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죠 클리닉 (4)
"무슨 일? 이거 봐요, 이거!"
환자가 와락 얼굴을 구기며 검지로 한쪽 팔을 가리켰다.
팔에 상당수의 바늘 자국이 있었다. 그 주변부는 빨갛게 변했으며 약간 부어올랐다.
"이 남자 간호사가 피를 뽑는답시고 내 팔을 엉망으로 만들었다고요! 이거 어떻게 할 겁니까?"
'짜증 나네. 돼지 새끼가.'
데이비드는 고개 숙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환자는 키가 175센티미터에 몸무게는 120킬로그램이 넘었다.
한마디로 고도비만인 셈이다.
이런 경우 혈관이 살덩이에 묻혀서 채혈이 힘들다.
'살이나 좀 빼고 지랄할 것이지.'
데이비드는 속으로는 실컷 환자를 욕하며 겉으로만 미안한 척 연기했다.
"데이비드. 환자가 이 지경이 되도록 찔러 댔습니까? 본인이 잘 못하겠으면 다른 간호사를 불러야죠."
최기석은 환자의 팔을 살피며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간호사는 못 부릅니다."
"왜죠?"
"지금 스테이션에 있는 간호사 중 제가 채혈을 가장 잘하니까요."
"그럼 다른 병동 간호사에게 부탁하든가 정 안 되면 나라도 콜을 했어야죠."
"닥터 최를요? 제가 실패했는데 선생님이라고 성공할 것 같습니까?"
데이비드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두 사람이 대치하는 사이 데이비드가 방을 쿵쿵 굴렀다.
"뻑킹 메이죠! 의사고 간호사고 나발이고 빨리 나가. 짜증나 죽겠으니까."
"알렌. 채혈은 꼭 해야 합니다."
"내 팔을 보고서 그런 말이 나와?"
알렌이 눈을 부라리며 드레싱 카트에 있는 주사기를 손에 쥐었다.
"당신들이 한 것처럼 똑같이 찔러 줄까? 그러면 그딴 소리 못하겠지."
"진정하세요. 아프지 않게 한 번에 성공할 테니까."
최기석은 알렌을 타일러 침상에 눕혔고 데이비드는 그런 그를 보며 조소를 머금었다.
최기석이 제 발로 함정에 들어갔다.
알렌은 혈관이 잘 보이지 않는 환자다.
더군다나 바늘을 꽂을 때 이상하게 혈관이 튕기기까지 했다.
최기석의 실패는 불 보듯 뻔하고 지금까지 쌓인 알렌의 분노는 전부 그를 향할 것이다.
'피곤하네. 조태호 같은 인간이었나?'
최기석은 데이비드를 힐끔 하고서 다시 환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후 토니켓으로 팔목을 묶은 후 손으로 혈관을 더듬었다.
"주먹 꽉 쥐었다 폈다 하세요."
알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고분고분 따랐다. 하지만 눈에는 여전히 짜증과 분노가 떠올라 있었다. 자신마저 채혈에 실패하면 병실은 아수라장이 되리라.
최기석은 알콜솜으로 혈관을 문지르고 주사기를 손에 쥐었다.
푸우우욱.
바늘이 피부를 꿰뚫었다.
[뱀파이어 칭호 효과가 발동됩니다. 채혈 성공률이 100퍼센트가 되며 환자의 통증이 50퍼센트 감소합니다.]
피스톤을 당기자 주사기에 피가 서서히 차올랐다.
최기석은 알콜솜으로 주사 부위를 압박하고 팔목에 묶은 고무줄을 풀었다.
"자, 됐습니다."
"어라? 한 번에 성공했네? 아프지도 않고."
알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사 부위와 최기석을 번갈아 응시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데이비드 때문에 화가 난 것은 너그럽게 풀어 주세요. 원래 실력 있는 간호사인데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았던 것 같습니다."
"흠흠. 나도 미안했습니다. 입원할 때마다 이런 일이 생기니까 너무 짜증이 나서."
"죄송합니다."
데이비드가 재차 사과하면서 평화가 찾아왔다.
최기석은 그와 병실을 나왔다.
"데이비드. 채혈할 때는 말이에요. 손으로 혈관을……."
"수고했습니다, 닥터 최. 밀린 일이 있어서 이만."
채혈 요령을 가르쳐 주려는데 데이비드가 쌩하니 복도를 가로질렀다.
