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죠 클리닉 (3)
"닥터 최. 환자 좀 봐 주세요."
스테이션에 도착하자 간호사가 최기석을 붙잡았다.
남자 간호사의 이름은 데이비드, 키가 크고 덩치가 좋아서 위압감이 느껴졌다.
"501호에 있는 마이클이 심한 복통을 호소하고 있고, 507호에 있는 타일러가 속이 쓰리다고 해요. 그리고……."
데이비드의 말이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의사에게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빨리 읽기 대회에 나간 듯한 모습이다.
"알아들었어요?"
말을 마친 데이비드가 팔짱을 낀 채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최기석은 뒤늦게 깨달았다.
데이비드가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한다는 것을.
"닥터 최. 왜 대답이 없죠?"
"아니요. 다 알아 들었습니다. 그런데 데이비드는 내가 못 알아듣기를 바랐나 봐요?"
최기석의 지적에 데이비드가 몸을 움찔거렸다.
"앞으로 환자 보고로 장난치지 말아요. 환자 보고는 정확하고 꼼꼼해야 되는 겁니다. 외국에서 온 신입 의사를 길들이기 위한 도구가 아니에요."
"……."
"알아들었습니까?"
최기석이 노려보자 데이비드가 시선을 피했다.
카리스마 수치가 7단계를 넘은 이후로부터 이런 일이 부쩍 자주 일어나고 있었다. 방금 전 응급실에서 메리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고 말이다.
카리스마 수치는 스태프를 상대하는데 큰 위력을 발휘하는 듯했다.
"데이비드. 대답 안 해요?"
"흠흠…… 알겠습니다."
데이비드가 헛기침했다.
최기석은 스테이션 컴퓨터 앞에 앉아 환자의 전자의무기록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미간이 점점 일그러졌다.
"마이클이 심한 복통을 호소하면 PRN(필요할 때마다)으로 진통제 주게 되어 있잖아요. 간호기록지를 보니까 낮에도 이미 한 번 투약한 적이 있고요."
"……."
"굳이 이걸 내게 보고한 이유가 뭐죠?"
"아니…… 그게…… 사실은……."
"내가 당신 보고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길 바란 거 아닙니까?"
최기석의 지적에 데이비드가 몸을 움츠렸다.
넓은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맺히기 시작했다.
'뭐. 이런 게 다 있지?'
데이비드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신입 의사 길들이기는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오히려 역풍을 맞고 있었다. 문제는 그 상대가 일반외과 신입 의사 중 가장 약해 보이는 최기석이라는 것이다.
외국 의사가 아니면 이런 식의 기선제압은 불가능한데…….
옆자리에 앉은 제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쏘았지만 제인은 철저히 그를 모른 척했다.
"데이비드. 내 말 똑 바로 듣고 있어요?"
"아, 네."
"다시 한 번 이따위로 장난치면 가만두지 않아요."
"미안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데이비드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렸다.
분명 잘못한 건 맞지만 이상하게 최기석 앞에서는 기를 펼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나머지 보고는 전부 오더 내렸으니까 확인해 봐요."
최기석은 얼굴을 잔뜩 구기며 스테이션을 벗어났다. 하지만 몇 초도 되지 않아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차피 간호사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미국 간호사는 한국 간호사보다 프라이드가 센 편이며 의사와 자주 마찰을 일으키니까.
오늘 데이비드를 따끔하게 손봐 줬으니 다른 간호사들도 그를 물로 보지는 못하리라.
"안녕하세요."
당직실에 들어가려는 찰나 누군가 인사를 건넸다.
고개를 돌리자 한 남자 의사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일반외과 인턴 조세다.
조세는 키가 작고 체구가 왜소했다.
인상은 어두운 편이고 피로가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반가워요, 조세."
"새로 오신 레지던트 선생님이시죠?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해요. 바쁘지 않으면 휴게실에서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아, 네."
최기석은 조세와 휴게실에 자리 잡았다.
