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4)
"계속 웃을 거예요?"
엠마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더 이상 웃었다가는 유혈사태가 벌어질지 모르는 법, 최기석은 심호흡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미안해요, 엠마. 사과할게요."
"실컷 다 웃고 난 다음에요? 됐어요! 괜히 사람 바보로 만들고."
"내 말 좀 들어봐요. 사실 내가 웃은 건 엠마랑 제 취미가 같아서예요."
"네?"
"내 취미도 봉합이라고요."
최기석은 피식 웃으며 설명에 나섰다.
인터뷰를 치렀던 날에 있었던 헤프닝을 말이다.
당시 그는 취미를 봉합이라 말하고 면접관들 앞에서 직접 봉합을 시연했다.
"푸후후훗."
삐쳐 있던 엠마가 그제야 웃음을 되찾았다.
"미스터 최가 저보다 한 수 위네요. 어떻게 인터뷰 볼 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사실이니까요."
최기석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국에서 인턴할 때부터 니들홀더를 손에 놓아 본 적이 없어요. 헛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요."
"아니에요. 미스터 최는 정말 그랬을 것 같아요."
엠마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괜찮으면 시간 맞춰서 봉합 연습해요. 배울 게 많은 것 같아요. 동양인 분들은 젓가락을 써서 손놀림이 아주 좋다면서요?"
"케이스 바이 케이스지만 대체적으로 좋은 편일 걸요?"
"그럼 약속한 거예요?"
"네."
최기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엠마를 응시했다.
문득 그녀가 자신과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미가 봉합일 정도로 의료실력을 키우는데 관심이 있는, 속된 말로 의료바보라고 할까.
"미스터 최. 혹시 줄리앙이라는 사람 알아요?"
엠마가 화제를 돌렸다.
"내 룸메이트예요."
"그 사람 원래 아무한테나 치근덕거리는 스타일인가요? 회진 끝나고 나서 계속 쓸데없는 말을 걸어서."
"엠마가 마음에 들었나 보죠."
"전 그런 스타일 별로예요. 말만 많고 정작 실속은 없잖아요."
"그럼 어떤 남자가 좋은데요?"
"자기 일 열심히 하고 주변에서 인정받는 사람이요. 듬직하고 믿음이 가는 같은 사람?"
"으음…… 그럼 줄리앙은 탈락이네요."
"미스터 최는 어떤 타입의 여자를 좋아해요?"
"저는 한국에 애인이 있어요. 제가 하는 일은 다 믿어 주고 응원해 주는 고마운 사람이에요."
"부럽다. 나도 그런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
엠마가 손을 만지작거리다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말해도 막상 남자친구가 생기면 제대로 못 만날 것 같아요. 일이 워낙 바쁜데다가 남는 시간에는 논문 보고 공부도 해야 해서……."
"너무 단정 짓지 말아요. 저도 엠마랑 같은 생각이었다가 교제를 시작했으니까.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법입니다."
"……그래도 줄리앙은 싫어요."
"아, 네."
최기석은 속으로 줄리앙의 연정에 명복을 빌었다.
벌컥!
문이 열리고 에단이 휴게실로 들어왔다.
에단은 두 사람의 인사를 대충 고갯짓으로 받고 최기석의 옆자리에 앉았다.
평소답지 않은 어두운 모습이다.
"에단. 무슨 일 있어요?"
"있었지. 그것도 아주 끔찍한 일이."
에단이 입술을 깨물며 천장을 응시했다.
방금 전 끝난 담낭암 수술 건으로 스미스에게 박살이 났다.
[넌 외과의를 할 자격이 없어. 의사 대신 베이비시터나 알아보라고.]
[그동안 대체 뭘 배웠지? 그 실력으로 밑에 있는 레지던트를 가르칠 수나 있겠어? 차라리 인턴부터 다시 시작해라.]
모욕적인 말들이 폭풍처럼 그를 덮쳤다.
이후 도무지 마음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솔직히 수술 중에 실수를 하긴 했어. 그렇다고 끔찍한 인격모독을 당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헤드 치프라는 사람이 어쩜 그럴 수 있지?"
"일단 한잔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최기석은 에단에게 캔 커피를 내밀며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디버프 보이지 않는 손에 걸렸습니다.]
