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5)
"하이어 시스템으로 올려 보낼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딱 잘라 말했다.
지금까지 지켜본 수련 레지던트 중 그의 기준을 충족시킨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교수들이 추천한 이들조차 말이다.
"어설픈 놈을 조기 진급시켜 놓으면 우리 일반외과에 먹칠만 할 뿐이야."
스미스가 최기석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하이어 시스템을 이용하고 싶은가 보군."
"네, 맞습니다."
"당돌해."
스미스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최기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 봐."
"교수님은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하이어 시스템을 쓰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땅한 사람이 되면 조기 진급을 시켜 주시는 겁니까?"
"물론. 난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아. 하지만 가능할까?"
"불가능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최기석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대답했다.
기 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았다.
상급자를 대접하는 것과 의사로서 자존심을 세우는 일은 다른 영역이다.
"혹시 기억력이 나쁜가? 그동안 하이어 시스템을 이용한 수련의가 없다고 말했는데 말이야."
"역시 쓸 만한 수련의가 없었나 봅니다."
최기석이 스미스가 했던 말을 받아치자 스미스가 배를 잡고 웃었다.
"이런 패기, 정말 오랜만이군. 더군다나 병원에 들어온 지 일주일도 안 된 레지던트가 말이야."
"……."
"그래.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봐."
스미스가 말을 마친 순간 알람이 울렸다.
띠링!
[신규 임무, '스미스의 인정을 받아라'를 획득하셨습니다.]
[임무완성 조건: 스미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을 달성해야 합니다. 재료아이템을 얻고 일부 스탯을 상승시켜야 합니다.]
[암흑 인장: 0/1]
[평판 4단계까지 상승: 현재 수치 2/5]
[조나단의 칭찬: 0/1]
[환자의 진실한 미소: 0/2]
[임무 완수 시 하이어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으며 유니크 젬을 지급합니다.]
'이건 또 뭐야?'
최기석은 임무를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요구조건이 이렇게 많은 임무는 처음 봤다. 척 봐도 난이도가 만만치 않았다.
"왜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나?"
"아…… 아닙니다. 잠깐 생각난 게 있어서."
"더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 봐. 나랑 독대할 기회는 많지 않으니까."
스미스가 손에 턱을 괬다.
"폴 교수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합니다."
"폴이라…… 그러고 보니 미스터 최가 오늘 폴의 위암 수술에 들어갔지?"
"네. 맞습니다."
"수술 어땠지? 본대로만 말해 봐."
"그게…… 으음……."
최기석은 스미스의 시선을 피하며 머뭇거렸다.
느낀 그대로를 이야기하면 레지던트인 그가 교수를 험담하는 모양새가 된다. 그렇다고 교수의 수술이 완벽했다고 말하면 그것도 거짓말이다.
지금은 어떤 대답도 곤란할 뿐이다.
"말 안 해도 돼. 대충 알 것 같으니까."
스미스가 됐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폴은 말이야. 써전이 어떤 식으로 망가지는지 보여 주는 좋은 본보기다."
스미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스미스와 폴은 동기다.
일반외과 레지던트를 할 때만 해도 폴은 압도적인 실력으로 스미스를 앞질렀다. 어떤 수술 스크럽도 척척 해냈으며 웬만한 수술은 직접 집도했다.
그런데 펠로우 기간에 문제가 터졌다.
폴이 집도한 환자가 수술 중에 죽고 만 것이다.
정신적 충격을 받은 폴은 자신감을 잃고 실수를 연발했으며 점점 실력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끝내 그때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채 난이도 낮은 수술만 하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지. 천재라고 입을 모았던 녀석이 한순간에 무너졌으니까."
"……."
"미스터 최도 앞으로 주의하도록. 한 번 삐끗하면 돌아오지 못하는 게 써전이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최기석은 스미스와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집무실을 나왔다.
"휴우……."
복도를 걸으며 뻣뻣한 몸을 풀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나치게 긴장했던 모양이다.
