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성 (3)
"이건……."
"메이죠 클리닉의 외과 매뉴얼입니다."
"매뉴얼이 이렇게 두껍나요?"
최기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매뉴얼을 받았다.
의진대 병원 매뉴얼은 포켓북 형식으로 만들어져서 휴대가 가능했다. 그런데 메이죠 클리닉의 매뉴얼은 전공서적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두껍고 컸다.
"공부할 게 많아서 좋지 않아요?"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한 권은 내과 매뉴얼이고 다른 한 권은 외과 매뉴얼이에요. 외과 매뉴얼을 먼저 보고 시간 날 때마다 내과 매뉴얼도 봐 둬요. USMLE step 3 준비도 해야 하니까."
"네."
최기석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USMLE step 3에 합격해야 비로소 미네소타 주의 의사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는 올해 안에 마지막 시험까지 통과할 계획을 가졌다.
"교수님. 메이죠의 환자들은 어떤가요?"
"최 선생 생각보다 의사 말을 잘 따를 겁니다. 대신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면 바로 소송을 걸죠."
"혹시 교수님도……."
"그래요. 나도 지금까지 두 번 소송 당했어요. 하나는 무과실 판결이 났고 다른 하나는 진행 중이에요."
송명진이 얼굴을 구기며 말을 이었다.
미국은 의료 소송의 천국이다.
어차피 소송에서 져도 잃을 게 없다.
이런 방식으로 미국 의료 로펌이 환자에게 바람을 잡기에.
"그밖에 다른 특징이라면…… 비만 환자와 약물중독 환자가 많다는 정도예요. 내 생각에 최 선생은 특히 간호사들에게 큰 사랑을 받을 것 같군요."
"채혈 때문이군요."
"그래요. 최 선생의 주사 솜씨는 인턴 때부터 알아줬으니까."
잠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최기석이 입을 열었다.
제일 궁금했던 것을 물을 차례다.
"교수님. 메이죠에는 하이어 시스템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이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하이어는 사실 최 선생을 위한 시스템이죠."
송명진이 웃으며 설명을 이었다.
하이어 시스템.
이것은 실력 있는 의사를 더 대우하자는 메이죠의 철학이 담긴 인사 시스템이다.
메이죠의 써전들은 8개월에 한 번씩 환자 평가, 스태프 평가를 거친다. 만약 여기서 최우수 등급을 받으면 수련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
"메이죠의 수련 기간은 아나요?"
"흉부외과 전공의 경우 외과 수련 5년을 끝내고 이후에 흉부외과 레지던트 2년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국내하고 비교하면 미국이 3년 더 길죠. 사실 이게 맞는 거고."
송명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흉부외과는 외과 계열의 꽃이라 불린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인턴만 끝내면 곧바로 흉부외과 레지던트를 할 수 있었다.
다른 외과 계열에 대한 지식 없이 곧바로 흉부외과에 넘어오는 것이다.
송명진은 그 점을 탐탁지 않게 여겨왔다.
"만약 최 선생이 하이어 시스템을 이용하면 국내와 똑같이 레지던트를 마칠 수 있어요."
"네. 꼭 그러고 싶습니다.
"나도 그러기를 빕니다. 이미 집도가 가능한 최 선생이에요. 수련 기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죠."
송명진이 말을 끝내기 무섭게 알림이 울렸다.
띠링!
[장기 임무, '하이어 시스템'이 생성되었습니다.]
[완수조건: 하이어 시스템으로 외과 레지던트 수련기간을 단축시키세요. 임무를 완수할 경우 특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최기석은 알림을 확인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새로운 임무가 잠들었던 승부욕을 깨웠다.
"참고로 하이어 시스템에는 복수 전공도 포함됐어요."
"복수 전공이요?"
"흉부외과 펠로우가 심장외과와 폐식도, 그리고 소아흉부외과 쪽으로 나뉜다는 건 알고 있죠?"
"네."
"메이죠에서는 각기 다른 펠로우 과정을 동시에 수련할 수 있어요."
"그 말씀은 심장외과 펠로우와 폐식도 펠로우를 같이 진행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에서 두 가지 자격을 모두 가지려면 심장외과 펠로우 과정을 끝낸 후 다시 폐식도외과 펠로우 생활을 해야 한다.
즉 두 과정을 모두 이수하려면 4년이 필요하다.
그런데 메이죠에서 복수 전공하면 2년 만에 두 과정을 마칠 수 있다.
