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죠 클리닉 (1)
계약서 작성을 마친 의사들이 중앙공급실로 향했다.
이어지는 가운 지급.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최기석은 가운을 걸치며 미소 지었다.
가운 가슴에 달린 포켓에 메이죠를 상징하는 마크가 박혀 있었으며 그 밑으로 닥터 최라는 박음질이 붙었다.
더불어 환자 중심(Patient-centered)이라고 적힌 배지를 달고 사원증을 목에 걸자 완벽한 메이죠의 의사로 거듭났다.
다른 의사들 역시 그처럼 들뜬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오리엔테이션은 소강당에서 진행됩니다. 콜폰 챙기고 따라오세요."
의사들이 린지의 뒤를 따랐다.
소강당에 착석한 후 본격적인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되었다.
메이죠 클리닉의 역사, 병원의 구조, 의료진들의 구성 등등.
각종 지식들이 강사의 설명과 동영상 시청으로 이뤄졌다.
"점심 식사에 앞서서 조 편성을 하겠습니다. 앞으로 수련 생활을 함께할 동료들이니까 서로 인사들 나누세요."
린지의 호명에 의사들이 3인 1조로 뭉쳤다.
최기석은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과 한 조가 되었다.
'병세 선생님이 있었으면 난리 났겠네.'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한 조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그라면 호명 중에 강당을 빠져나갔으리라.
"반가워. 난 기석 최라고 해."
최기석이 먼저 조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난 모건."
"난 제니퍼. 만나서 반가워."
통성명이 끝나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가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사이 제니퍼가 팔꿈치로 모건의 옆구리를 장난스럽게 건드렸다.
"모건. 좀 웃어 봐. 미스터 최가 겁먹은 것 같아."
"억지로 웃으면 그게 더 무서울걸?"
"그래도 뭐든 해 봐."
"참 나."
모건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최기석을 응시했다. 그리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억지로 웃지 않아도 돼. 겁먹은 거 아니니까."
"그래?"
"정말?"
제니퍼의 말에 최기석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건은 키가 190센티미터가 넘고 체격이 좋았다. 거기다 인상이 무척 쌀쌀맞아서 먼저 말을 걸기 힘든 타입이다. 하지만 그는 모건의 외모에 편견을 갖지 않았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한다면 조지환은 성인군자여야 하니까.
"두 사람은 원래 아는 사이?"
"의대 동기거든."
제니퍼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미스터 최는 영어 잘하네? 리스닝도 좋고 발음도 좋아."
"고마워. 오기 전에 공부 많이 했거든."
"혹시 어느 나라에서 왔어? 중국? 일본?"
"대한민국."
"아! 한국! 나. 한국 조금 알아. 내 휴대폰이 삼정 꺼야."
제니퍼가 가운에 넣어둔 휴대폰을 꺼내서 보여 주었다.
"모건. 너는 한국에 대해 아는 거 없어?"
"글쎄. 북한하고 대치 중이라는 것 말고는……."
모건이 말끝을 흐렸다.
"잘 모를 수도 있지. 하여간 앞으로 잘 부탁해."
"나도."
"푸훗."
최기석은 제니퍼의 윙크를 받고 웃음을 터뜨렸다.
같은 조에 활발한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다.
만약 제니퍼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니퍼와 강하나가 겹쳐 보이는 건 단순한 착각일까.
"지금부터 점심 식사를 하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오후 1시까지 소강당으로 돌아오세요."
린지의 말에 모두가 지하 1층 직원식당으로 향했다.
식사는 호텔 뷔페식을 방불케 했다.
각종 음식들을 마음대로 덜어 먹을 수 있었다.
"그만큼 먹어서 되겠어?"
제니퍼가 맞은편에 앉아 그의 접시를 응시했다.
"내 입에는 느끼한 음식들이 많아서."
"그래도 많이 먹어 두는 게 좋을 텐데."
모건이 한마디 덧붙이며 포크를 손에 쥐었다.
"모건 혹시 그거 알아?"
"뭘?"
"미스터 최가 인터뷰 수석이야."
"미스터 최가?"