- 자괴감, 분노, 짜증 등의 부정적인 감정으로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 체력과 외과처치, 내과처치 수치가 소폭 감소합니다.
- 지속시간은 7일입니다.
'이런…….'
최기석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스미스가 가진 특별한 디버프, 보이지 않는 손.
에단이 그것에 걸리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이런 디버프 스킬을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 순간 당황했다.
"에단이 억울한 건 알지만 그래도 참아야 해요. 스미스 헤드 치프 성격 알잖아요."
"하아…… 알긴 알지만…… 그래도."
"기운 차려요. 이런 모습 에단답지 않아요."
최기석은 에단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격려를 사용했다.
[격려 스킬 사용에 실패하셨습니다. 디버프에 걸린 대상에게 격려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나답지 않다고? 그럼 나다운 게 뭐지?"
에단이 얼굴을 구기며 최기석을 노려보았다.
마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에단.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미안. 미스터 최에게 화를 낼 건 아닌데. 갈게."
에단이 나가면서 휴게실 분위가 싸늘해졌다.
"미스터 최도 헤드 치프 조심해요. 독설이 아주 심한 분이에요. 잘못 걸리면 의사 생활을 하기 싫어질 테니까."
"……."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수련의들 사이에서 일반외과는 무덤이에요."
"무덤이요?"
"수련의들의 중도 포기가 가장 많은 과가 바로 일반외과예요."
최기석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충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손에 걸리면 감정이 흔들리고 외과처치 레벨까지 떨어진다.
만약 그 상태에서 또 실수를 하면 다시 보이지 않는 손이 중첩될 테고 결국 수련을 관두는 일이 생기리라.
'생각보다 무시무시한 사람이군.'
최기석은 스미스를 떠올리며 쓴 웃음을 지었다.
"슬슬 일어날까요?"
"그래요."
두 사람은 휴게실을 빠져나와 병동으로 향했다.
엠마는 할 일이 있다며 회의실로 들어갔고, 최기석은 병동을 돌며 환자를 살폈다.
"마이크. 뭐하니?"
"그냥 가만히 있어요."
"하루 종일 누워 있으니까 심심하지?"
"네, 너무 힘들어요. 이야기할 사람도 없고."
마이크가 병실을 훑으며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가 있는 병실은 4인실이지만 환자들은 전부 어른이다.
"어머니께 만화 보여 달라는 말은 했어?"
"네. 오늘 일 끝나면 태블릿에 담아 오신댔어요. 근데 그때까지 버티다가 죽을 것 같아요."
"네 맘 이해한다. 그래도 조금만 참아."
최기석은 드레싱 카트를 챙겨 병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이크의 옆구리에 꽂혀 있던 배액관을 제거했다.
"이제 좀 살 것 같지?"
"네!"
"움직일 수 있다고 해서 너무 무리하면 안 된다."
최기석은 마이크에게 주의를 주고 바깥으로 나왔다.
때마침 맞은편에서 제니퍼가 다가왔다.
"미스터 최. 나 지금 헤드 치프 보러 가야 되거든? 미안한데 응급실 환자 한 명만 봐 줄래?"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그런데 헤드 치프는 왜?"
"오늘부터 신입 레지던트 개인 면담한대. 나 다음이 미스터 최야."
갑작스런 면담 소식이 달갑지 않았다.
에단이 디버프에 당한 것을 똑똑히 지켜봤던 탓이다.
"알았어. 책잡히지 말고 잘 끝내."
"오케이."
제니퍼가 웃으며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최기석은 그길로 응급실을 찾았다. 환자는 인사불성이 된 채 침상에 누워 있었으며 그 곁에서 가족과 소화기내과의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분인가요?"
최기석이 소화기내과의에게 말을 걸었다.
"네. 알콜성 간경변 환자인데 상태가 썩 좋지 않아요. 저거 하나만 봐도 알겠죠?"
소화기내과의의 검지가 환자의 배를 가리켰다.
남자 환자의 배가 임산부처럼 볼록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복수가 찬 것이다.
"세균감염이나 복막염일 가능성은 없나요?"
