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6)
들어오라고 말하자 한 여성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엠마다.
"무슨 일이에요?"
"봉합 연습 같이 하자고요. 내일은 당직이라 시간이 없거든요."
엠마가 투명한 봉투를 들어올렸다.
봉투 안에는 어른 팔뚝만 한 곰 인형과 봉합세트가 들어 있었다.
"잠시만요."
최기석이 침대에서 내려와 서랍장을 뒤적거리는 사이 엠마가 방을 훑어보았다.
벽에는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여배우들이 한가득이다.
그녀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방이 아주 화려하네요?"
"전에도 말했죠? 룸메이트가 줄리앙이라고. 내가 오기도 전에 포스터로 도배를 해 놨어요."
최기석은 쓴 웃음을 지르며 쌈지를 가운에 넣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벌컥!
문이 거칠게 열리고 줄리앙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최기석과 엠마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두 사람이 왜 여기에……."
"내가 봉합 연습하자고 미스터 최를 불렀어요."
"미스터 최, 진짜야?"
"그럼 가짜겠어?"
최기석이 가운에 넣어 두었던 쌈지를 꺼내 보여 주자 줄리앙이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크으으윽. 아쉽다. 당직만 아니면 같이 가는 건데!"
"어쩔 수 없네."
최기석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포스터 좀 치우자. 엠마도 정신 산만하다고 하잖아."
"미스터 최, 꿈이라도 꿨어? 포스터를 붙인 건 너잖아. 왜 나한테 뒤집어씌워?"
줄리앙이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하! 엠마 앞에서 취향이 들키니까 부끄러웠나 보구나? 이해한다, 이해해."
"이해하긴 뭘 이해해. 내가 들어오기도 전에 다 네가 붙여 놓고선."
"또, 또 시치미 뗀다. 솔직하지 못하기는."
줄리앙의 적반하장에 최기석은 혀를 내둘렀다.
엠마 앞이라서 몸을 사리는 건 정작 본인이면서.
"엠마도 잘 알죠? 원래 얌전해 보이는 사람이 더 밝힌다는 거. 미스터 최가 딱 그런 스타일이에요. 서로 처음 본 날 제 앞에서 막 이런 짓도 했다니까요."
줄리앙이 포스터 속 여배우의 엉덩이 만지는 시늉을 했다. 이에 엠마가 최기석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설마 저 말을 믿는 건 아니죠?"
"듣다 보니까 이상하게 설득력이 느껴지는데요?"
"미스터 최.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야. 더 이상 거짓말하지 말라고. 그럼 난 이만."
줄리앙이 외과 매뉴얼을 챙겨서 방을 떠났다.
"우리도 가요."
"……네."
최기석은 쓰린 속을 안고 휴게실로 향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봉합 연습 세팅에 들어갔다.
"우선 서로의 봉합을 봐주기로 해요. 내가 먼저 할까요?"
"그러세요."
최기석의 대답에 엠마가 니들홀더를 쥐고 무릎에 놓은 곰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이어지는 봉합술.
엠마는 단순 단속 봉합, 연속 봉합, 매트리스 봉합 등을 차례대로 펼쳤다.
손놀림은 빠르고 정확했고 봉합의 결과물도 훌륭했다.
레지던트 2년 차라고는 믿기지 않는 수준, 괜히 취미를 봉합이라고 말한 게 아니었다.
찰칵!
봉합사를 자르는 것으로 봉합이 끝났다.
"어…… 어땠어요?"
최기석이 엄지를 치켜 올리며 말을 이었다.
"동기나 수련의 중에서는 엠마를 따라올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요?"
"거기까지는 모르겠고, 예전부터 봉합 잘한다는 칭찬은 많이 받았어요. 성형외과 선생님들은 전공을 성형외과로 바꾸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했고요."
"그럴 만해요."
최기석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살핀 결과 엠마의 외과적 처치 레벨은 4다.
봉합이 취미라서 그런지 봉합에 관련된 스킬을 두 가지나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레지던트 2년 차라는 걸 감안하면 탁월한 성취다.
"이제 미스터 최의 솜씨를 보고 싶은데."
"안 그래도 손이 근질근질했어요."
끼기기긱.
니들홀더를 쥐고 무릎으로 인형을 고정시켰다.
적당히 수준을 맞춰 줘? 아니면 제 실력을 보여 줘?
