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죠 클리닉 (2)
응급실에 도착하자 한 여의사가 손을 들었다.
"메리? 기석입니다."
"이 환자예요."
메리가 인사를 씹고 환자를 응시했다.
환자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흑인 남성.
최기석은 우선 모니터 앞에 앉아 차트를 살폈다.
환자 에디는 극심한 복통과 구역질을 느끼고 있었다.
청진상에는 장음이 증가된 양상을 띠었고, 복부 X-ray 결과 상단부 장관에서 음영이 보였다.
메리의 말대로 장 폐색증이 의심되는 상황이다.
"어때요? 수술해야겠죠?"
메리가 안경을 매만지며 물었다. 오만한 표정에는 수술이 꼭 필요하다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아직 환자를 살피지 않았잖아요. 기다려요."
"참 나. 미스터 최가 환자를 본다고 답이 나올 것 같아요? 괜히 시간 끌지 말고 제 말 들어요. 이러면 수술 시간만 지연돼요."
메리가 팔짱을 낀 채로 턱을 치켜들었다.
"메리는 완전 답정너네요."
"다압 쩡 너?
"못 들은 걸로 합시다."
"다 들었는데 어떻게 못 들은 걸로 하죠? 자기 나라 말로 욕한 거 아닌가요?"
"The answer is fixed, so you just answer. 됐습니까?"
최기석의 말에 메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혼자서 판단할 거면 왜 협진을 요청했죠? 이게 메이죠 클리닉의 협진입니까?"
"……."
"환자 볼 때까지 좀 닥쳐요."
그가 째려보자 메리가 입을 벌렸다. 불의의 일격에 당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다.
최기석은 성큼성큼 에디에게 다가갔다.
"일반외과에서 온 닥터 최입니다."
"닥터 최. 난 수술해야 하는 겁니까? 아까부터 저 의사가 수술이 꼭 필요하다고 하던데."
에디가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진찰하고 메리와 상의해서 결정해야 해요."
"저 수술비 감당할 여유가 없어요. 수술해야 되면 그냥 보내 주세요."
"에디. 진정해요. 방금 전에 말했죠? 아직 결정된 건 없다고."
최기석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격려를 사용했다.
[격려 스킬을 사용하셨습니다.]
[환자의 면역력, 재생력, 자신감이 대폭 상승합니다.]
"미안합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서."
에디가 진정한 듯 차분하게 말했고, 최기석은 그에게 양해를 구한 후 상의를 걷어 장음을 들었다. 확실히 장음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고 거칠었다.
"아…… 아파요!"
복부를 누르자 에디가 몸을 들썩거렸다.
"조금만 더 참으세요."
최기석은 계속해서 그의 복부를 눌렀다. 다행히 딱딱한 덩어리가 만져지지는 않았다.
"혹시 예전에 복부와 관련된 수술을 받은 적이 있어요?"
"전혀 없어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면 결론을 내리고 알려 드릴게요."
최기석은 히포크라테스의 눈으로 에디의 상태를 확인하고 메리에게 다가갔다.
메리는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수술해야겠죠?"
"아니요. 내 생각에 수술은 필요 없어요."
"뭐라고요? 제정신이에요?"
메리가 앙칼진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장 폐색의 종류가 두 가지라는 건 알고 있죠?"
"그…… 그건 갑자기 왜요?"
"기계적 장 폐색이라면 수술이 필요하지만, 마비성 장 폐색에는 수술이 필요 없어요. 에디의 경우 후자예요."
"하지만 엑스레이에 확실히 음영이 보인다고요."
"그것만으로 기계적 장 폐색을 단정할 수는 없어요."
최기석이 휘휘 고개를 저었다.
"기계적 장 폐색이 생기는 대부분의 원인은 과거 수술 부위의 유착이에요. 그런데 에디는 복부 수술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피 검사나 다른 검사 결과를 보면 탈장이나 농양을 의심할 수도 없고요."
"……."
"복부 촉진은 했어요? 복부에서 덩어리가 만져지던가요?"