시간을 말도 못하게 단축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알겠어요? 내가 최 선생을 메이죠로 부른 이유를?"
송명진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곳은 최 선생을 위한 기회가 넘쳐납니다. 그러니까 욕심쟁이가 되세요. 잡을 수 있는 기회는 모두 잡는 겁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최기석은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벌써부터 병원 생활이 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똑. 똑. 똑.
갑작스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송명진이 들어오라고 말하자 한 백인 남성이 집무실을 찾았다.
"어서 와요, 볼튼."
"헤드 치프. 안녕하세요. 어라 손님이 있었네?"
볼튼의 시선이 최기석에게 고정되었다.
"마침 잘 됐네요. 이쪽은 한국에서 온 최기석 선생이에요. 최 선생은 이쪽은 심장외과 조교수 볼튼이에요."
"안녕하세요. 기석 최라고 합니다.
"볼튼이에요."
최기석과 볼튼이 마주 서서 악수를 나누었다.
"닥터 최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헤드 치프가 매우 아끼는 사람이라고 하던데……."
"아, 네."
"닥터 최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볼튼이 씽긋 웃었다.
통성명이 끝난 후 세 사람이 소파에 앉았다.
"그건 그렇고. 헤드 치프는 오늘 오프 아닙니까?"
"최 선생이 병원을 보고 싶다고 해서 잠깐 들렀어요. 겸사겸사 야사다의 수술 참관도 하고 말이에요."
"그렇군요."
볼튼이 고개를 끄덕이고 최기석을 응시했다.
"흉부외과 전공을 할 거라고 들었는데 맞아요?"
"네. 한국에서도 흉부외과 레지던트였습니다."
"헤드 치프가 데려온 사람이라면 실력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방심하지 말아요. 메이죠 클리닉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니까."
"알고 있습니다."
최기석은 대답하며 볼튼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했다.
체력: 6/10
진단력: 7/10
외과적 처치: 8.5/10
내과적 처치: 6/10
평판: 6
정치력: 4
카리스마: 3
볼튼의 스탯은 전체적으로 우수했다.
특히 외과적 처치는 송명진보다 0.5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밖에 쓸 만한 액티브 스킬과 패시브 스킬을 한 가지씩 보유하고 있었다.
역시 메이죠 흉부외과는 만만치 않았다.
"헤드 치프. 닥터 최는 눈빛이 좋네요. 낯선 병원 생활이 긴장될 법한데. 오히려 의욕으로 가득 차 있어요."
"그게 최 선생의 장점이죠."
제자 칭찬에 송명진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자. 그럼 슬슬 일어납시다. 오늘의 메인이벤트가 남아 있으니까."
세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수술용 참관실로 향했다.
참관실에는 이미 제법 많은 수의 흉부외과 스태프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의외네.'
최기석은 스태프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인들이 득실거릴 줄 알았건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전체 비율을 10이라고 가정하면 대략 백인이 6, 아시아계가 2, 히스패닉이 1, 흑인이 1이다.
한국과 달리 여의사의 숫자도 생각보다 많았다.
"안녕하세요. 헤드 치프."
"오프인데 출근하신 건가요?"
스태프들이 송명진에게 스스럼없이 인사를 건넸다.
"말하자면 길지요. 이쪽은 한국에서 온 최 선생입니다."
송명진이 흉부외과 스태프들에게 최기석을 소개시켜 주었고 최기석은 자기소개를 반복했다.
이윽고 스태프들이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응시했다.
"교수님. 메이죠는 원래 이렇게 많은 스태프가 수술을 참관하나요?"
최기석이 주변을 훑으며 물었다.
"한국보다는 많지만 원래 이 정도로 많지는 않아요. 오늘은 특별한 수술이 있기 때문이죠."
"특별한 수술이라면……."
"곧 심장 - 폐 동시 이식 수술이 시작할 겁니다."
송명진의 말에 최기석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들썩거렸다.
심장 - 폐 동시 이식 수술은 쉽게 접하기 힘든 케이스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단 여섯 번밖에 이뤄지지 않았다.
"놀랐어요?"
"아. 네. 직접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를 안 했던 수술이라서요……."
"그럴 만도 하죠. 심장 - 폐 동시 이식술을 하는 케이스는 알고 있어요?"
"아이젠멩거 증후군이 있는 케이스입니다."