제니퍼의 말에 모건이 동작을 멈췄다. 찡그린 시선이 최기석에게 고정되었다.
"정식으로 발표는 안 했지만 다들 그렇게 알고 있던데? 비밀 테스트 만점에 면접까지 만점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군. 평가 기준이 잘못된 거 아니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제니퍼의 지적에도 모건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미스터 최가 이해해. 모건은 원래 최고가 아니면 만족을 못 하거든. 의대 다닐 때도 늘 수석을 했고 인턴 평가도 최고점을 받았어."
"그래? 도저히 믿을 수 없는데?"
최기석이 모건의 말을 돌려주자 모건의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테이블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미스터 최. 전공과목은 정했나?"
모건이 화제를 돌렸다.
"난 흉부외과."
"흉부외과는 나 같은 엘리트만 가는 곳이야. 그런데 네가 지원하겠다고?"
모건이 코웃음 쳤다.
"당연하지. 네가 하는 일을 내가 못할 리 없잖아?"
"자. 자. 둘 다 진정해. 이러다 체하겠다."
기 싸움이 치열해지자 제니퍼가 나섰다.
조용한 식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맞은편에서 낯익은 사람이 다가왔다.
"최 선생. 가운 잘 어울리는데요?"
송명진이 함박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식사 끝나면 본관 로비로 와요.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식사를 마치고 제니퍼와 모건에게 양해를 구한 뒤 악속 장소로 향했다.
"교수님. 저 왔습니다."
"빨리도 왔네. 커피라도 한잔하죠."
두 사람이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요새 병원에서 숙식하느라 통 못 봤네요. 메이죠에 입성한 걸 다시 한 번 축하해요."
"다 교수님 덕분입니다."
"나는 기회를 만들어 줬을 뿐이에요. 그 기회를 잡은 건 최 선생입니다."
송명진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이번 인터뷰에서 수석을 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윗선에서 최 선생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어요. 그 깐깐한 야사다 교수조차 말이에요."
"교수님 말씀을 들으니 더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 선생님이라면 잘 해낼 겁니다. 기숙사는 배정받았죠?"
"네. 그런데 아직 짐을 못 옮겼습니다."
최기석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교수님.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메이죠에도 의진대에 있었던 아지트 같은 곳이 있을까요?"
"아쉽지만 그런 곳은 없어요."
송명진의 대답에 최기석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아지트에서 마음 놓고 집도 연습을 했기에 지금의 발전을 이루었다. 그런데 정작 실력을 더 키워야 할 메이죠에 아지트가 없다니…….
"소 심장을 구하는 일도 어렵겠죠?"
"완전히 불가능해요. 봉합 연습을 하고 싶으면 뜨개질이나 인형을 꿰매야 할 겁니다."
"……."
"그래도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메이죠는 한국 병원보다 근무시간이 짧아요. 그래서 남는 시간에 수술 참관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혼자 연습하는 것보다 다른 의사들의 수술을 지켜보는 게 더 큰 재산이 될 겁니다."
"참관은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메이죠 의료진이라면 전혀 제한 없어요."
"아……."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송명진의 말은 백번 옳다.
메이죠의 각종 외과 수술을 동영상으로 담아 둔다면 그것만큼 가치 있는 재산이 없다.
"앞으로 흉부외과 수술 스케줄 보내 줄 테니까 여유 있을 때 참관하러 와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감사할 것까지야."
최기석은 송명진과 대화를 마치고 소강당으로 돌아갔다.
유명 써전들의 수술 동영상으로 가득 찰 상태창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그날 오후.
오리엔테이션이 종료되었다.
이제부터 의사들은 해당 과에서 수련을 받아야 한다.
최기석이 속한 조는 일반외과, 그중에서도 위장관외과다.
다만 메이죠의 경우 수련의가 세부전공에 상관없이 전반적인 업무를 치른다. 위장관외과의 일뿐 아니라 대장관외과와 간담췌외과의 일도 함께 처리하는 셈이다.
지이이잉.
최기석과 모건, 제니퍼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본관 4층에 일반외과 병동으로 향했다.
"미스터 최. 눈이 쉴 새 없이 돌아가는데?"
"미국 병동은 처음이라서."
