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173화 (172/407)

경쟁 (1)

갑작스러운 변화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최기석은 한동안 넋을 잃은 채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던 중 검지로 환자의 어깨 부분을 살짝 건드렸다.

단순한 환영이 아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피부의 감촉이 생생했다.

"현실 수준으로 트레이닝을 시켜 주는 건가?"

혼잣말을 하는데 재차 알림이 울렸다.

[트레이닝 받을 모드를 선택해 주십시오. 집도의 모드, 제1보조 모드, 제2보조 모드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집도의를 선택하자 발이 자신도 모르게 집도의 위치로 향했다.

펑! 펑! 펑!

수술대 주변으로 스태프들이 자리를 잡았다.

최기석은 놀란 마음을 다잡으며 스태프들을 살폈다.

스태프들은 가운과 마스크, 수술 장갑 등을 제대로 갖추었다.

다만 특이하게도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수술 보조 스태프의 실력을 설정해 주세요. 실력은 상, 중, 하로 나뉩니다.]

최기석은 일부러 상을 선택했다.

간암 수술에 대한 지식이 짧을뿐더러 참관조차 오늘이 처음이었기에.

띠링!

[촬영한 동영상을 바탕으로 트레이닝 모드를 시작합니다.]

[마취 시간: 20분 10초 /수술 시간: 00분 13초]

알림이 끝나기 무섭게 제2보조가 포비돈 솜으로 환자의 복부를 넓게 문질렀다. 이후 소독을 끝내고 수술 부위에 방포를 덮었다.

척!

등 뒤에 있던 소독 간호사가 메스를 건넸다.

'어찌 됐건 해 보자.'

최기석은 메스를 손에 쥐고 환자를 내려다보았다.

동영상 촬영할 때 한 번, 복습할 때 한 번.

총 두 번 간암 수술을 공부했다. 대략적인 과정과 해야 할 일은 기억하고 있었다.

스으으으윽.

메스로 환자의 복부를 갈랐다.

방금 확인한 대로 실제 집도하는 것처럼 살 찢어지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최기석이 개복을 끝내자 제2보조가 보조기로 갈비뼈를 들어올렸다. 간은 갈비뼈 안에서 보호받고 있기 때문에 이런 사전 작업이 필요했다.

'알아서 척척이네.'

최기석은 스태프를 힐끔하고 수술 부위로 시선을 돌렸다.

간 좌엽에 3센티미터 크기의 암 조직이 있었고 주변에 간경변으로 인한 결절들이 있었다.

위이이잉.

소독간호사에게 받은 분쇄기로 조심스럽게 간을 절제해 나갔다.

간에는 간동맥, 간정맥, 간문맥, 간내 담도 등이 복잡하게 얽혔기에 특수 분쇄기가 필요하다. 무턱대고 메스를 썼다가는 주변 혈관에 손상을 줄 수 있다.

'이런!'

최기석이 입술을 깨물었다.

분쇄기를 사용하던 중 간동맥을 자르고 말았다.

처음 써 보는 도구가 서툴러서 실수를 한 것이다.

치이이이익.

동맥이 잘리면서 대량 출혈이 발생했고 보조들이 서둘러 석션에 나섰다.

잠시 후 갖은 처치에 지혈제가 더해지면서 출혈이 간신히 멈췄다.

'피 말리네.'

그의 몸은 어느새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트레이닝 모드였기에 망정이지 실제 상황이었다면 더욱 아찔했으리라.

계속되는 작업.

절제가 어느 정도 끝나자 굵은 혈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으으윽.

최기석은 클립으로 혈관들의 양쪽을 묶어준 후 혈관들을 잘랐다.

추가적인 출혈을 막기 위함이다.

이후 구역 절제술을 통해 암 조직이 있는 부분과 주변을 잘라냈다.

이로써 힘겨웠던 간암 수술이 끝났다.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수술한 지 7시간이 지났다.

평균적으로 3-5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심한 오버타임이다.

'첫 수술이니까.'

최기석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수술 부위를 닫았다.

그러자 다시 한 번 알림이 울렸다.

[수술에 실패하셨습니다. 환자가 테이블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간암 수술 트레이닝 종합 랭크 D.]

