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180화 (179/407)

필요한 것 (1)

"웬디는 수업 끝내고 집에 오는 길이었어요. 집에 있었던 나는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사다 달라고 부탁했죠. 그런데 웬디가 마트 근처에서 강도를 당했어요. 미친놈들이 나타나서 웬디를……."

제이스가 고통스런 표정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다 나 때문이에요. 내가 심부름을 시키지 않았다면 웬디는 죽지 않았을 거예요."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요. 그건 제이스의 잘못이 아닙니다."

"당신이 뭘 알아! 나에 대해서, 웬디에 대해서 뭘 아냐고!"

쩌렁쩌렁한 외침이 병실을 흔들었다.

최기석은 대답 없이 차분하게 제이스를 지켜보았다.

갑자기 화를 내는 그가 밉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고통이 생생하게 전해져서 가슴이 아팠다.

딸의 죽음을 자기 탓이라 자책하는 아버지.

그가 술로 지새운 힘겨운 날들을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강도들은 웬디를 난도질하고 도망쳤어요. 칼로 수십 번을 찔렀다고요. 웬디를 병원에서 봤을 때는…… 아……."

"제이스. 됐어요. 더 말하지 마세요."

최기석이 어깨를 다독이자 제이스가 끝내 눈물을 터뜨렸다.

"미안합니다. 닥터 최한테 한풀이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의사는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환자분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도록 돕는 사람이죠. 제이스가 편해질 수 있다면 몇 번이고 화를 내도 좋습니다."

최기석은 말을 마치며 격려를 사용했다.

[격려 스킬을 사용하셨습니다.]

[환자의 면역력, 재생력, 자신감이 대폭 상승합니다.]

"고마워요. 지금은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아요."

"그랬다면 다행이네요. 아무래도 검사는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 하는 게 좋겠어요."

"네."

"그리고 한 가지 더 제안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최기석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저는 제이스가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대화를 나눠 보니 망가진 간을 치료한다고 만사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

"따님에 대한 감정들을 확실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어요."

"알겠습니다. 닥터 최의 뜻에 따를게요."

"검사가 끝날 때쯤 해서 신경정신과에 협진 요청을 하겠습니다."

최기석은 제이스를 안정시키고 병실을 나왔다.

가슴 한구석이 무거웠다.

* * *

일반외과 헤드 치프 집무실.

책상 앞에 놓여 있는 소파에 스미스와 조나단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다리를 꼰 채 편하게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들은 의대 동기이자 메이죠에서 지금까지 성장한 절친한 사이다.

"오늘 수술 어땠어?"

스미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대장암 수술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별일 없이 끝냈지."

"수술보조가 에단하고 미스터 최였나?"

"맞아."

"미스터 최는 잘하던가?"

"솔직히…… 대단해. 예전에 폴을 보는 느낌이었지. 보조하는 모습만 보면 누구도 신규 레지던트라고 생각 못 했을 거야."

조나단은 최기석에 대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전했다.

이에 스미스가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미스터 최에게 관심 있나?"

"없으면 그게 이상한 거 아닌가? 미스터 최는 인터뷰 수석인데다가 실력까지 출중해. 인성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말이야. 일반외과 전공을 하면 훌륭한 인재가 될 것 같아."

"글쎄……."

조나단이 턱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흉부외과 헤드 치프인 송이 가만있지 않을 것 같군. 한국에서 미스터 최를 데려온 게 송이라고 하던데."

"그거야 두고 봐야지. 골키퍼가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는 건 아니니까. 미스터 회유하는 일에 대한 자네 생각은 어때?"

"난 별로."

"이유는?"

"어쩐지 폴을 보는 것 같아서 꺼림칙해. 초반에 치고 나오는 인간치고 끝까지 잘 가는 인간을 본 적이 없어."

조나단의 대답에 스미스가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갑자기 왜 웃지?"

"폴과 미스터 최의 차이점을 아직 모르는군."

"차이점?"

"폴은 자기밖에 모르는 타입이지만 미스터 최는 환자를 생각하는 타입이야. 출발선이 달라."

스미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첩을 꺼낸 후 조나단에게 내밀었다.

