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닥터 최기석-162화 (161/407)

입성 (2)

'발작성 빈맥(PSVT)이다!'

최기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발작성 빈맥이란 일시적으로 맥박이 빨라지는 현상이다.

증상이 심하면 지금처럼 실신할 수 있으며 추가 조치가 없으면 증상이 악화되어 발작을 일으킨다.

"잠깐만 도와주세요."

그는 승무원을 도움을 받아 박재갑이 사지를 쭉 편 채 편하게 눕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박재갑의 경동맥을 지그시 눌렀다.

일명 경동맥 마사지.

이를 통해 미주신경의 활동을 증가시켜 빈맥을 차단할 수 있다.

"근데 정말 이래서 승객분이 괜찮아질까요?"

여승무원 한 명이 이의를 제기했다.

"갑자기 쓰러지셨고 의식도 없는데 흉부압박을 해야 하는 건 아닌지……."

"쓰러졌다고 무조건 흉부압박이 필요한 건 아니에요. 상황을 봐야죠."

최기석은 CPR 전에 호흡과 맥박을 확인할 필요가 있음을 덧붙였다.

좌우측 경동맥을 번갈아 압박하자 박재갑의 호흡이 차차 안정적으로 변했다.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도 펴지기 시작했다.

"아으으으윽."

박재갑이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괜찮으세요?"

"지…… 지금은 괜찮아요."

"숨은 크게 들이마시고 아랫배에 힘주세요."

박재갑이 최기석의 지시를 따르다가 갑자기 일어나려 했고, 최기석은 그런 박재갑을 다시 눕혔다.

"쪽팔린데 일어나면 안 돼요?"

"지금 쪽팔린 게 문제가 아닙니다. 몸을 생각해야죠. 맥이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 누워 있어요."

"아니. 나는 괜찮다니……."

박재갑은 다시 일어나려다가 최기석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하고 고분하게 누웠다. 한 번 더 고집을 피우면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10분 후 최기석은 박재갑과 자리로 돌아갔다.

"의사 선생님, 잘하셨습니다."

"멋있어요!"

처치를 지켜본 몇몇 승객들이 최기석에게 칭찬을 쏟아냈다.

"흠흠. 최 선생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못 했군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뭐."

최기석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병원을 가 보라는 말이 허튼 소리가 아니라는 건 아셨습니까?"

"나도 깜짝 놀랐어요. 이런 적은 처음이라서……."

박재갑은 실신하던 당시를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면서 사지에 힘이 빠졌다. 그러더니 곧 머리가 하얗게 변하면서 의식을 잃었다.

특히 의식을 잃기 전 느꼈던 공포감은 아직 생생했다.

"로체스터에서 진료받기는 그렇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곧바로 병원에 가 봐야겠어요."

"네. 반드시요."

박재갑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 한 모녀가 접근했다.

"저기, 의사 선생님 맞으시죠?"

젋은 여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의진대 흉부외과에서 일했습니다."

"저희 아이가 아까부터 계속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데 혹시 진찰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최기석은 복도로 나와 아이를 살폈다.

"우리 친구 이름이 뭐에요?"

"신우형, 여섯 살이요."

남자아이가 귀엽게 손가락을 펼쳤다.

그 모습에서 황정우가 겹쳐졌다.

황정우는 그가 흉부외과 초턴 시절 승모판막 수술을 받았으며 불사신 칼라일 아이템을 선물했다.

"머리가 어떻게 아파요?"

"이쪽이 많이 아파요."

신우형이 검지로 오른쪽 측두부를 가리켰다.

"혹시 우형이가 저녁에 과식하지 않았나요?"

"아, 네. 기내식하고 간식을 많이 먹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소화불량인 것 같습니다. 여승무원에게 말해서 소화제를 먹이고 배를 잘 쓸어 주시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최기석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정우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 * *

"승객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본 비행기는 15분 후에 로체스터 공항에 도착합니다. 예상 시간은 로체스터 현지 시간으로 8시 30분입니다. 현재 로체스터의 기후는 맑으며 내리실 때는 잃어버린 소지품이 없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장황한 멘트가 흘렀다.

최기석은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고 창밖을 응시했다.

잠은 푹 잤으며 컨디션은 최상이다. 벌써부터 메이죠 병원에 가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이거 받아요."

박재갑이 명함을 내밀었다.

"이건……."

"우리 아들 식당 명함이에요. 오늘 만나서 최 선생 이야기를 해 둘 테니까 한 번 찾아와요."

"뭘 이런 것까지 주시고."

"이것밖에 못 해 주는 게 더 미안하죠."

박재갑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했다.

최기석은 캐리어를 끌고 비행기를 빠져나와 입국심사대를 통과했다. 다른 승객들과 게이트를 통과하자 로체스터 공항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처음으로 외국에 와서 주변의 모든 것이 신기했다.

무엇보다 각양각색의 인종들을 살피는 재미가 있었다.

"저는 마중 나온 분이 있어서 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메이죠 병원에서 훌륭한 의사 선생님이 되기를 바랍니다."

최기석은 박재갑과 인사를 나눈 후 대기 중인 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바로 송명진이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잘 왔어요, 최 선생. 로체스터에서 보니까 더 반가운데요?"

송명진이 반갑다는 표시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는데 불편한 건 없었어요?"

"비행기 멀미를 했는데 옆자리에 있는 분께 도움을 받았습니다."

최기석은 검지로 귀밑을 가리켰다.