[영상을 선택하고 트레이닝 룸에 입장해 주세요(1/3)]

[트레이닝 모드 튜토리얼을 완료하셨습니다. 보상으로 1,000 P.

P를 제공합니다.]

[장기 임무, '애송이 탈출' 임무를 획득하셨습니다. 임무를 완수할 경우 트레이닝 모드에 새로운 모드가 추가됩니다.]

[트레이닝 룸 수련 200회 달성(1/200)]

휘이이이잉.

폭풍 같은 알람이 끝나고 시야가 돌아왔다.

그럼에도 최기석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너무나 짧은 순간에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졌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대박이네.'

뒤늦게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트레이닝 모드를 사용하면 자질구레한 연습이 필요 없다. 과거 소 심장으로 집도할 때의 번거로움, 봉합 연습을 위해 쌈지와 인형을 챙겨야 하는 귀찮음을 피할 수 있다.

그뿐이 아니다.

실전 같은 수련이 가능하며 다양한 모드까지 선택 가능했다.

벽시계를 확인하고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트레이닝 모드에서 걸린 수술 시간은 7시간이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2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다.

'혹시 그런 건가?'

한 가지 가정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체감상으로는 시간이 엄청나게 지난 것 같은데, 실제로는 5분도 채 지나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경험이 말이다.

심리적인 시간과 실제 시간과의 간격.

트레이닝 모드는 그런 이치를 적용한 게 아닐까 싶었다.

"잘해 보자!"

최기석은 힘차게 두 팔을 들어올렸다.

트레이닝 모드로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의사 가운을 걸치지 않았다면 모델이라고 착각할 생각할 정도다.

"뭐…… 뭐야? 갑자기?"

"아. 미안. 좋은 일이 있어서."

최기석은 사과하며 남자를 응시했다.

베일에 쌓여 있던 룸메이트의 정체는 바로 줄리앙이다.

줄리앙은 그처럼 레지던트 공채에 합격했으며 현재 간담췌외과에서 수련 중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나오던 중 대화하며 친분을 쌓았다.

"너. 아무래도 이상해."

줄리앙이 팔짱을 낀 채로 말을 이었다.

"정신과에 가 봐."

"왜?"

"사실 아까도 방에 들어왔거든. 근데 네가 눈을 감은 채 손을 허우적거리고 있더라. 완전 미친 사람처럼 보였어."

"아. 그거? 이미지 트레이닝이야, 이미지 트레이닝. 내일 스크럽이 있어서."

최기석이 농담과 진담을 섞어 대답했다.

"으음…… 인터뷰 수석이 하는 말이니까 맞는 거겠지. 뭐. 그래도 할 거면 조심해. 나야 그냥 넘어가지만 다른 사람은 이상한 사람으로 볼 수 있어."

"충고 고맙다. 그건 그렇고."

최기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벽에 붙은 포스터를 가리켰다.

"이건 좀 치우는 게 어때? 너무 정신 산만하지 않아?"

"무슨 소리! 이건 삶의 활력소라고.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지 않아?"

줄리앙이 포스터로 다가가 포스터 속 인물의 엉덩이를 만지는 시늉을 했다.

"정신과는 내가 아니라 네가 가야 될 것 같은데?"

"어허! 여자를 좋아하는 게 정신병 사유라면 이 지구 상에 있는 남자들은 전부 정신과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줄리앙을 보며 최기석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말이 통하지 않느니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기숙사 생활에 도사린 먹구름을 어찌하면 좋으리오.

"그건 그렇고 너 우리 과에 끝내주는 여자 있는 거 알아?"

줄리앙이 음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얼굴은 인형이고 몸매는 커다시안 수준이라니까. 휴게실에서 팔짱 끼고 있는 걸 봤는데. 가슴이 아휴~"

"혹시 엠마 이야기?"

최기석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네가 엠마를 어떻게 알아?"

"아까 마주쳐서 잠깐 이야기했었거든."

"대화까지 했다고?"

줄리앙이 놀란 토끼 눈을 했다.

"무슨 이야기했는데? 나도 좀 알자."

"별거 없으니까 몰라도 돼."

