"
"아닙니다. 할 일은 방금 다 끝났습니다."
"그럼 잠깐 이야기 좀 하지."
최기석은 조나단과 함께 위장관외과 집무실로 향했다.
"낮에 있었던 일은 들었어. 옥상에서 자살 시도하는 환자를 구했다지?"
"그건 맞습니다만 저 말고 다른 스태프들도 고생이 많았습니다."
"겸손하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자네라고 들었는데."
조나단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메이죠 클리닉의 모토는 환자 중심이야. 만약 환자가 자살했다면 우리 병원의 이미지는 산산조각 났겠지. 환자와 직접 적인 관계가 있었던 우리 과와 소화기내과는 더 말할 것도 없고."
"……."
"자네 덕분에 오늘 일이 위기가 아니라 기회가 됐군. 메이죠의 의사가 얼마나 환자를 위하는지 증명된 셈이니까."
"과찬이십니다."
"솔직히 말이야 난 미스터 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내가 싫어하는 동기와 닮은 데가 많았거든."
"혹시 폴 교수님이십니까?"
"눈치 한번 빠르군."
조나단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늘 사건으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어. 스미스의 말이 맞아. 자네는 폴과 달라. 환자를 볼 줄 알지. 앞으로 기대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군. 조만간 오늘 일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있을 거야. 클리닉 월간지에 자네 소식이 실릴 거고."
"알겠습니다."
"내 할 말은 이제 끝났어. 컨퍼런스 룸에 가 봐. PPC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하고 싶다니까."
최기석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 집무실을 나왔다.
띠링!
[재료 아이템 조나단의 칭찬을 획득하셨습니다.]
[평판이 5로 상승했습니다.]
연달아 터지는 알림.
하이어 시스템을 향한 퍼즐 조각이 서서히 맞춰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