"뭐 마실래요?"
"전 에너지 음료요."
최기석은 에너지 음료를 조세에게 건네고 본인 앞자리에 캔 커피를 놓았다.
"나는 한국에서 왔는데 조세는 어디에서 왔어요?"
"멕시코 출신입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과 미국으로 이민 왔어요. 의대도 미국에서 졸업했고요."
"그렇군요. 일은 어때요? 할 만해요?"
"죽겠습니다."
조세의 대답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대답하는 도중에 안 그래도 어두운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일도 힘든데다가 은근하게 인종차별도 있어서요. 메이죠에 들어오면 인생이 술술 풀릴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네요."
"모든 사람이 인종 차별을 하는 건 아니지만 차별은 외국인의 숙명인 것 같아요. 저도 오늘 험한 꼴을 많이 당했거든요."
"저 아까 데이비드와 싸우는 거 봤어요!"
조세가 흥분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닥터 최. 정말 멋있었어요. 데이비드, 그 인간은 외국 의사들만 골탕 먹이는 놈인데 닥터 최가 한 방 먹였잖아요. 아까는 속이 얼마나 후련하던지."
조세의 얼굴이 처음으로 펴졌다.
"조세도 당했어요?"
"네. 당했고 아직도 당하고 있어요. 빨리 일반외과 로테이션 끝내고 다른 과로 갔으면 좋겠어요."
"하여간 심성 비틀린 인간은 어디에나 있다니까."
최기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조세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전공: 없음
체력: 3/10
외과적 처치: 2/10
내과적 처치: 2.5/10
평판: 2
정치력: 1.5
카리스마: 1
.
.
.
의료모드를 사용하자 스탯이 떠올랐다.
인턴이라서 그런지 모든 수치가 바닥을 기고 있었다.
이어서 환자모드를 사용하자 진단명에 피로가 떠올랐다. 피부가 푸석푸석하고 눈동자에 생기가 없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조세. 내가 충고 하나만 할까요?"
"충고요?"
"너무 나선다고 생각하지 말고 들어 줬으면 좋겠어요. 그럼 분명 조세에게 도움이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으음…… 오늘 조세를 처음 봤고 이야기도 처음 나눠 보는 거지만 조세는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요. 걸을 때는 어깨를 쭉 펴고 말할 때는 목소리를 크게 해요. 의견이 있으면 숨기지 말고요."
"우와. 제 성격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하하하. 감이라고 할까요?"
최기석은 멋쩍은 표정으로 볼을 긁었다. 사실은 조세의 카리스마 스탯이 1이라서 추론해 본 것이다
"조세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해요. 외국에서 왔고 의사소통도 힘드니까 주눅이 들 수밖에 없죠. 나 역시 그러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조세만 바보 돼요."
"……."
"본인의 행동이나 생각이 옳다고 싶으면 확 질러 버려요.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조세를 무시 못할 거예요."
"제가 그럴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어요. 생각만 조금 바꾸면."
최기석은 조세의 옆자리로 이동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격려 스킬을 사용하셨습니다.]
[스태프의 면역력, 재생력, 자신감이 대폭 상승합니다.]
[특수버프 당돌이 추가됩니다.]
- 당돌: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합니다. 30퍼센트 확률로 분노가 발동합니다.
[조세와 새로운 라포를 형성하였습니다.]
NEW [조세(의료인): 라포 1단계 - 친밀]
"충고 감사합니다. 명심할게요."
조세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고 최기석도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다가 휴게실을 나왔다.
"저기. 닥터 최."
"왜요?"
"그게……."
조세가 망설이다가 이내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제이크 환자에게 비위관 삽입 오더 내셨잖아요. 제가 비위관 삽입이 아직 서툴러서 그런데 시범 한 번만 보여 주면 안 될까요?"
"안 될 이유가 없죠."
"감사합니다."
"처치 세트 챙겨서 병실로 와요."
