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것 (2)
"왜? 또 할 말 있어?"
펠로우가 최기석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게…… 사실은……."
"뭐야. 사람 불러 놓고."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최기석은 답답한 나머지 가슴을 두드렸다.
암흑 인장은 게임을 능력을 가진 그만이 볼 수 있는 아이템이다. 이것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려고 하니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오늘 일 못 본 걸로 해 달라고?"
"선생님!"
"알았어, 알았어."
엠마가 역정을 내자 펠로우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나는 그만 가볼게. 미스터 최는 할 말 정리하면 찾아오고."
"알겠습니다."
펠로우가 나가면서 당직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미스터 최. 왜 그래요? 오늘처럼 버벅거리는 건 처음 봤어요."
"휴우…… 설명하기 힘든 문제네요. 그건 그렇고 펠로우 선생님한테 메일 받으면 저한테 보내 주세요."
"미스터 최에게요?"
"엠마는 몸살 기운 있잖아요. 남의 논문 정리할 힘이 어디 있어요. 나한테 보내면 금방 처리해 줄게요."
"안 돼요. 제 일을 미스터 최에게 넘기기 싫어요."
"고집 부리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요. 대신 다음에는 엠마가 내 부탁을 들어주면 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부담 갖지 말고 보내요. 그럼 갑니다."
최기석은 인사하고 당직실을 나왔다.
'드디어 실마리를 찾았어.'
펠로우의 상태창을 떠올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아이템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문제는 재료 아이템을 어떻게 얻느냐는 건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 사이 기숙사에 도착했다.
최기석은 침대에 누워서 트레이닝 모드를 작동시켰다.
오늘 남은 입장 횟수는 2회.
일단은 전부터 벼르고 있었던 OPCAB을 해볼 계획이다.
[트레이닝 룸에 입장하셨습니다.]
[트레이닝 수술은 무심폐기 관상동맥 우회술, 보조 스태프의 숙련도는 상으로 확인했습니다. 지금부터 영상을 출력합니다.]
휘이이잉.
한바탕 광채가 쏟아진 후 풍경이 바뀌었다.
최기석은 어느새 로젯에 서 있었으며 눈앞에는 수술대, 곁에는 가상의 스태프가 있었다.
"지금부터 OPCAB을 실시한다."
그의 한마디에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제2보조는 가슴을 넓게 소독하고 방포를 씌었으며 제1보조는 전기톱과 기타 수술 도구를 준비했다.
"메스."
최기석은 칼날을 들고 환자의 목 아래에서부터 명치 부위를 내리그었다.
스으으으윽.
현실이 아님에도 피부 갈라지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피부절개가 끝난 후 제2보조가 환자에게 견인기를 끼웠다. 이어서 제1보조가 전기톱으로 흉골을 반으로 갈랐다. 그 상태에서 폐를 살짝 밀어내자 박동 중인 심장이 보였다.
"P.
S(Pericardial Stabilizer, 심외막 고정기)"
최기석의 지시에 제2보조와 제3보조가 합심해서 심외막 고정기를 환자의 가슴에 설치했다.
고정기 설치 후 심장박동이 눈에 띄게 작아졌다.
고정기가 심장의 움직임을 제한시켜 주는 덕분이다.
"션트(shunt)"
최기석은 간호사에게 받은 작은 투침을 협착된 관상동맥에 삽입했다.
혹시라도 수술 중 혈류가 막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메스."
메스를 손에 쥐고 요동치는 심장을 내려다보았다.
순간 뱃속 깊은 곳에서 감격이 솟구쳤다.
펠로우 3년 차는 되어야 해볼 법한 수술, 그것을 레지던트 1년 차인 그가 집도하고 있었다.
기적적인 상황이다.
'좋아. 가보자!'
최기석은 스스로에게 기합을 불어넣었다.
눈에 불을 켜고 이식혈관을 찾는데 상태가 좋은 좌측 내흉동맥이 금방 포착됐다.
"세컨드, 프레셔 위치 변경. 좌측 내흉동맥 부근으로."
그의 지시에 제2보조가 고정기의 프레셔를 움직였다.
