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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175화 (174/407)

경쟁 (3)

최기석은 본격적인 수술에 앞서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다른 스태프들을 살폈다.

조세와 엠마는 연차를 상회하는 스탯을 보유했다.

문제는 집도의인 폴이다.

그의 체력은 3으로 낮았다.

그뿐만 아니라 레벨 9였던 외과적 수치가 6으로 다운되어 있었다. 이상하다 싶어서 스탯을 꼼꼼히 살피던 중 낯선 칭호를 발견했다.

[RUSTED MAN]

- 녹슨 마음, 녹슨 손이 예전과 같을 리 없지. 과거의 영광에 취한 자에게 미래가 있을까.

- 외과적 처치 레벨이 대폭 하락합니다.

최기석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실력이라는 것은 영원불멸의 수치가 아니다. 본인의 노력에 따라 상승할 수도 있고 떨어질 수도 있다.

폴은 후자에 속했다.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외과의로서 노력하지 않아서 레벨이 떨어진 셈이다.

'긴장해야겠는데?'

최기석은 마음을 날카롭게 벼리었다.

폴의 외과 레벨은 그와 똑같았다.

즉, 폴은 스태프가 믿고 기댈 수 있는 집도의가 아니라는 소리다.

"지금부터 위암 수술을 시작한다."

폴의 외침이 로젯에 퍼졌다.

최기석은 포비돈 솜으로 환자의 복부를 넓게 소독하고 방포를 씌었다.

"메스."

부우우우욱.

날카로운 칼날이 환자의 복부를 갈랐다.

피부와 근막, 근육층, 복막이 차례대로 갈라지면서 수술 부위인 위가 나타났다.

폴은 얼굴을 찌푸리며 환자의 장기들을 차근차근 살폈다.

혹시라도 모를 전이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함이다.

"특별한 문제는 없고 계획대로 하면 되겠어."

"교수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폴의 중얼거림에 엠마가 한마디 보탰다.

"메스."

폴이 위와 십이지장이 이어진 부분을 잘랐고 최기석이 재빠르게 석션에 나섰다.

"지금부터 림프절 절제술을 시작한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도록!"

"네."

폴의 지시에 수술실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림프절은 전신에 분포하는 면역기관으로 이곳에 암세포가 생기면 암세포가 림프절을 통해 다른 장기로 퍼져 나갔다.

암세포가 있는 림프절을 제대로 제거하지 못한다면?

다른 장기로 암이 전이되는 불상사가 생긴다.

[용의 눈을 사용하셨습니다. 줌 인 모드로 특정 부위를 상세하게 관찰합니다.]

최기석은 눈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채 림프절을 응시했다.

제거해야 할 림프절은 D1과 D2 림프절.

위의 소만 부위와 대만 부위에 위치했다.

"스크래퍼."

폴이 긁개로 소만 부위에 붙은 림프절을 떼어 냈다.

본격적인 처치의 시작.

엠마가 폴의 림프절 제거 작업을 도왔으며 최기석은 간단한 처치를 하며 관찰에 집중했다.

처치는 순조로웠다.

소독간호사가 관리하는 드레싱 카트 위로 암 조직에 침범당한 림프절이 쌓여 갔다.

"D-2 림프절은 전부 떼어 냈군. 오랜만에 집도하니까 온몸이 쑤시는데?"

폴이 한숨 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등 뒤에 있던 간호사가 거즈로 그의 땀을 닦아 주었다.

"그럼 D1 림프절로 넘어가 볼까? 스크래퍼."

폴이 긁개를 손에 쥐는 순간 최기석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교수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소만부 하단에 있는 림프절 박리를 잊으신 것 같습니다. 한 번 더 살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최기석은 폴의 실수를 에둘러 지적했다.

과거에는 환자를 생각해서 직설적인 어법을 사용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정치력이 올라간 후 환자뿐 아니라 의사 간의 관계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그 말은 내가 실수했다는 뜻인가?"

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그리고 미스터 최. 만약 내가 실수했다고 쳐. 그렇다고 해도 이제 막 병원에 들어온 자네가 어떻게 내 실수를 알아차릴 수 있지?"

"교수님. 미스터 최의 말은……."

"엠마는 빠져 있어!"

폴이 언성을 높였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로젯, 스태프의 시선이 최기석에게 집중되었다.

과연 그는 이 위기를 어떻게 넘길 것인가.

"교수님과 저 사이에 언어적인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해?"