최기석은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듯 그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데이비드는 싹수가 글러 먹었다.
환자에 대한 배려심이 없고 본인의 실수를 남에게 전가하려 했다.
'두고 보자.'
최기석은 불쾌한 마음을 떨치며 병실을 돌았다.
위장관외과 병동과 간담췌외과 병동을 차례대로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대장관외과로 향했다.
"이봐요. 거기 닥터!"
낯선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풍채 좋은 노인이 서 있었다.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세요?"
"그런 건 아니고.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야. 혹시 어느 나라에서 왔나?"
"코리아에서 왔습니다."
"코리아? 정말 코리아?"
노인이 눈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한국에 대해서 잘 아세요?"
"암. 잘 알다 말다 내가 젊었을 때 한국전에 참전했거든. 혹시나 해서 물어보길 잘했네. 괜찮으면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그럼요. 일단 병실까지 가시죠."
최기석은 노인과 나란히 걸으며 통성명을 나눴다.
그의 이름은 토마스, 메이죠에 입원한 지는 나흘이 됐다고 한다.
체력: 4/10
주 증상: 혈변 / 체중감소 / 식욕부진
아픈 부위: 상행결장
진단명: 상행결장암 / 혈우병
암 병기: 3기C(암세포가 장막층까지 침윤, 림프절 전이 4개 이상)
현재 상태: 응급
경과: 불량
과거력: 없음
가족력: 모 대장암 사망
주의 요소: 없음
토마스는 대장암 환자다.
그것도 암이 상당히 진행된 3기.
다만 대장암은 다른 소화기 암에 비해 생존률이 좋은 편이다.
3기라 하더라도 5년 생존율이 50퍼센트를 넘는다.
"닥터. 갑자기 왜 그래요?"
"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최기석은 침상에 걸터앉은 토마스의 맞은편에 섰다.
"한국에서 온 의사를 보니까 무척 반갑네요. 사실 내가 파병 갔을 때만 해도 한국은 가난하고 볼품없는 나라였어요. 아이들은 못 먹어서 깡마르고 키가 작았죠. 주둔 지역 주변은 거의 다 논밭이었고요."
토마스는 과거를 회상하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한국은 지금 많이 변했죠?"
"네. 토마스가 기억하는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긴 그것도 벌써 몇 십 년 전의 이야기니까. 한국전에 참전해서 그런지 아시아 사람들을 보면 다 한국 사람 같고 친근하게 느껴져요. 한국에서 이런 저런 추억이 많았거든요."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그럴까요?"
토마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의 입에서 추억들이 쏟아졌다.
경험하지 못한 예전 시대의 일들이지만 최기석은 옛날이야기라 생각하며 경청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토마스가 친할아버지처럼 푸근하게 느껴졌다.
"내가 말이 너무 많았나?"
"아니에요. 잘 듣고 있었습니다."
"그럼 다행이지만."
토마스가 헛헛하게 웃었다.
"토마스는 아직까지 정정하시네요. 뒷모습만 보면 청년인 줄 알겠습니다."
"하하하하. 농담은……."
토마스가 웃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뭐. 닥터 최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건강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그래서 이 나이를 먹고도 주치의가 수술을 권했던 거고."
"수술 날짜는 언제로 잡히셨죠?"
"이틀 뒤 수요일이에요. 그건 그렇고 바쁜 사람을 너무 붙잡은 것 같은데? 내 이야기 들어주느라 고생 많았어요. 닥터 최도 이제 업무 봐요."
"앞으로도 종종 들르겠습니다."
"나야 좋지요."
토마스와 작별인사를 나눈 후 병실을 나왔다.
환자와 처음으로 교감다운 교감을 해서 그럴까.
가슴이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낯선 땅에 혼자 있다는 느낌도 옅어졌다.
외국 땅에 있지만 이곳 역시 사람 사는 곳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최기석은 그대로 중환자실로 향했다.
메이죠의 중환자실은 의진대에 비해 2배 이상 컸으며 최신식 장비를 갖췄다.
반면 치료 중인 환자의 수는 더 적었다.
일반외과 환자들을 살펴보고 소아 중환자실로 이동했다.
그의 발걸음이 문득 인큐베이터 앞에 멈췄다.
인큐베이터 안에는 히르슈슈프룽 병을 앓고 있는 아이가 누워 있었다.
히르슈슈프룽 병은 선천성 거대결장이라 불리는 질환이다.