프레셔로 좌측 내흉동맥을 지그시 누르자 근처의 심장박동이 작아졌다.
최기석은 좌측 내흉동맥을 길게 늘어뜨리고 메스로 동맥과 근막층을 떨어트려 나갔다.
"이런!"
심장의 움직임을 계산하지 못해 다른 혈관을 건드리고 말았다.
치이이이익.
혈관이 찢어지면서 시뻘건 피가 새어 나왔다.
제1보조와 제2보조의 재빠른 처치 덕분에 다행히 큰 사고는 벌어지지 않았다.
'바보 같은 짓을.'
최기석은 입술을 깨물었다.
일반 수술이 아니라 OPCAB 수술 중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기억해야 한다.
그동안 단련했던 CABG의 주인공이 집도의라면 OPCAB의 주인공은 심장이라는 것을.
무사히 수술을 마치려면 집도의는 매 순간 박동하는 심장의 리듬에 맞춰야 한다.
"후우우…… 하아아……."
최기석은 깊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다시 내흉동맥 박리에 나섰다.
심장박동에 발맞춰 움직이는 메스.
속도는 느렸지만 정확도만큼은 CABG에 뒤지지 않았다.
"5-0 prolene."
끼기기긱.
니들홀더로 봉합침을 조이고 본격적인 우회술에 나섰다.
새로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진행되는 OPCAB.
최기석의 온몸과 마음은 환자의 심장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CABG는 이미 도가 텄다. 그러니 심장의 리듬만 놓치지 않는다면 OPCAB에 실패할 이유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최기석은 Y 그래프트로 우회로를 만들고 등허리를 곧게 폈다.
뚜두두둑.
경쾌한 뼈 소리와 함께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해냈다.
처음 해보는 OPCAB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수술 부위는 알아서 닫아 줘."
스태프에게 명령하고 벽시계를 응시했다. 수술 자체는 만족스러웠지만 집도 시간이 조금 아쉬웠다.
OPCAB의 평균 집도 시간을 한 시간이나 넘겼다.
[OPCAB 수술에 성공하셨습니다. 종합 랭크 C.]
[트레이닝 룸에 입장하시겠습니까?
(2/3)]
띠링!
[OPCAB 수술 마스터리가 새롭게 생성되었습니다(2/5)]
'한 번 더 가자.'
최기석은 피곤함을 이기며 영상들을 훑었다.
가지고 있는 임무 중 트레이닝 룸 입장을 200회 채워야 하는 임무가 있다. 그래서 하루에 입장 가능한 횟수인 3번을 전부 소모해야 한다.
임무가 없더라도 횟수를 다 채우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하루에 3번.
일 년 동안 트레이닝 룸에 입장하면 무려 1095회의 집도 경험을 쌓을 수 있다.
그의 고속 성장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으음…….'
최기석은 연습할 수술을 고민하던 중 딱 하고 손가락 튕겼다.
OPCAB이 가능하다면 그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트레이닝 수술은 MIDCAB(최소침습 관상동맥 우회술), 보조 스태프의 숙련도는 상입니다. 지금부터 영상을 출력합니다.]
잠시 후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수술대와 환자, 거기에 더불어 수술로봇이 등장했다.
그것도 의진대에서 연습했던 바로 그 기종이다.
혹시나 했던 상황이 역시나로 변했다. 트레이닝 룸에서 로봇 수술까지 가능한 것이다.
최기석은 로봇 앞에 앉아서 페달을 밟고 핸들을 움직여 보았다.
지이이잉.
그의 조작에 맞춰 로봇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내친 김에 MIDCAB까지 가자."
최기석은 호기롭게 MIDCAB 수술에 도전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새까맣게 죽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MIDCBA 수술에 실패하셨습니다. 수술 도중 환자가 사망했습니다. 종합 랭크 F.]
* * *
다음 날 오전.
최기석은 당직의에게 인수인계를 받고 모건과 컨퍼런스 룸으로 향했다.
모건이 말을 걸었지만 대충 대답하며 들어오는 스태프들을 유심히 살폈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한 채.
'역시 또 있어.'