최기석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인형에 바늘침을 꽂았다.
이후 맞은편 부위까지 운침하고 봉합사를 적당한 힘으로 잡아당겼다.
실이 팽팽해짐과 동시에 그의 마음도 팽팽해졌다.
휘리리릭.
재빠르게 엄지 매듭을 짓고 가위로 봉합사를 잘랐다.
시작되는 쇼 타임.
최기석은 번개처럼 각종 봉합술을 펼쳤다.
그것도 묘기를 부려가면서 말이다.
단순 단속 봉합은 Z자를 그려 완성했으며 연속 봉합은 육각형의 형태를 띠었다.
그 밖에 다른 봉합에서도 화려한 테크닉이 펼쳐졌다.
최기석은 봉합하면서 스스로의 솜씨에 놀랐다. 그저 봉합을 변형시켜 보자고 마음먹었을 뿐인데 그것들이 실제로 손끝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난 양손잡이야 스킬이 레벨업 한 것이 영향을 끼치는 듯 했다.
최기석은 봉합의 절반은 오른손으로, 나머지 절반은 왼손으로 처리하며 쇼를 마무리했다.
"……미스터 최. 사람 맞아요?"
엠마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까지 봉합이 아니라 마술을 본 것 같았다. 놀란 마음을 추스르려고 했지만 인형에 생긴 봉합자국들을 본 순간 다시 한 번 놀랐다.
이건 꿈이 아니라 진짜다.
"이제 믿겠죠? 나도 취미가 봉합이라는 걸."
"이쯤 되면 취미가 아니라 인생이 봉합 아닌가요?"
엠마의 농담에 최기석은 피식 웃었다.
"뭐, 완전히 아니라고는 못하겠네요. 하지만 봉합이 수술에 전부는 아니잖아요. 해부학적인 지식도 있고 수술 방법도 이해해야 하고 경험도 쌓아야 하고. 아직 갈 길이 멀죠."
"그래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예요. 미스터 최는 이제 막 일반외과 수련을 시작했는데."
엠마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미스터 최 생각에 내 문제점은 뭐가 같아요?"
"으음…… 왼손을 쓸 때 처치가 조금 느려져요. 그것만 보완하면 훨씬 좋아질 거예요."
"왼손이라…… 알겠어요."
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두 사람은 마주 앉아서 개인 연습에 몰두했다.
대화는 완전히 끊겼으며 니들홀더 조이는 소리와 봉합사 자르는 소리만 흘렀다.
'엠마도 보통이 아니구나.'
최기석은 봉합을 잠시 중단하고 엠마를 응시했다.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갓 들어온 신입이 그녀보다 월등한 봉합 솜씨를 보여 주었다. 그럼에도 자존심 상해 하거나 분해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부족한 부분을 묻고 배우려는 자세를 보였다.
그녀의 남다른 마음가짐에 솔직히 감탄했다.
"저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네, 뭐든지요."
"엠마는 왜 흉부외과 전공을 택했죠?"
"아, 그거요."
엠마가 봉합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흉부외과에는 여의사가 별로 없잖아요. 내로라하는 명의도 없고요. 그래서 제가 돼 보려고요. 흉부외과 최고의 여의사."
"푸후훗."
"미스터 최! 또 웃기에요!"
엠마가 팔짱을 낀 채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진지하게 물어봐서 진지한 게 대답한 거잖아요. 자꾸 이러면 나 아무 말도 안 해요?"
"아…… 미안해요. 말을 듣고 나니까 갑자기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서."
"누구요?"
"엠마랑 비슷한 친구가 있거든요. 그 친구는 세계 최고의 흉부외과 의사가 꿈이래요."
"멋진 친구네요. 제가 응원한다고 전해 주세요."
엠마의 말에 최기석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보면 볼수록 그녀가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다소 허무맹랑한 포부부터 의술에 대한 열정까지 말이다.
"엠마 혹시 아직도 저를 못 믿겠어요?"
최기석이 화제를 돌렸다.
"뭐를요? 취미가 봉합인 건 확실히 알았는데."
"그거 말고 포스터요. 포스터."
"아……."
최기석의 말에 엠마가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아까는 그냥 장난 친 거예요. 그런 포스터는 누가 봐도 줄리앙이 붙인 거잖아요."
"역시 우린 통한다니까."
짝!
