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죠 클리닉 (6)
"기억 안 나요? 미스터 최가 인터뷰 보는 날 마주쳤는데."
여성의 말은 점입가경이다.
대체 누구길래 벌써 이름까지 아는지…….
"저기 누구시죠? 죄송하지만 저는 그쪽 분을 모릅니다."
"아. 소개가 늦었네요. 제 이름은 엠마에요. 일반외과에서 수련 중인 레지던트 3년 차에요."
"기석 최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저를 기억 못하겠어요? 저는 미스터 최를 똑똑히 봤는데. 미스터 최는 노숙자를 벤치에 눕혀서 진료 보고 엎어서 응급실까지 데려갔잖아."
"맞아죠. 하지만 엠마를 본 기억은 정확하지 않아서……."
최기석이 말끝을 흐렸다.
"사실 우리가 서로를 봤냐 안 봤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렇게 마주쳤다는 게 중요한 거죠."
엠마가 씽긋 윙크를 날렸다.
그녀의 상큼한 제스처에 최기석은 어쩔 줄 몰랐다.
오늘 처음 본 여성이 이렇게 적극적인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다.
"혹시 괜찮으면 커피라도 한잔할래요?"
"좋아요."
두 사람은 기숙사 카페테리아에 자리를 잡았다.
"제가 갑자기 아는 척해서 놀랐죠?"
엠마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솔직히 당황했어요. 저는 엠마를 처음 보는데 엠마는 저를 봤다고 하고 제 이름까지 알았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니까 너무 성급했네요. 미스터 최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궁금해서."
"저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닙니다."
"그건 본인 생각이죠. 인터뷰 수석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거든요. 뭘 해도 주목받을 수밖에 없죠."
엠마는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었다.
"에단에게 들었어요. 어제 당직 설 때 메리랑 싸워서 이겼다면서요?"
"협진으로 불러놓고 자기 말이 무조건 옳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판 붙었습니다."
"대단해요. 첫 당직에 메리를 꼼짝 못하게 하다니."
"엠마는 계속 오프였나요?"
최기석은 조금의 시간을 두고 화제를 돌렸다.
어제 오늘 한 번도 그녀를 보지 못했다. 그녀의 미모를 생각하면 잠깐 스쳐도 기억했을 텐데…….
"네. 오늘까지 오프예요. 바깥 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일찍 들어왔죠."
"그렇군요."
"미스터 최는 어디 전공할 생각이에요?"
"저는 흉부외과입니다."
"어머! 나랑 똑같네."
엠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 잘해 봐요. 경쟁률이 워낙 세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엠마도, 저도 잘 될 겁니다. 저는 그렇게 믿어요."
"미스터 최가 말하니까 정말 그렇게 될 것 같네요."
최기석의 말에 엠마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한동안 말없이 최기석을 응시했다.
외국 사람의 외모를 섣불리 판단하기는 힘들지만 최기석은 인상이 좋았다. 어딘지 모르게 선하고 올바른 사람이라는 분위기를 풍긴다고 할까.
그녀의 예상보다 영어를 잘했으며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이 실려 있었다.
에단이 그를 주목하라고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으으…… 신경 쓰이네.'
최기석은 엠마의 가슴을 슬쩍 봤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엠마는 대화 중에 팔짱을 끼는 게 버릇인 듯했다.
문제는 팔짱으로 인해 풍만한 가슴이 강조된다는 것이다.
시선을 보내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눈이 저절로 그녀의 가슴으로 향했다.
"슬슬 일어날까요? 제가 할 일이 있어서."
"아. 그랬어요? 일찍 말하지."
두 사람은 먹은 음식을 치우고 카페테리아를 나왔다.
"일 잘 보고 앞으로 잘 부탁해요."
"아, 네. 저…… 저도 잘 부탁합니다."
엠마가 대담하게 그를 끌어안았고 최기석은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미국에서는 포옹이나 볼 뽀뽀로 인사한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찰싹!
멀어지는 엠마를 지켜보다가 볼을 두들겼다.
최기석은 곧바로 1층으로 내려가 송명진의 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지갑에서 꺼낸 명함의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자주는 못 가겠다."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목적지까지 도착하는데 대략 2시간, 왕복으로는 4시간이다.