"별거 없는데 왜 말을 못해?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

"여의사들 신상 캘 시간에 매뉴얼이라도 한 글자라도 더 봐. 수련 기간인 거 잊었어?"

"미스터 최. 까놓고 이야기 하자. 메이죠 매뉴얼이 재밌냐? 여의사들 쓰리 사이즈랑 취미가 더 재밌냐?"

줄리앙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화제를 여자들 쪽으로 돌리는 능력만큼은 펠로우 수준이다.

최기석은 하는 수 없이 엠마와 나눴던 대화를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흉부외과 전공을 생각하고 있단 말이지. 쉽지 않겠는데. 하여간 정보 고맙다."

줄리앙이 씽긋 웃었다. 그리고 욕실에서 씻은 후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공부에는 전혀 뜻이 없는 모습.

저런 태도로 어떻게 인터뷰를 통과했을까.

할 수만 있다면 그가 메이죠 공채에 합격한 사실을 세계의 미스터리에 포함시키고 싶었다.

최기석은 줄리앙을 힐끔 쳐다보고서 방을 나왔다.

[최 선생. 무슨 일이에요?]

전화를 걸자 송명진이 곧바로 받았다.

"교수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했습니다."

[하하하. 싱겁기는. 그러면 잠깐 볼까요? 배도 고픈데 야식이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하죠.]

"아직 저녁 안 드셨어요?"

[응급수술 때문에 못 먹었어요.]

"괜찮으시면 13층 기숙사로 오시겠습니까? 제가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선물?]

송명진이 놀라서 되물었다.

"네. 아주 기가 막힌 선물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아요."

[알았어요. 바로 올라갈게요.]

송명진은 통화를 끊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꾸르르륵.

뱃속에서 거지가 울었다.

하필이면 저녁을 먹으려던 찰나에 대동맥 파열 환자를 받고 말았다.

'피자가 제일 무난하겠지?'

야식 메뉴를 생각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런데 복도를 걷는 도중 향긋한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익숙하면서 자극적인 향.

미국에서는 단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냄새가 그의 걸음을 이끌었다.

"최 선생? 이게 뭡니까?"

송명진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조리실 탁자 위에 라면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빨간 김치가 자태를 뽐냈다.

음식을 확인하자마자 입에 군침이 맴돌았다.

"일단 같이 드시죠. 사정은 식후에 말씀 드릴 게요."

최기석이 씨익 웃었다.

두 사람은 걸신에 들린 것처럼 라면을 먹어 치워 갔다. 식사 후에는 최기석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렇게 된 거였군요. 비행기에서 노신사를 만난 것부터 다 인연이었어요."

"네. 지금 와서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미네소타에 한국 식당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요? 쉬는 날에 한번 가 봐야겠어요."

"저랑 같이 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송명진이 입을 열었다.

"최 선생."

평소답지 않은 무거운 목소리에 최기석은 바짝 등을 세웠다.

"네. 교수님."

"선물 잘 받았어요. 근래 받은 선물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선물이었어요."

송명진이 껄껄 웃었다.

* * *

다음 날 아침.

최기석은 침대에 누운 채 손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얼핏 보면 잠꼬대를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트레이닝 룸에서 간암 수술을 연습하는 중이었다.

"휴우……."

한숨 쉬며 눈을 떴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수술에 실패했다.

당연한 결과지만 씁쓸한 기분을 지우기 힘들었다.

다음에는 자신감을 얻을 겸 흉부외과 수술을 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

최기석은 세면을 마치고 일반외과 병동으로 향했다.

"닥터 최. 안녕하세요."

"일찍 나왔네요."

"좋은 아침입니다."

스테이션을 지나며 간호사들과 인사를 나눴다.

오직 데이비드만이 바쁜 척하며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똑. 똑. 똑.

노크를 하고 당직실로 들어갔다.

어제 당직자인 모건과 그보다 먼저 출근한 제니퍼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미스터 최! 괜찮아?"

제니퍼가 갑자기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어. 괜찮은데 왜?"

"얼굴이 엄청 부었잖아. 그러게 당직 끝났으면 좀 쉬지."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피곤해서 얼굴이 부은 건 아니야."

최기석은 볼을 긁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흠흠. 어제 라면을 먹고 잤더니……."

"라면?"

모건과 제니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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