두 사람이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이제 슬슬 들어가요. 시간도 늦었고."
"그러죠."
주변 정리를 마치고 휴게실을 나왔다.
대화를 나누며 걷다보니 계단이 보였다.
위 층 계단은 여자기숙사로 아래층 계단은 남자기숙사로 이어졌다.
"미스터 최.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앞으로도 자주 도와줄 거죠?"
"시간이 맞으면 언제든지요."
"푹 쉬어요."
엠마가 손을 흔들며 계단에 올랐고 최기석도 작별인사를 하며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무의식중으로 고개를 치켜들어 엠마를 올려다보았다.
"……!"
치마 사이로 속옷이 보였다.
섹시한 이미지와는 다른 귀엽고 깜찍한 속옷이.
'하긴 나를 닮았으면 남자 경험이 거의 없을 건데…… 바보. 무슨 생각을!'
찰싹.
최기석은 볼을 두드리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 * *
컨퍼런스 룸, 일반외과의 오전 회의가 진행 중이다.
"입원환자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최기석은 우렁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환자 마이크, 나이는 9세로 충수돌기염으로 이틀 전 입원했습니다. 검사상 충수의 괴사 및 염증이 관찰됐습니다. 어제부로 배액관으로 고름을 전부 배출했으며 현재 경과 관찰 중입니다."
"바이탈은 문제없지?"
위장관 외과 과장 조나단이 물었습니다.
"네.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그럼 며칠 더 두고 보자고. 염증이 가라앉아야 막창자에서 충수돌기를 분리하기 쉬우니까."
"다음은 환자는 어제 입원한 제이스입니다. 제이스는 45세로 혼수상태로 구급차에 실려 왔습니다. 입원 당시 복수로 배가 부풀어 올랐으며……."
최기석의 설명이 끝나자 간담췌외과의들이 술렁거렸다.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간이식 케이스가 드물었기에.
"복부 초음파, 조직검사 CT 촬영 결과부터 봐야겠군. 결과 나오는 대로 나한테 콜하도록."
"알겠습니다."
"입원환자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최기석에 이어 제니퍼가 브리핑에 나섰다.
잠시 후 회의와 회진이 끝나고 일과가 시작되었다.
'이 정도면…….'
최기석은 시간을 확인하고 토마스의 병실을 찾았다.
토마스는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은 채 기도 중이다.
"보고 있었나요?"
기도를 끝낸 그가 최기석을 응시하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네. 오늘이 수술 날이잖아요. 혹시라도 힘이 될까 해서 왔습니다."
"당연히 힘이 되죠. 고마워요."
토마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런 말하면 우스울지 모르지만 한국전에 참전할 때처럼 가슴이 떨리는군요. 이런 기분 참 오랜만이에요."
"수술이 염려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제아무리 위인에 용감한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죠."
"그런가요?"
토마스가 환자복 주머니에 넣어 둔 훈장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수술이 무사히 끝나면 이걸 닥터 최에게 주고 싶어요."
"훈장은 어르신의 자랑거리 아닙니까? 제가 받을 물건이 아닙니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중요한 건 훈장이 아니라 당시의 경험이니까. 게다가 닥터 최가 그동안 신경을 많이 써 줬는데 특별히 줄 것도 없고."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요. 그러니까 늙은이 부탁 들어주는 셈 치고 받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전 볼일이 있어서 그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있다가 봅시다."
토마스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띠링!
[아이템 재료, 환자의 진실한 미소를 획득하셨습니다.]
[환자의 진실한 미소(1/2)]
최기석은 알림을 확인하고 바쁘게 걸었다.
수술실 K 로젯에 도착하자 스태프들이 이미 모여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지?"
조나단이 최기석을 노려보았다.
"죄송합니다. 환자와 대화가 길어져서."
"다시 한 번 늦으면 내 수술 스크럽은 못 서. 알았나?"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마지막 브리핑을 시작한다."
조나단이 설명을 이었다.
오늘의 첫 수술은 대장암 수술로 개복술을 통해 암 조직을 절제한다.
집도의는 대장관외과 과장 조나단.
제1보조는 에단.
제2보조는 최기석.
제3보조는 인턴 조세다.
박! 박! 박!
브리핑이 끝나고 스태프들이 일제히 스크럽에 나섰다.
'과장님의 칭찬을 받으면 된다 이거지?'
최기석의 시선이 조나단에게 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