'다시 볼까?'
최기석은 상태창을 띄워 놓고 새로운 임무를 재차 살폈다.
임무 완수 조건 네 개 중 세 개는 이해했다.
미국으로 오면서 초기화된 평판을 다시 올리고, 환자의 진심 어린 미소를 받고, 대장관외과 과장인 조나단에게 칭찬을 받으면 된다.
문제는 암흑 인장이다.
이걸 대체 어떻게 얻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생각이 깊어지는 사이 스테이션에 도착했다.
스테이션 앞에 간경변으로 막 입원한 환자 제이스의 가족들이 서 있었다.
"입원 설명은 다 들으셨나요?"
"아, 네. 간호사분이 너무 친절하게 말씀해 주셨어요."
환자의 아내가 데이비드를 가리켰다.
"입원이 처음인데 당연히 그래야죠. 앞으로도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라도 찾아 주세요."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고 최기석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데이비드를 응시했다.
데이비드의 친절은 오로지 백인에만 국한된다.
백인 이외의 인종이 입원하면 틱틱거리기 일쑤다.
"괜찮으시면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그럼요."
최기석은 간경변 환자의 가족들과 근처 벤치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제이스 아내의 이름은 줄리, 아들의 이름은 윌리엄이다.
집안 형편은 좋았는데 제이스가 젊었을 때 사업으로 재산을 많이 불렸다고 한다.
"남편분께서 원래 술을 많이 드셨습니까?"
"네. 원체 술을 좋아하는 데다가 비즈니스 때문에 마셔야 하는 경우도 있어서요. 그리고……."
줄리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2년 전부터 음주가 더 심해졌어요. 둘째 딸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거든요. 그때부터는 아예 술병을 껴안고 살았죠."
"……."
"남편이 망가진 건 결과적으로 내 잘못이에요. 술 마시는 걸 말리지 못했으니까."
줄리가 한숨 쉬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게 왜 엄마 탓이야. 술을 계속 퍼마신 건 아빠잖아. 게다가 술 마시는 걸 말리면 엄마를……."
"윌리엄.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꾸나."
"하지만……."
줄리의 시선을 느낀 윌리엄이 입을 다물었다.
"선생님. 우리 남편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오늘은 일단 경과를 관찰하고 내일부터 본격적인 검사를 받을 겁니다. 자세한 검사 결과를 살펴봐야겠지만 간이식 수술이 필요할 듯싶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는 거죠?"
"네. 아마 그럴 겁니다."
"선생님. 그런데 간이식 수술을 하려면 누군가가 간을 기증해야 하지 않나요?"
윌리엄이 대화에 껴들었다.
"뇌사자에게 받거나 또는 가족이나 친척들이 기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엄마, 분명히 말하는데 난 아빠한테 간 못 줘!"
"윌리엄! 그게 무슨 소리니! 네 아빠야!"
"주정뱅이한테 간 줘 봤자 어차피 또 술만 퍼마실 거라고."
언성이 올라가자 주변 환자들의 시선이 쏠렸다.
"두 분 다 진정하세요."
최기석은 간신히 모자를 말렸다.
"벌써부터 이런 일로 다툴 필요 없습니다. 검사 결과도 확인해야 하고 의식을 차린 환자분의 이야기도 들어 봐야 해요. 아셨습니까?"
"……."
"일단 머리 식히고 환자에게 필요한 물건 챙겨서 다시 오세요."
"알겠습니다."
"네."
줄리와 윌리엄이 병동을 떠났다.
최기석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제이스의 병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인사불성이던 제이스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뚝. 뚝. 뚝.
손등에서 피가 떨어졌다.
본인 손으로 수액줄을 떼 버린 것이다.
"여…… 여긴 어디지?"
제이스가 초점 없는 눈빛으로 물었다.
"메이죠 클리닉입니다. 환자분은 의식을 잃고 구급차에 실려 왔습니다."
"하긴 그렇게 마셔 댔으니."