최기석은 제니퍼의 질문에 웃으며 답했다.
복도를 스쳐 가는 동안 다양한 인종의 환자들과 스태프들을 마주쳤다.
별세계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적응하기 쉽지 않을걸? 내가 장담하지."
잠자코 있던 모건이 고춧가루를 뿌렸다.
그가 인터뷰 수석이라는 것을 안 다음부터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네가 겁준다고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아?'
최기석은 모건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반가워요. 새로 들어온 레지던트에요."
"제니퍼…… 모건…… 키석. 반가워요."
스테이션에 있는 간호사가 세 사람의 명찰을 읽으며 인사를 건넸다.
"티칭 레지던트(Teaching Resident)가 곧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요."
말하기 무섭게 복도 끝에서 백인 남성이 다가왔다.
그가 바로 T.
R 에단이다.
"새로 온 레지던트? 이쪽으로."
세 사람은 에단을 따라 회의실에 자리를 잡았다.
"일반외과에 온 걸 환영해. 내 이름은 에단이고 일반외과 레지던트 3년 차다."
에단이 헛기침하고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일반외과의 업무량은 다른 과보다 많아. 레지던트가 세 분과의 환자를 전부 책임지기 때문이지. 하지만 일반외과에 적응하면 다른 과 일은 무척 쉬워지지."
"……."
"자. 이거 한 권씩 받아."
에단이 책장에서 세 권의 책을 건넸다.
최기석은 이미 독파한 메이죠 클리닉 외과 매뉴얼이다.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봐 두는 게 좋을 거야.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에단의 설명이 이어졌다.
일반외과의 스태프 구성, 근무 방식과 인수인계 등에 관한 내용이었다.
"인턴 끝냈으니까 이 정도 말하면 다 알아듣겠지?"
"네!"
"근무표를 짜 보자. 오늘 밤 당직은 누가 할래?"
에단의 질문에 회의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업무에 적응할 시간도 없이 곧바로 들어가는 반나절짜리 근무.
이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모건과 제니퍼가 눈치를 보자 최기석이 손을 들었다.
"미스터 최. 괜찮겠어?"
"한국 속담 중에 매도 먼저 맞는 사람이 낫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맘에 드는 이야기군. 그럼 미스터 최가 저녁 당직, 제니퍼가 오전 근무, 모건이 오후 근무로 가자고."
이윽고 에단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 달 치 스케줄을 짰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미스터 최. 수고해."
스케줄 작성 후 모건과 제니퍼가 퇴근했다.
이제 회의실에 남은 사람은 에단과 최기석뿐.
에단이 메이죠의 E.
M.
R(전자의무기록) 시스템을 알려 주었다. 꼭 필요한 것만 알려 주었기에 암기가 어렵지 않았다.
"기석. 잘했어."
"네? 갑자기 왜……."
최기석이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칭찬받을 일을 한 적이 없다.
"당직 서겠다고 나선 거 말이야."
"대단한 일도 아닌데요. 뭐."
"중요한 건 기석이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거야. 그게 바로 핵심이지."
에단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시아계 의사들은 너무 얌전해서 탈이야. 다른 사람 눈에 안 띄려고 기를 쓰고 노력하지. 하지만 메이죠에선 그런 식으로 살아남을 수 없어."
"……."
"여기선 말이야. 먹이를 먹고 싶어서 안달 난 아기 새처럼 굴어야 해. 조금이라도 남보다 아는 척하고 앞에 나서야 사람들이 봐준다고."
"제가 그런 점에서 합격이라는 말인가요?"
"적어도 지금까지는."
에단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당직 잘 서고 모르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해."
"알겠습니다."
최기석은 회의실을 나와 당직실로 향했다.
그런데 당직실 구경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울렸다.
미국에서도 환타 칭호의 효과는 자비가 없었다.
"일반외과 기석 최입니다."
[소화기내과 당직의 마리예요. 응급실에 장 폐색증으로 온 환자가 있어서 상담하고 싶습니다. 수술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지금 내려갈게요."
최기석은 통화를 끊고 응급실로 향했다.
자, 그럼 첫 환자를 만나러 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