그 시간이면 수술 동영상을 촬영하고 복습까지 할 수 있었다.
이윽고 차가 주차장을 빠져 나갔다.
반쯤 열린 창틈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신나는 노래에 저절로 몸이 들썩거렸다.
"저기구나."
운전하던 중 한 가게에 걸린 한국어 간판을 확인했다.
한국식당.
투박한 네 글자가 주변에 있는 영어간판들 사이에서 유난히 돋보였다.
최기석은 근처에 차를 세우고 식당으로 향했다.
한창 영업해야 할 시간임에도 식당은 무척 조용해 보였다.
안쪽 불빛이 다 꺼진 듯 보였으며 특별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덜컹!
문을 잡아당기고서 얼굴을 구겼다.
식당 문이 잠겼다.
한식을 먹고 싶어서 먼 길을 찾아왔건만 헛수고가 됐다.
"오늘 영업 안 하십니까?"
문을 가볍게 두드리며 외쳤지만 반응이 없었다.
"누구세요?"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리는데 익숙한 한국말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한 남성이 가게 문을 반쯤 열어놓고 고개를 내밀었다.
"사장님이세요?"
"네. 맞습니다. 식사하러 오셨다면 죄송합니다. 오늘은 영업을 못해서."
남자가 최기석을 위아래로 훑다가 말을 이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오셨나보죠? 처음 뵙는 분인데."
"그게…… 사실 사장님 아버님의 소개를 받았습니다."
"우리 아버지요? 그럼 혹시 최 선생님 맞습니까? 비행기에서 쓰러진 아버님을 구해 주셨다던 그 의사분?"
"네."
"그런 거면 진작 말씀하시지.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남자가 어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거기 앉아 계세요. 금방 음식 내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식당을 훑었다.
식당은 규모가 작았다.
테이블은 다섯 개가 놓였으며 그것도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인테리어는 투박한 편으로 김밥지옥 같은 곳을 연상케 했다. 한국어로 적힌 메뉴판을 보면 한국 사람에게만 장사하는 듯싶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남자가 넓적한 그릇에 김치볶음밥을 내왔다.
최기석은 오랜만에 보는 붉은 자태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고 보니 제 소개가 늦었군요. 이 식당 사장 김태환입니다."
"메이죠 클리닉 레지던트 최기석입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감사인사 드리겠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제가 먼저 찾아뵀어야 하는 건데."
"아니에요. 식당 일 하느라 바쁘실 텐데요."
"아버님의 목숨을 구해 주셨는데 바쁘다는 말은 핑계죠. 하여간 정말 감사드립니다."
김태환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힘든 외국 생활인데 서로 돕고 살아야죠. 앞으로도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 주세요."
최기석은 김태환과 대화를 마치고 김치볶음밥을 먹었다.
매콤하고 아삭한 김치.
거기에 볶은 돼지고기의 향과 야채가 어우러져 입안이 황홀했다.
김치볶음밥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나.
최기석은 순식간에 그릇을 비웠다.
"한 그릇 더 드릴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김태환이 김치 볶음밥에 라면까지 끊여서 내왔고 최기석은 그마저 깔끔하게 먹어치웠다.
"사장님. 계산하고 가겠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아버지를 살려 주셨는데 어떻게 돈을 받습니까? 앞으로 최 선생님께는 일체 돈을 받지 않겠습니다. 무조건이에요!"
"그러면 제가 부담스러운데……."
"최 선생님이 돈을 내면 제가 부담스럽습니다. 제 말 들어주세요."
김태환이 통 사정하는 통에 지갑을 도로 넣었다.
"그건 그렇고 음식이 입에 맞으셨나 봐요?"
김태환의 시선이 텅 빈 그릇을 향했다.
"정말 맛있네요. 병원이 멀지만 않았으면 매일 찾아왔을 겁니다."
"다음번에 오시면 더 맛있는 음식 해 드리겠습니다. 원래 음식은 아내가 하는데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그래서 가게 문을 닫으셨군요."
최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아내분 진료를 해도 될까요?"
"저…… 정말 그래주시겠어요?"
"맛있는 음식을 대접 받았는데 그냥 가 버릴 수는 없죠."
"감사합니다. 그럼 이쪽으로."