"네!"
조세가 빠른 걸음으로 스테이션을 향했다.
최기석은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지만 큰 변화가 시작됐다. 앞으로 조세가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궁금해졌다.
그는 환자를 먼저 찾아가 비위관 삽입에 필요성을 설명했다.
"가져왔습니다."
조세가 처치 세트를 챙겨 그의 곁에 섰다.
"보통 튜브 넣는 걸 어렵게 생각하는데 중요한 건 환자의 자세예요. 애초에 환자 자세만 잘 잡아주면 튜브가 잘못 들어갈 이유가 없어요."
최기석은 환자의 턱을 당기고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이도록 만들었다. 이후 L-tube에 길이를 측정하고 튜브에 윤활 젤을 듬뿍 발랐다.
스으으으윽.
튜브가 환자의 콧속으로 들어갔다.
거침없는 손길 속에 튜브가 어느덧 20cm 가까이 삽입되었다.
"조세. 지금부터가 중요해요. 식도와 기도가 만나는 지점이니까. 환자분. 침 삼켜 보세요. 계속 삼키세요."
그의 지시에 환자가 침을 삼키기 시작했다.
후두개가 후두를 덮는 찰나.
최기석은 재빨리 튜브를 식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어서 튜브에 소량의 공기를 주입하고 청진기로 포말음을 확인했다.
비위관 삽입은 성공이다.
"선생님. 대단하세요."
"뭐, 이 정도 가지고. 요령만 익히면 어렵지 않아요."
조세의 존경 섞인 눈빛에 최기석은 멋쩍게 웃었다.
요령을 재차 알려 주자 조세가 내용을 일일이 메모하는 열정을 보여 주었다.
비위관 삽입 교육을 마친 후 당직실로 돌아왔다.
조용하고 텅 빈 당직실.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려다보자 문득 쓸쓸함이 밀려들었다.
만약 의진대에 있었다면 민주혁이나 서지훈, 이영호와 야식 먹으며 대화 나누기 바빴을 텐데.
당시는 하찮게 생각했던 시간.
그 시간이 지금은 너무나 그리웠다.
그런 순간들이 모여 스트레스를 풀어 주고 다른 스태프와 교감을 갖게 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다가 커플링을 내려다보았다.
반지 위로 정설화의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휴우……."
최기석은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가 다시 가운에 넣었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내일 수술 스케줄을 확인했다.
대장암 수술, 위암 수술, 간암 수술.
일반외과에서 가장 많이 하는 수술들이 한꺼번에 몰렸다.
당직이 끝나면 전부 참관해서 동영상으로 남기리라.
그래야 수술 보조로 들어갔을 때 활약 할 수 있다.
'잠깐만 쉬자.'
최기석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 * *
그날 저녁.
최기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의 시선이 방금 전까지 보던 내과 매뉴얼에 고정되었다.
"못할 짓이네."
논문이 쉬었어요 칭호 효과가 있음에도 내과 공부는 고역이었다.
환자 케이스와 증상별로 사용하는 약물이 천차만별이다.
최기석은 본인이 외과 체질임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드르르륵.
당직실을 나와 병실을 돌기 시작했다.
병실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환자들은 대부분은 TV를 보든지 잠을 청했다. 한국에서처럼 환자끼리 대화를 나눈다거나 가족들이 병문안을 와서 시끌벅적하게 있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심심한 동네네.'
최기석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데 병실을 절반쯤 돌았을 때 복도 끝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 뭐하는 거야! 제정신이야!"
갑작스런 호통에 복도에 있던 환자들이 몸을 들썩거렸다.
최기석은 빠른 걸음으로 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병실로 들어가자 거구의 환자가 침상 앞에 서서 씩씩 거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으며 당장이라도 앞에 선 데이비드를 때릴 것만 같았다.
반면 데이비드는 고개를 숙인 채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무슨 일이죠?"
최기석이 두 사람 사이에 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