최기석이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아이젠멩거 증후군.
이것은 선천성 심장 질환으로 폐순환을 할 때 혈류가 과도하게 흘러 영구적인 폐동맥 고혈압을 일으킨다.
근본적인 치료법은 심장과 폐를 동시에 이식하는 것뿐이다.
"역시 잘 알고 있군요."
송명진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메이죠 클리닉은 세계의 환자들이 몰려드는 메카에요. 병원 생활을 하면 더 다양한 케이스를 볼 겁니다."
송명진이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문이 열리고 스태프들이 일제히 로젯으로 들어왔다.
집도에 나서는 써전은 총 네 명.
두 명은 심장외과 펠로우고 나머지 두 명은 폐식도외과 펠로우다.
'미쳤네.'
써전들의 스탯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그들의 외과처치 레벨 평균은 8, 그야말로 드림팀인 셈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소속: 팀 카디악]
[팀 레벨: 4/5]
[단결력: 4/5]
[처치레벨 4/5]
팀 스탯 또한 완성에 가까웠다.
"교수님. 죄송한데 저분은 누구죠?"
스태프들을 살피던 최기석이 검지로 한 의사를 가리켰다.
의사는 아시아인으로 다른 써전보다 키가 작고 체구가 왜소했다.
"실력자를 바로 알아보는데요?"
"……."
"저 사람은 일본에서 온 야사다 선생님이에요. 폐식도외과 파트에 헤드 치프를 맡고 있죠."
"아…… 어쩐지."
최기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야사다는 외과처치 레벨이 9단계로 송명진과 동급이며 다양한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다. 폐식도외과 파트의 끝판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시 야사다 선생을 알아요?"
"아…… 아닙니다. 이름을 들어 본 것 같아서요."
대충 말을 얼버무리고 모니터를 응시했다.
이윽고 본격적인 심장 - 폐 동시 이식술이 진행되었다.
꿀꺽.
최기석은 마른침을 삼키며 동영상 촬영에 나섰다.
써전들의 스탯과 팀 스탯이 높아서 수술은 무난히 진행되었다.
심장외과 써전들은 인공심폐기를 사용 후 대동맥과 상대정맥, 하대정맥의 혈류를 차례대로 차단하고 심장을 적출했다.
"교대!"
야사다의 낭랑한 외침.
심장외과 써전들이 2선으로 물러나고 페식도외과 써전들이 1선으로 올라갔다.
배턴을 이어받은 야사다가 이식 사전작업에 나섰다.
그는 환자의 폐동맥과 폐정맥, 기관지를 거침없이 절제했다.
심장외과 써전에 비해 속도가 2배가량 빨랐으며 절단 부위는 깔끔했다.
그야말로 신의 경지.
최기석은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송명진의 집도를 처음 봤을 때의 그 짜릿함을.
잠시 후 사전작업이 끝나고 공여자의 폐와 심장이 도착했다.
"다시 교대하겠습니다."
심장외과 써전들이 심장이식에 나섰다.
그들은 공여자의 심장을 좌심방부터 꿰매 나갔다.
그들의 본 실력에 폐식도 써전의 깔끔한 보조가 더해지자 수술이 일사천리다.
"윌리엄. 좌심방!"
"왜 그러시죠? 무슨 문제라도?"
야사다의 지적에 윌리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사다는 대답 대신 포셉으로 좌심방을 가리켰다.
최초 봉합을 했던 좌심방에서 미세한 출혈이 발생했다.
"이 정도 출혈은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봉합이 잘못된 건 아니에요."
"아니야. 이쪽 부분이 느슨하다고."
야샤다가 포셉으로 매듭을 건드리자 봉합사가 힘없이 늘어졌다.
이에 윌리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래도 문제가 없다고?"
"……."
"내게 경쟁심을 느끼는 거 알아. 나보다 빨리 처치할 수 있다는 걸 참관 중인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겠지. 근데 그건 멍청한 생각이야. 메이죠의 정신이 뭐지?"
"……환자 중심입니다."
"자네의 하찮은 욕심은 버리고 환자를 위해서 수술하도록."
"네."
윌리엄이 새빨개진 얼굴로 추가봉합에 나섰다.
잠시 후 심장이식 수술이 끝나고 야사다가 집도의 자리에 섰다.
이어지는 화려하고 정교한 봉합술.
최기석은 눈을 빛내며 그의 동작 하나하나를 몸과 마음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