"네. 간경변 때문에 복수가 찬 거예요. 검사 결과 간 기능이 완전히 바닥까지 떨어졌어요. 아마도 간이식 수술을 받아야하지 않을까 싶은데."
"잠시만요."
최기석은 검사 결과를 살핀 후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환자의 상태를 재차 확인했다.
소화기내과의의 말이 맞았다.
환자는 간경변 후기로 내과적인 처치로는 완치가 불가능했다.
"선생님. 우리 아버지는 살 수 있는 겁니까?"
"죽을병에 걸리 건 아니죠?"
환자 가족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추가 검사가 끝난 후에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선 기본적인 처치를 끝내고 입원 수속 밟겠습니다."
"천자 도와줄까요?"
"그러면 고맙죠."
이윽고 소화기내과의가 처치 도구를 챙겨서 그의 곁에 섰다.
최기석은 환자에게 폴리 카테터를 꼽아 소변을 뺀 후 본격적인 천자에 나섰다.
우선 환자의 상의를 들춘 후 펜으로 천자할 부위를 표시했다.
스으으윽.
천자 부위를 소독한 후 방포를 덮었다.
"실린더 받아요."
최기석은 내과의가 건넨 주사기를 받아 바늘을 수직으로 세웠다. 그리고 거침없이 주사기로 복부를 찔렀다.
푸우우욱.
손끝에 복막이 뚫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그 상태에서 주사기 몸통을 살짝 당기자 복수가 딸려 나왔다.
복수 천자는 성공적이다.
최기석은 카테터에 정맥수액용 튜브와 복수를 채집하는 백을 연결했다.
이에 복수가 튜브를 타고 백으로 떨어졌다.
"같이 병동으로 올라가시죠."
최기석은 침상을 끌며 환자 가족들과 병동으로 향했다. 이후 스테이션에 있는 간호사들에게 입원 수속을 부탁하고 당직실로 들어갔다.
타다다다닥.
입원 오더를 입력하는 중 제니퍼가 안으로 들어왔다.
"미스터 최. 면담 끝났어."
"어땠어?"
"생각보다 별거 없던데? 병원 생활 어떠냐고 물어보더니 이것저것 조언해 주셨어. 의외로 성격이 부드러우신 것 같아."
제니퍼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응급실 환자는?"
"간경변 말기야. 간이식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아."
"아침에 간이식 수술 케이스 발표했더니 간이식 수술 환자를 받았네?"
"그러게.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주제를 잡을걸."
그의 농담에 제니퍼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이 환자는 내가 맡을게. 전달사항은 없으니까 간다."
최기석은 복도 끝에 있는 스미스의 집무실을 찾았다.
"휴우……."
문 앞에 서자 부담감이 몰려왔다.
제니퍼야 스미스의 진면목을 몰라서 편히 면담을 했을지 모르지만 최기석은 입장이 달랐다.
만약 면담 중에 보이지 않는 손에 걸린다면?
상상도 하기 싫었다.
똑. 똑. 똑.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거기 앉아."
스미스가 맞은편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마치 탐색전을 벌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병원 생활은 어때?"
"특별히 불편한 건 없고 열심히 적응 중입니다."
"그거 다행이군."
스미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오전에 있었던 케이스 발표는 상당히 인상 깊었어. 복강경 간이식 수술이라니……. 솔직히 한국에서 거기까지 해낼 줄은 몰랐어."
"아. 네. 조만간 해외 학술지에도 발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암. 당연한 일이야."
짧은 대화 끝에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혹시 질문 있나?"
"하이어 시스템에 대해 여쭤 보고 싶습니다. 일반외과는 조기 승급자를 어떤 식으로 뽑는지 궁금합니다."
"하이어 시스템?"
스미스가 콧방귀를 꼈다.
"에단에게 못 들었나 보지?"
"……."
"내가 헤드 치프가 된 이후로 일반외과에 하이어 시스템은 없어. 제아무리 잘난 수련의들도 수련기간을 꽉 채워서 나갔지?"
스미스의 말이 머리를 강타했다.
하이어 시스템으로 수련 과정을 줄이려는 목표가 흔들리고 있었다.
"하이어 시스템을 부정하시는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이유야 간단하지. 그건 말이야……."
스미스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