최기석의 말에 메리가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하지만 진단 싸움에서 밀렸음에도 쉽사리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불안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필사적으로 탈출구를 찾는 듯한 인상을 받을 뿐이다.
"메리.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에디는 수술이 필요 없어요. 애꿎은 사람 잡지 맙시다."
"난 인정 못 해요. 내가 왜 미스터 최의 말을 들어야 하죠? 미스터 최는 오늘 막 당직을 선 풋내기 아닌가요?"
메리가 반격에 나섰다. 그리고 곁에 있는 간호사들과 눈을 마주치며 그에게 손가락질했다.
"저 진짜 미치겠어요. 오늘 첫 당직인 미스터 최가 저한테 설교를 하고 있다니까요."
빠직!
메리의 정치로 최기석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이봐요, 메리. 그럼 내가 아니라 다른 닥터의 말이라면 들을 겁니까?"
"당연하죠."
"좋아요. 내가 윗년 차 외과 닥터를 콜해서 환자를 봐 달라고 할 게요. 단, 조건이 있어요."
"말해 봐요."
"내 진단과 다른 닥터의 진단이 일치하면 메리는 내 소원을 들어주세요."
"내 진단이 맞으면 미스터 최가 내 소원을 들어주는 건가요?"
"당연하죠."
최기석은 일부러 다른 스태프들이 다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몇몇 스태프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불구경 다음으로 재미있는 게 싸움구경이라는 말은 미국에서도 통하는 모양이다.
"그 조건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죠."
"좋습니다. 콜할게요."
최기석은 에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급실에 문제가 생겨서 와 달라고 하자 에단은 금방 오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에단이 응급실에 도착했다.
"미스터 최? 메리? 둘 다 뭐하는 거지?"
에단이 두 사람을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일반외과에 초짜 당직의가 저한테 싸움을 걸었어요. 그러니까 에단이 판정을 내려 주세요."
"간단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메리는 환자를 기계적 장 폐색이라 진단하고 수술하자는 의견이고, 저는 마비성 장 폐색이라 진단하고 수술이 필요 없다는 의견입니다. 그래서 에단이 결론을 내려 줬으면 좋겠습니다."
"흐음…… 그렇게 된 거였나?"
에단이 턱을 쓸어내렸다.
소화기내과 레지던트 2년 차인 메리와 첫 당직인 최기석이 펼치는 기 싸움.
과연 승자는 누가 될까.
에단조차 궁금해졌다.
"잠시만 기다려."
에단이 환자의 E.
M.
R을 살피고 문진에 나섰다. 최기석과 메리는 물론이요 다른 스태프들까지 에단의 행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흠흠. 환자를 봤는데 말이야."
에단이 두 사람을 번갈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 환자는 수술 필요 없어. 마비성 장 폐색이 맞아."
"선생님. 진심이세요?"
메리가 홍조 띤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그럼 진심이지 가짜야? 메이죠 클리닉이 환자로 장난치는 곳인가?"
에단이 받아치자 메리가 입을 꼭 다물었다.
에단은 환자를 마비성 장 폐색을 진단한 이유를 천천히 설명했다. 놀랍게도 그 근거는 최기석이 앞서 메리에게 댔던 근거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이 정도면 입원도 필요 없어. 응급실에서 반나절 정도만 쉬어도 충분해. 미스터 최."
"네!"
"하트만 달고 진통제 중에…… 에이타민 IV 놔 줘. 비위관 삽관으로 감압 좀 시켜 주고."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처치에 나섰다.
일련의 과정을 처리하는데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선생님. 저 정말 수술 안 받아도 되나요?"
"네. 안심하세요. 응급실에서 반나절 정도 쉬다가 귀가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에디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다.
띠링!
[숨겨진 임무, 첫 번째 환자를 치료하라 완수하셨습니다. 보상으로 1,000 P.
P와 강화석 30개를 지급합니다.]
[카리스마 스탯이 0.5 상승했습니다.]
최기석은 알림을 확인하고 미소 지었다.
"잘했어, 미스터 최. 첫 당직인데 제법이야?"
"환자를 꼼꼼하게 살피길 잘한 것 같습니다."