"티칭 레지던트인 에단이 제출한 평가서야. 읽어 보라고."

"그러지."

조나단이 보고서를 훑었다.

장 폐색증 환자를 두고 소화기 내과와 다툼을 벌인 일.

병실을 돌아다니며 환자와 소통하는 일.

각종 처치와 스크럽을 깔끔하게 끝낸 일 등등.

최기석은 인성과 실력 양쪽 모두를 갖춘 전천후 레지던트다.

"어때?"

"생각보다 괜찮은 구석이 많군. 하지만 속단하기는 일러. 근무를 시작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 걸 명심해.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니까."

"쯧쯧. 그래서 자네가 내 밑에 있는 거야."

"또 잘난 척인가? 스미스 잘난 건 메이죠 의사들이 다 아는 사실이니까 그만하지?"

두 사람은 한마디씩 주고받은 후 피식 웃었다.

"그건 그렇고 얼마 전에 에단을 꾸짖었지?"

조나단이 화제를 돌렸다.

"수술 중에 실수해서 따끔하게 혼냈지."

"그 짓 좀 그만하면 안 되겠나? 자네한테 당한 것 때문에 에단이 로젯에서 제 실력 발휘를 못하더군. 오죽하면 내가 미스터 최를 제1보조로 올렸을까."

조나단의 하소연에도 스미스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내 말 듣고 있어?"

"암. 듣고 있지."

"건성건성 듣지 말고 제대로 들으란 말이야. 밑에 사람도 생각해야지."

조나단은 예전부터 스미스에게 한 가지 불만을 품었다.

그것은 바로 아래 스태프들을 훈육하는 방식이다.

스미스는 스태프가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면 독설을 퍼부었다.

의사 생활을 관두고 싶을 만큼 지독하게.

실제로 독설에 당해서 수련 생활을 그만 둔 써전이 열을 넘었다.

"내 혓바닥을 못 견딜 정도면 의사 관둬야지. 혓바닥보다 무거운 게 생명인데. 안 그래?"

"그게 자네 생각이고. 당하는 입장은 생각 안 해 봤나?"

"당연히 한 번도 안 해 봤지."

"하아……."

스미스의 뻔뻔한 대답에 조나단이 머리에 손을 얹었다.

"미스터 최 말고 다른 레지던트들은 어때?"

"나쁘지 않아. 제니퍼는 실력이 무난하고 성격이 밝다고 하더군. 모건 같은 경우 미스터 최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신규 레지던트 중에서는 실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하고."

"다른 과 레지던트 소식은 들은 거 없나?"

"아직 우리 과에 오지도 않은 사람들은 관심 없어."

스미스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내일부터 이틀간 자리를 비울 거야. 보고는 해 놨으니까 일이 생기면 자네가 잘 처리해 줘."

"또 어딜 갈 생각인가?"

"한국."

스미스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 *

K 로젯 참관실.

최기석은 혼자서 수술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용의 눈으로 수술 동영상을 촬영 중이다.

"드디어 끝났네."

수술이 끝난 것을 확인하고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오전 근무 종료 후 로젯을 돌아다니며 동영상 수집에 나섰다. 그 결과 췌장암 수술과 항문 수술, 복강경 대장암 수술을 추가했다.

최기석은 후련한 마음으로 병동을 찾았다.

기숙사에서 수련하기 전 환자들을 살피고 싶었다.

"미스터 최."

한참 환자들을 확인하는데 복도 맞은편에서 엠마가 손을 흔들었다.

"엠마는 오늘 당직이죠?"

"맞아요…… 록. 콜록."

엠마가 대답하는 도중 기침을 했다.

"혹시 감기 걸렸어요?"

"몸살 기운이 조금 있는 것 같은데,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에요."

"으음……

최기석은 엠마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아직 독감에 걸리지는 않았다.

"당직 서는 동안 틈틈이 잘 자요. 안 그러면 진짜 몸살을 앓을지 몰라요."

"걱정해 서 고마워요."

엠마가 씽긋 웃었다.

"혹시 시간 괜찮아요?"

"아, . 특별히 할 일은 없는데."