최기석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막 들어온 간담췌외과 펠로우가 암흑 인장을 가지고 있었다.
회의 시작 전까지 스태프들을 살피자 결론이 나왔다.
일반외과에서 암흑인장을 가진 사람은 총 열 명이다.
최기석은 수첩에 그 사람들의 이름을 적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대체 이들의 공통점이 뭘까.
인장을 가진 사람 중 두 명은 펠로우고 여덟 명은 레지던트다.
성비는 따지면 남자가 일곱 명이고, 여자는 세 명이다.
진료과로 분류하자 위장관외과가 5명, 대장관외과가 2명, 간담췌외과가 3명이다.
분석이 깊어질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무지 접점을 찾을 수 없었다.
회의가 끝나고 컨퍼런스 룸을 나오는데 모건이 다시 말을 걸었다.
"몸이 안 좋은 모양이군."
"몸은 쌩쌩한데 기분이 안 좋아. 잘 안 풀리는 문제가 있어서."
"고민거리가 있다면 잠시 내려 놔. 원래 고민은 시간이 해결해 주는 법이지."
"너답지 않은 충고인데?"
"나다운 게 어떤 거지?"
모건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그냥 알려 주면 재미없잖아? 알아서 고민해 봐."
"싱거운 대답이야."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스태프 대열에 합류했다.
스미스가 개인 사정으로 자리를 비우면서 조나단이 대신 회진을 돌았다.
'암흑 인장도 얻어야 하고 조나단한테 칭찬도 받고 평판도 올려야 되는데. 갈 길이 멀구나.'
최기석은 하이어 시스템과 연결된 미션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회진이 끝난 후 환자들을 살피고 외과 중환자실을 찾았다.
토마스는 침상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주무시는 거 아니죠?"
"아, 닥터 최. 왔어요?"
토마스가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어제 수술이 무사히 끝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몸 상태는 괜찮으시죠?"
"힘이 없는 걸 빼면 다 좋아요."
"아마 오늘 중으로 일반 병실로 돌아가실 겁니다. 이삼 일 정도 상태를 지켜보고 퇴원하실 거고요."
"퇴원이라…….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군요."
"앞으로는 특별히 몸 관리를 하셔야 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더 안 해도 충분하겠죠?"
"그럼요 이미 온몸으로 느꼈으니까."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토마스가 서랍장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건넸다.
한국전 참전으로 얻은 훈장이다.
"받아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이걸 받기에는……."
"어허. 나도 저번에 말했잖아요. 고마움의 표시라고. 이 늙은이의 말동무를 해 준 사람은 닥터 최 밖에 없어요. 어허! 빨리 받으라니까."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최기석은 훈장을 가운 주머니에 넣었다.
띠링!
NEW [레어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메달 오브 아너]
- 그곳에서 반드시 살아남아야 했다.
- 살려야 한다 스킬 레벨이 1단계 증가합니다. 메이죠 클리닉 내에서의 평판이 영구적으로 1단계 상승합니다.
"편히 쉬세요.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일 잘하고."
최기석은 중환자실을 나와 상태창을 열었다.
살려야 한다 스킬이 4단계로 상승하면서 각성 모드(각성 CPR, 각성 산과 모드, 각성 외상처치 등등)의 숙련도가 한 단계씩 올랐다.
더불어 모드의 효율이 1.5배 증가했다.
"운이 좋았구나."
웃으며 걷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하자 뜻밖의 인물이 전화를 걸었다.
"네. 안녕하세요."
[너무 늦게 전화 드려서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닙니다. 식당 일로 바쁘실 텐데요. 아내분 대상포진은 어떤 가요?"
[약 먹고 쉬었더니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시 일하겠다는 걸 말리느라 아주 힘들어 죽겠어요.]
"하하하. 조금 더 고생하세요. 아내분은 아직 쉬셔야 하니까. 병이 낫더라도 너무 무리하면 안 되는 거 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김태환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선생님 바쁘건 아는데 혹시 잠깐 밖으로 나올 수 있나요? 제가 지금 메이죠 클리닉 앞에 있는데.]
"클리닉 앞이요?"
[네. 아주 잠깐만 시간 내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