"네. 저는 교수님이 실수했다고 이야기한 게 아니고 분명 할 일을 잠시 잊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엠마."

최기석의 시선이 엠마를 향했다.

"엠마도 분명히 봤죠?"

"뭐를요?"

"교수님이 처치를 하려고 이쪽 림프절에 긁개를 올려놓았던 모습을 말입니다."

최기석은 검지로 소만부 하단에 림프절을 가리켰다.

"이건……."

"이쪽까지 전이가?"

폴과 엠마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최기석이 가리킨 곳에는 암이 번진 림프절이 있었다.

그곳은 써전의 시야가 닿기 힘든 부위이자 위에 살짝 눌려서 발견하기 더더욱 어려운 장소다.

"교수님.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작업이 어려울 것 같아서 일단 미뤄 두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군."

폴은 당황한 기색을 지우며 최기석을 응시했다.

'뭐지? 대체 이 녀석은?'

D2 림프절을 완벽히 제거했다고 생각했건만 최기석이 숨어 있던 암 전이 림프절을 발견했다.

메이죠에 들어온 지 일주일도 안 되는 파릇파릇한 레지던트가 말이다.

자신의 실수를 우회적으로 지적했다는 사실 또한 놀라웠다.

빠드드득.

폴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동기이자 라이벌이었던 스미스와 최기석이 겹쳐 보였다.

"나머지 림프절도 제거하지. 스크래퍼."

폴이 긁개로 D1 림프절을 떼어 냈다.

이어서 위의 3분의 2를 들어내는 위아전 절제술이 실행되었다.

남은 것은 수술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빌로스 2형 수술.

위 공장 문합술이다.

최기석은 제2보조의 역할을 수행하며 폴의 봉합을 유심히 지켜봤다.

그의 봉합 솜씨는 놀라웠다.

불행하게도 나쁜 쪽으로 말이다.

운침할 때부터 애를 먹었으며 매듭짓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안 그래도 체력이 낮았는데 수술 도중 체력이 더 떨어졌다.

떨어진 체력으로 외과처치 레벨은 5로 주저앉았다.

최기석보다 못한 수준이 된 것이다.

엠마의 서포트가 든든하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다.

엠마는 폴이 운침에 애를 먹을 때, 결찰한 부위가 신통치 않을 때마다 활약했다.

'답답해 죽겠네.'

최기석은 혼자서 벙어리 냉가슴 앓이를 했다.

마음 같아서는 폴과 자리를 바꾼 후 직접 집도하고 싶을 정도다.

"휴우…… 이제야 끝났군."

폴이 한숨 쉬며 시계를 응시했다.

'끝나긴 뭘 끝나.'

최기석은 한마디 쏘아 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수술의 마지막 단계인 빌로스 2까지 끝내는데 다섯 시간이 걸렸다.

그가 교수라는 점, 앞으로 봉합을 확인하고 복부를 닫아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집도가 너무 느리다.

"식염수."

폴이 소독간호사에게 식염수를 받아 수술 부위에 흘렸다.

주르르륵.

봉합한 틈새로 식염수가 희미하게 흘렀다.

"빌어먹을. 봉합은 완벽했는데. 메스."

폴이 똥 씹은 표정으로 메스를 쥐었고 최기석은 입술을 깨물며 폴을 응시했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늘어난 수술 시간은 고스란히 환자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추가적인 처치 중 사고가 또 터지지 말란 보장도 없었다.

최기석은 상태창을 열고 보관 중인 버프를 응시했다.

[대가의 수술: 수술 중 지혈, 봉합, 절제를 할 경우 환자의 경과가 2배 호전됩니다.]

의진대 레지던트 시절 낙상 환자를 구하고 얻은 버프다.

아쉽지만 버프를 보내 줄 때가 됐다.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든 환자를 돕고 구할 수 있다면 제 몫을 다하는 것이기에.

휘이이이잉.

버프를 사용하자 폴의 몸에서 최기석만 볼 수 있는 광채가 뿜어졌다.

끼기기긱. 찰칵.

폴이 봉합술 재정비에 나섰다.

봉합 솜씨가 나아진 것은 아니었건만 이어진 최종 식염수 테스트를 무난히 통과했다.

순전히 버프 덕분이다.

복부까지 닫으면서 길고 험난했던 수술의 막이 내렸다.

"다들 고생했어. 나는 볼일이 있어서 먼저 나가지."

폴이 스태프를 독려하고 로젯 입구로 향했다.

위이이잉.

"아직 내 솜씨는 죽지 않았군."