"그럼 잠깐 당직실에 와줄래요? 봉합 연습 중인데 궁금한 게 있어서……."

과연 엠마다운 부탁이라는 생각에 최기석은 웃고 말았다.

"그럼 먼저 당직실로 가요. 나도 환자들 체크하고 갈게요."

"고마워요, 미스터 최."

최기석은 병실을 다 돌고서 당직실을 찾았다.

"저번에 조언 듣고서 왼손 봉합 연습하는데 생각보다 잘 안돼요."

"한번 해 볼래요?"

"네."

엠마가 니들홀더를 왼손에 잡고 봉합에 나섰으며 최기석은 곁에서 그녀가 봉합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이상하죠?"

엠마가 풀 죽은 모습으로 물었다.

"아니요. 엄청 잘하는데요?"

"저는 위로가 아니라 지적을 받고 싶어요. 솔직하게 말해 줘요."

"사실대로 말하는 거예요, 엠마. 훌륭해요."

최기석은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그녀가 갓 연습을 시작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 보여 준 솜씨는 경이롭다. 비록 서툴고 느리더라도 단순 단속 봉합을 완벽하게 끝냈으니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은데……."

"엠마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요."

"이유?"

"엠마야말로 솔직히 말해 봐요. 왼손 연습하면서 은연중에 저랑 엠마를 비교하지 않았어요?"

"……."

"그러니까 본인이 연습하는 게 전부 미덥지 않고 신통치 않죠. 초보치고는 엄청 잘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상하다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

"생각해 보니까 미스터 최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터 최는 지금처럼 봉합하는데 얼마나 걸렸어요?"

"대충 계산해도 일 년은 넘었죠."

"그럼 난 11개월 안에 끝내야지."

엠마가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었다.

"한 가지만 더 물어볼 게요. 왼손 연습하는데 요령 같은 건 없어요?"

"요령이라……. 있기는 한데 가르쳐 주고 싶지는 않네요."

"왜요?"

"엠마가 저보다 빨리 성장할까 봐요."

"미스터 최, 나빠."

"농담이고 알려 줄게요. 가만있어 봐요."

최기석은 엠마의 등 뒤에 서서 그녀와 손을 포개고 수술 도구를 잡는 요령, 손목과 손쓰는 요령을 알려 주었다.

아무래도 말로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에.

"고마워요. 덕분에 연습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뭐. 엠마가 잘 배웠죠."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엠마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봉합을 배울 때는 최기석과 밀착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최기석의 숨결이 귀를 간지럽게 만들었다.

아직까지 맞닿은 손에서는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야릇한 흥분감이다.

"저…… 저기…… 미스터 최?"

"왜요?"

"이제 연습 끝났는데……."

엠마가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미안해요. 깜빡 잊었네요."

최기석은 포갰던 손을 놓고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

드르르륵.

문이 열리면서 어색한 분위기가 깨졌다.

"둘이 여기서 뭐해?"

위장관외과 펠로우가 두 사람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벌써부터 그렇고 그런 사이인가?"

"아…… 아니에요! 이상한 소리하지 마세요!"

"시뻘건 얼굴로 대답해 봤자 손톱만큼도 믿음이 안 간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는 봉합 연습 중이었습니다."

펠로우가 두 사람의 반응을 살피며 피식 웃었다.

"엠마. 내가 몸이 안 좋아서 그런데 자료 정리 좀 부탁해도 될까? 급한 거라서."

"무슨 자료인데요?"

"이번 주 학회에 발표할 건데……."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최기석은 펠로우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진단명은 없지만 펠로우는 심한 허리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아프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셈이다.

'설마 이건!'

최기석은 펠로우의 상태를 확인하던 중 몸을 들썩거렸다.

[암흑 인장: 환자의 사망, 집도의와 스태프의 의료실수에 관한 저항력이 생깁니다.]

그랬다.

펠로우는 암흑 인장의 소유자였다.

스미스의 인정을 받는데 꼭 필요한 재료 아이템 말이다.

"저기, 선생님!"

최기석은 대화를 마치고 나가는 펠로우를 붙잡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