이 질환에 걸리면 장 하단부의 신경세포가 없어서 음식을 그 아래로 내보낼 수 없다.
'너도 곧 수술 받겠구나.'
최기석은 아이를 살피다가 당직실로 돌아갔다.
문득 바라본 창밖이 완전히 어둠에 물들었다. 남은 시간에는 또 어떤 환자들이 올까.
* * *
다음 날 아침.
최기석은 당직실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두 눈을 감은 채 일체의 미동도 없는 모습.
그동안 촬영한 수술 동영상을 살피는 중이다.
한국에서는 수련과 당직으로 바빠서 동영상을 촬영해 놓고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후우우……."
깊은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동영상을 보고 나자 수술실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축구선수들이 가장 빛나는 곳은 그라운드, 농구선수들이 가장 빛나는 곳은 코트다. 그리고 써전이 가장 빛나는 곳은 바로 수술실이기에.
"벌써 이렇게 됐나?"
벽시계가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일반외과 오전 회의가 시작된다.
최기석은 몸을 풀 겸 당직실을 나와 복도를 거닐었다. 그러던 중 병실에서 처치 중인 조세를 발견했다.
조세는 소변줄 삽입이나 관장 등의 처치를 하고 있었다.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눈에 띄지 않을 뿐, 처치 솜씨는 훌륭한 편이다.
"보…… 보고 계셨어요?"
병실을 나온 조세가 최기석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왜 그렇게 긴장해요. 잘하던데?"
최기석이 엄지를 치켜들자 그의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지야. 내가 말했잖아. 조세에게 필요한 건 자신감뿐이라고."
"네. 명심할게요. 근데 선생님, 처치가 하나 남아서 그런데 병실로 가 봐도 될 까요?"
"빨리 가 봐요."
최기석은 웃으며 조세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석. 좋은 아침!"
"반갑군."
조세가 떠나자 모건과 제니퍼가 맞은편에서 다가왔다.
"첫 당직은 어땠어?"
"별일 없던데? 환자도 15명 정도밖에 안 봤어."
"15명이 적다고?"
제니퍼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럼 대장관외과랑 간담췌외과 당직의가 환자를 몇 명이나 봤는지는 알아?"
"나야 모르지."
"대장관외과가 3명이고 간담췌외과가 1명이었어."
제니퍼의 말에 최기석은 할 말을 잃었다.
진료한 환자의 수 차이가 생각보다 컸다. 아무래도 환타 칭호의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회의실로 가자. 인수인계 할게."
최기석은 두 사람과 회의실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진료한 환자와 신환으로 입원시킨 환자에 대해 설명했다.
"신환은 내가 받을게."
"좋을 대로."
제니퍼의 말에 모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밤 근무자가 환자를 입원시키면 다른 근무자가 주치의가 되어 그 환자를 맡는다.
이것이 메이죠의 근무 방식이다.
"고생했어, 미스터 최. 이제 퇴근해."
"그냥 남을게. 오전 회의도 들어가고 싶고 병원에서 볼일도 있어서."
"피곤하지 않아?"
제니퍼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뭐. 하룻밤 새우는 거야 일도 아니지."
최기석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잠시 후 에단이 출근해서 오전 회의 준비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수술 스케줄을 잡거나 환자 브리핑하는 루틴 잡은 한국과 큰 차이가 없었다.
"내일부터 케이스 발표를 해야 하는데 누가 먼저 할래?"
"제가 하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
에단이 최기석을 보며 씽긋 웃었다.
회의 준비를 마친 네 사람은 곧 컨퍼런스 룸으로 향했다.
컨퍼런스 룸은 상당히 컸다.
의진대와는 비교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컨퍼런스 룸이 소강당 수준이었으니까 말이다.
최기석이 놀란 표정을 짓자 에단이 친절하게 설명에 나섰다.
일반외과의 오전 회의는 위장관외과, 대장관외과, 간담췌외과가 합동으로 이뤄진다고 말이다.
시간이 흘러 의사들이 자리를 채웠다.
"저분, 잘 기억해 둬."
에단이 검지로 한 중년 남성을 가리켰다.
그는 세모진 얼굴에 날카로운 인상을 풍겼다.
몇몇 의사들의 보필을 받으며 이제 막 컨퍼런스 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애덤 스미스, 일반외과 헤드 치프야."
"어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최기석의 시선이 스미스에게 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