"나가서 커피라도 한잔할까?"
에단이 검지로 바깥을 가리켰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최기석은 거침없이 메리에게 다가갔다.
메리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는데 최기석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메리. 우리 약속한 거 있죠?"
"……"
"그 약속 지금 받아야겠어요."
"뭐…… 뭘 원하죠?"
메리가 모기만 한 소리로 되물었다.
"대단한 건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내가 원하는 건…… 람보 흉내예요."
"람보 흉내요?"
"날 따라 하면 돼요."
최기석은 기관총을 든 시늉을 하고 입으로 두두두 하는 소리를 냈다.
그의 우스꽝스런 모습에 몇몇 스태프들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메이죠 클리닉 응급실에 람보 의사가 출현할 줄 세상에 누가 알았겠는가.
"이것만 하면 돼요?"
"네."
메리가 고개를 푹 숙이고 기관총 든 시늉을 따라 했다. 하지만 잔뜩 오므린 입술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뭐해요! 두두두두두!"
"두두…… 아. 몰라!"
메리가 신경질을 부리며 응급실을 떠났고 스태프들은 다시 한 번 웃음바다에 빠졌다.
'까불기는.'
최기석은 메리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씨익 웃었다.
람보로 망신당했으니 다시는 강짜를 부리지 못하리라.
"미스터 최. 진짜 최고야."
에단이 박장대소하며 눈가를 훔쳤다.
"설마 람보 흉내를 내게 할 줄은 몰랐는걸?"
"어렸을 때 한국에서 친구들끼리 이런 벌칙게임을 하고 놀았거든요."
"말 안 듣는 레지던트가 있으면 써먹어야겠어."
두 사람은 대화 나누면서 1층 카페로 향했다.
오후 9시가 넘었건만 본관 홀은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간신히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에단. 메이죠의 협진은 원래 이런 방식인가요? 협진이 아니라 훼방을 놓는 것 같아요."
최기석이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았다.
"메이죠의 문제가 아니라 메리의 문제지. 메리는 소화기내과 의사 중에서도 자존심이 세거든. 거기다가 상대가 오늘 첫 당직인 미스터 최니까 더 나갔다고 봐야지."
"그렇군요."
"그리고 잘 알겠지만 협진 중에 과별로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는 많아. 메이죠는 특히 더 심하지. 예전에 한 환자를 두고 네 개의 과에서 다툼을 한 적도 있어."
당시가 떠올랐는지 에단이 몸서리를 쳤다.
"오늘은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해."
"네."
최기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바쁘실 텐데 전화해서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마. 업무에 익숙해질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 덕분에 람보 구경도 하고 좋았는걸?"
에단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저 궁금한 게 있습니다. E.
M.
R에서 수술 스케줄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수술 스케줄은 왜?"
"당직이 끝나면 수술 참관을 하고 싶어서요."
최기석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개인 수련의 한계가 있는 메이죠지만 수술 참관만큼은 편하게 할 수 있다.
그 점을 십분 활용하고 싶었다.
"당직이 끝나면 쉬어야지. 왜 수술 참관을 해? 안 피곤하겠어?"
"그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100일 당직이라는 것도 했는데요, 뭐."
"100일 당직?"
에단이 놀라 되묻었기에 100일 당직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에반의 얼굴이 점점 흙빛을 띠었다.
"오 마이 갓! 사람이 그런 걸 버틸 수 있어?"
"네. 저도 100일 당직을 끝내고 메이죠로 왔습니다. 한국 외과에 통과의례라고 보면 돼요."
"별로 통과하고 싶지 않은 룰이군."
에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수술 스케줄 확인하는 법을 알려 주었다.
"이제 슬슬 일어나자."
"네. 커피 잘 마셨습니다. 그리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전화할 일 있으면 언제든지 하고."
에단은 멀어지는 최기석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지원 인터뷰 수석.
흉부외과 헤드 치프인 송명진이 데려온 한국 의사.
본인은 모르겠지만 최기석은 이 두 가지만으로 벌써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앞으로 더 재미있겠어.'
에단은 피식 웃으며 갈 길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