문이 닫히기 전 들린 폴의 혼잣말에 최기석은 혀를 찼다.

저 인간이 뭐래?

* * *

폴은 본인의 두 손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번 수술은 위암 수술 중에서도 난이도가 높은 편에 속했다.

힘든 수술을 잘 끝내자 뿌듯함이 밀려왔다.

터벅. 터벅.

폴은 그대로 K 로젯 참관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스미스의 수술을 지켜보았다.

스미스는 담낭암 환자를 수술 중이다.

스미스의 환자는 담낭암 3기.

암세포는 담낭과 림프절을 비롯해 인접한 대장 일부 조직에까지 전이가 되었다. 수술 난이도는 그가 막 끝낸 위암 수술보다 2배가량 높았다.

'제발 실패해라. 제발!'

두 손 모아 간절하게 빌었다.

탄탄대로를 걷는 스미스의 의사 생활에 조금이라도 균열이 가기를 바랐다.

미세한 틈이라도 생겨야 그가 일반외과 헤드 치프를 노려볼 수 있기에.

폴은 가슴 졸이며 수술을 보다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수술은 완벽했다.

담낭과 간, 림프절의 절제는 흠잡을 데가 없었고 암 조직으로 자른 대장도 성공적으로 이어 붙였다.

그야말로 몬스터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집도다.

"빌어먹을!"

쿵!

폴은 앞에 놓인 벤치를 걷어차고 참관실을 떠났다.

반드시 방법을 찾아내리라.

스미스를 헤드 치프에서 끌어내릴.

* * *

일반외과 휴게실.

최기석은 엠마와 커피를 마시며 대화중이다.

"미스터 최. 아까 진짜 놀랐어요."

"뭐가요?"

"숨어 있던 D2 림프절 찾은 거요. 그 각도에서 그게 보였어요?"

"사실 한국에서 인턴할 때 비슷한 케이스를 접했거든요. 그래서 아주 집중해서 살피고 있었죠."

최기석은 대충 둘러댔다.

용의 눈을 사용했다고 하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 테니까 말이다.

"저도 엠마한테 놀란 게 있는데."

"……."

"수술 보조, 환상이었어요."

최기석은 엠마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번 수술이 무사히 끝난 데는 그녀의 공이 컸다.

만약 어리바리한 보조가 붙었다면 수술 중이나 수술 후 큰 사고 터졌을 것이다.

"칭찬 고마워요."

엠마가 두 뺨을 붉혔다.

"궁금한 게 있는데 폴 교수님은 어떤 분이죠?"

"딱히 특별할 건 없는데 스미스 과장님과 사이가 안 좋아요. 두 분이 메이죠 동기인데 펠로우 때 사이가 틀어졌다고 들었어요."

"……."

"사실 이번 수술도 스미스 과장님 때문에 한 거예요."

"과장님 때문에요?"

"네. 폴 교수님은 원래 조기 위암 수술만 해요. 그런데 얼마 전 회의 때 과장님이 교수님을 자극했죠. 쉬운 수술만 하니까 발전이 없는 거라고."

"발끈해서 수술했다라……."

최기석은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문득 폴이 가진 RUSTED MAN 칭호를 떠올렸다.

잘하면 두 사람이 틀어진 이유를 알 것도 같은데…….

침묵이 흐르는 사이 엠마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팔짱을 꼈다.

풍만한 가슴이 강조되는 트레이드 마크 행동.

최기석은 황급히 그녀의 가슴에서 눈을 돌렸다. 이거 누가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엠마는 쉴 때 주로 뭐해요?"

"저요? 좋아하는 일이 있기는 한데 별로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특이한 취미인가 봐요?"

"……네."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해지네. 저한테만 말해 주세요. 비밀은 확실히 보장할 게요.

최기석은 손을 입에 대고 지퍼 채우는 시늉을 했다.

"마…… 말하면 안 되는데……."

"에이. 이렇게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입 닫으면 안 되죠."

"……웃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그러면 말해 줄게요."

"나 기석 최는 엠마의 취미를 듣고 절대 웃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됐어요?"

최기석의 선서에 엠마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사실 제 취미는……."

"취미는요?"

"봉합이에요."

엠마의 수줍은 대답에 최기석은 박장대소하고 말았다.

이런 대답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듣게 될 줄이야.

"우…… 웃지 않기로 했잖아요."

"미안해요. 참을 수가 없어서."

"아. 진짜. 미스터 최, 나빠!"

엠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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