김태환을 따라 식당 안쪽으로 들어갔다.
조리대 안쪽으로 8평 정도로 방이 있었는데 그곳에 김태환의 아내와 갓난아이가 누워 있었다.
"여보. 아버지가 말했던 최 선생님이 왔어. 진료를 봐 주시겠다는데."
"그래요?"
김태환의 아내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안녕하세요. 강윤정이라고 해요."
"최기석입니다. 어디가 불편하시죠?"
"이틀 전부터 등허리부터 가슴이 너무 아파요. 누가 칼로 쑤시는 것 같아서 아무것도 못하겠어요."
강윤정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돌아서 앉아 보시겠어요. 아픈 부위를 확인하려면 옷을 걷어야 하니 양해해 주세요."
"네."
최기석은 강윤정의 옷을 들추고 등허리를 살폈다.
등허리 부분에 올록볼록한 수포가 나 있었다.
"이…… 이게 뭐지?"
곁에 있던 김태환이 몸을 들썩거렸다.
"여보. 피부병이 있었어?"
"피부병? 내가 피부병이 어디 있어요. 당신도 잘 알잖아요."
"그렇지만 허리에 수포가 나 있단 말이야."
"두 분 다 진정하세요. 이건 대상포진이라는 병입니다."
최기석은 차근차근 대상포진에 대해 설명했다.
대상포진은 주로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이 걸리는데 수두 바이러스가 신경으로 퍼져 통증을 유발한다.
"저는 몸살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원래 수포가 나타나기 전에는 근육통이나 디스크로 오해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워서 쉬는 동안 수포가 곯았는데 간단히 처치하겠습니다."
최기석은 김태환에게 소독 도구를 부탁했다.
병원비가 비싼 미국이었기에 일반가정집에도 웬만한 처치 도구는 가지고 있었다.
푸우우욱.
라이터로 지진 바늘로 수포를 터트렸다.
이후 거즈로 진물을 닦아 내고 과산화수소로 소독했다.
간단한 처치지만 병원에서 받는다면 무시하지 못할 금액을 지불했으리라.
"아무래도 피부과 진료를 보는 게 좋겠습니다. 항바이러스제 처방을 받아야 해요."
"지…… 진료비는 얼마나 나올까요?"
"말 그대로 진료비만 나올 겁니다. 그마저도 부담스럽겠지만 앞으로를 생각하면 가셔야 합니다. 당분간 식당일도 완전히 쉬셔야 하고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할게요."
김태환과 강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격려 스킬을 사용하셨습니다.]
[환자의 면역력, 재생력, 자신감이 대폭 상승합니다.]
[페인킬러 스킬을 사용하셨습니다.]
[환자의 육체적 통증을 70퍼센트 감소시킵니다.]
"그래도 오늘 밤은 편히 주무실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해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부부의 인사를 받으며 식당을 나왔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차에 올라타는데 김태환이 큰 봉투를 들고 달려왔다.
"자주 못 오신다고 해서 조금 챙겨 봤습니다."
"이런 것까지 챙겨 주실 필요 없는데."
커다란 봉투에는 라면과 김치, 고추장이 들어 있었다.
"제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래요. 그리고 다음에 오시면 제대로 된 음식을 대접하겠습니다."
"네."
최기석과 김태환은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띠링!
[숨겨진 임무, 외지에서 피는 꽃을 완수하셨습니다.]
[트레이닝 모드가 해방되었습니다.]
최기석은 알림을 확인하고 차를 몰았다.
기숙사에 도착하자 방은 여전히 텅 비었다. 룸메이트의 정체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자, 그럼 확인해 볼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트레이닝 모드를 실행했다.
[트레이닝 모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트레이닝 룸은 하루 최대 세 번까지 입장 가능하며 기존에 촬영한 동영상에 기초합니다.]
[영상을 선택하고 트레이닝 룸에 입장해 주세요(0/3)]
최기석은 아침에 촬영한 간암 수술 영상을 택하고 트레이닝 룸에 입장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휘이이이잉.
눈부신 빛이 주변으로 뿜어졌다.
간신히 눈을 뜨니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뭐…… 뭐야 이건?'
최기석은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그의 앞에 수술대에 누운 환자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