"환자분. 수액 다시 놓아 드릴 테니 얌전히 누워 계세요. 지금은 휴식이 필요합니다."
"휴식? 다 필요 없으니까 술 가져 와. 한 잔만 더 마시면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부탁은 들어줄 수 없습니다."
"이 새끼가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제이스가 성질을 부리며 서랍 위에 놓인 물건들을 손으로 쓸어버렸다. 목걸이와 시계, 휴대폰 등이 와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에 같은 병실의 환자 두 명이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빨리 술 가져와. 조용히 있어 줄 테니까. 못하겠어? 그럼 내가 사오지 뭐."
제이스가 침상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위태로웠다.
"고집 부리지 말고 누우세요."
최기석은 서둘러 제이스를 부축하고 침대에 눕혔다. 하지만 제이스는 그때마다 욕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닥터 최. 무슨 일이에요?"
지나가던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환자 상태가 안 좋아요. 구속대하고 아티반 원 앰플 챙겨 주세요."
"네."
이윽고 데이비드를 포함한 세 명의 간호사가 와서 제이스의 팔다리를 묶었다.
난리를 치던 제이스는 아티반을 투여한 지 삼십 분이 지나서야 잠잠해졌다.
"난장판을 만들어 놨네, 난장판을."
데이비드가 얼굴을 구기며 침상 근처를 응시했다.
제이스의 개인물품들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었다.
"환자한테 수액 다시 달아 주세요. 특이 사항 있으면 바로 연락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소매로 이마의 맺힌 땀을 훔치며 병실을 나왔다. 그러던 중 문 앞에 떨어진 목걸이를 발견했다.
목걸이는 투박했으며 여기저기 상처투성이다.
목걸이를 주워서 케이스를 열자 조그만 사진이 보였다.
이십 대쯤으로 보이는 여성이 세상을 다 가진듯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최기석은 목걸이를 챙겨 당직실로 향했다.
* * *
그날 저녁.
최기석은 기숙사 침대에 누워서 손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남들이 보면 잠꼬대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트레이닝 룸에서 수련 중이다.
"5-0 prolene."
끼기기기긱.
최기석은 니들홀더로 봉합침을 조이다가 얼굴을 구겼다.
가상의 소독간호사가 이상한 봉합사를 건넸다. 봉합사의 종류뿐만 아니라 실의 굵기도 잘못됐다.
"이거 말고, 이거. 오케이?"
최기석이 필요한 봉합사를 가리키자 그제야 간호사가 제대로 된 봉합사를 건넸다.
이어지는 CABG 수술.
가장 자신 있는 수술임에도 속도가 느렸다.
트레이닝 룸에 입장하기 전 수술 스태프의 숙련도를 하로 택했던 탓이다. 가상의 스태프가 어설픈 처치를 하거나 출혈을 만드는 바람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최기석은 고군분투 끝에 집도를 마쳤다.
[CABG 수술에 성공하셨습니다. 종합 랭크 B.]
[CABG 수술 마스터리가 1단계 상승했습니다(4/5)]
[난 양손잡이야 스킬이 3단계가 되었습니다.]
[트레이닝 룸에 입장 가능합니다(2/3)]
알림이 쏟아진 후 시야가 돌아왔다.
'다음부터 스태프 숙련도를 낮추면 사람도 아니다.'
최기석은 CABG 수술을 돌이키며 이를 갈았다.
가상 스태프들이 실수할 때마다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실수를 커버했기에 망정이지 아니라면 환자는 수술대에서 죽었으리라.
'잠깐, 그러고 보니 OPCAB(무심폐기 관상동맥 우회술)도 가능하잖아!'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OPCAB은 연습이 불가능한 수술이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심장이 뛰고 있는 상태에서 집도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런 상황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레이닝 모드라면 OPCAB도 가능하다.
요동치는 심장 속에서의 봉합.
OPCAB 연습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똑. 똑. 똑.
트레이닝 룸에 입장하려는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