"배고프면 식사라도 할까요? 아니면 커피?"

"커피가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갑시다."

두 사람은 공항 내부 카페를 찾았다.

"주문 도와드릴까요?"

백인 여성 직원이 미소를 지었다.

특별한 것 없는 광경이지만 최기석은 새삼 미국에 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는 다른 인종 사람들과 영어를 쓰며 생활하리라.

"톨 모카 원, 노 휩. 톨 아메리카노 노 룸."

최기석이 당당하게 주문하자 송명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두 사람은 주문을 끝내고 자리에 앉았다.

"주문 솜씨가 제법인데요?"

"의사소통뿐 아니라 생활 영어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슬랭(비속어)까지도요. 의사소통으로 애먹을 일은 없을 겁니다."

"잘했어요. 최 선생도 알다시피 메이죠 병원은 토탈 케어로 유명합니다. 한국보다 다른 과 사람들을 자주 마주칠 테니 커뮤니케이션은 뛰어날수록 좋죠."

송명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의진대는 잘 정리하고 왔죠?"

"네. 문제없습니다. 세이버 팀원들에게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요."

"그건 여기서 성장하는 걸로 보답하면 돼요. 의사에게 중요한 건 의료 실력과 환자를 위하는 마음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커피 가져올게요."

최기석은 choi와 song이라고 적힌 커피잔을 들고 왔다.

미국에서는 커피잔에 손님의 이름을 적어 준다.

"교수님…… 아니 과장님은 오늘 오프신가요?"

"과장은 무슨 과장이에요? 닭살 돋으니까 예전처럼 교수라고 불러요."

송명진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당연히 오프니까 최 선생을 데리러 왔죠."

"요즘 병원 생활은 어떠세요?"

"예전에 비하면 임금처럼 생활하고 있어요. 수술도 나한테 집중되지 않고 여유시간도 비교적 널널하니까요."

"다행입니다."

"그건 그렇고 일단 집으로 가서 짐부터 풀까요?"

"혹시 그 전에 메이죠에 가 봐도 될까요? 어떤 곳인지 궁금합니다."

"그 말이 왜 안 나오나 했어요. 좋아요. 갑시다."

송명진이 흔쾌히 허락했다.

두 사람은 주차장으로 이동해 송명진의 차에 탔다.

이윽고 승용차가 공항을 빠져나갔다.

조수석에 앉은 최기석은 창을 반쯤 열고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정신없이 스쳐 가는 낯선 풍경이 그가 타국에 왔음을 일깨워 주었다.

"앞으로가 걱정 되지 않아요?"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잘 이겨 낼 자신 있습니다."

"그래요. 최 선생이라면 분명 잘 해낼 겁니다."

송명진은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한국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수없이 많은 의사들을 지켜봤다. 그중에는 형편없는 의사도 있고 그와 어깨를 기댈 만한 훌륭한 의사들도 있다.

만난 의사들 중에 가장 특별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최기석이다.

최기석의 잠재력은 끝이 없다.

이쯤이면 이만큼 성장했겠지 하고 예상하면 항상 그 이상을 보여 주었다.

메이죠 병원에 온 이상 성장세는 더욱 가팔라질 것이다.

어쩌면 몇 년 안에 그를 뛰어넘을지도 모른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메이죠 클리닉에 도착했다.

주차를 끝낸 두 사람이 메이죠 클리닉 정문 앞에 섰다.

"우와!"

최기석은 입을 벌린 채 클리닉 건물을 응시했다.

층수가 워낙 많아서 고개를 치켜들어야 온전히 건물을 볼 수 있었다. 병원이 크다는 건 알았지만 검색한 이미지와 실제는 또 달랐다.

"메이요는 세 개의 빌딩으로 이루어졌어요. 왼쪽 편에 있는 빌딩이 교육과 연구를 전담하는 곳이고 중앙 건물에 외래환자 진료소와 각종 편의시설이 있어요. 우측 빌딩에서는 병동을 비롯한 다양한 시설들이 있죠."

"……."

"스카이웨이를 통해 각각 다른 빌딩으로 이동할 수 있으니까 알아둬요."

"네."

두 사람이 중앙빌딩으로 들어갔다.

최기석은 메이죠 클리닉의 내부 인테리어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병원의 전체적인 톤과 시설들이 세련되고 정갈한 느낌을 풍겼다.

각종 미술 작품까지 전시되어 눈이 즐거웠다.

"교수님. 저건 뭔가요?"

최기석은 몇몇 사람들이 차고 있는 팔찌를 가리켰다.

"환자 인식표라고 보면 되요. 저걸 등록된 바코드에 찍으면 환자 정보가 떠올라요."

"신기하네요."

"나도 처음에는 그랬어요."

송명진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직원들이 배지를 차고 있네요."

메이죠 직원들은 전부 환자 중심(Patient-centered)이라는 문구가 적힌 배지를 달고 있었다.

"의무사항이에요. 최 선생도 알겠지만 환자 중심이라는 구호가 지금의 메이죠를 만들었죠."

"아. 네."

최기석은 송명진의 설명을 들으며 메이죠 투어를 다녔다.

돌아다니는 내내 그는 아이처럼 설렜다.

제임스 홉킨스와 더불어 세계 최고의 병원을 다투는, 세계의 수많은 의사들과 환자들이 몰려드는 이곳에서 수련할 기회를 얻었다는 게 꿈만 같았다.

"기왕 온 김에 내 집무실도 보고 갈래요?"

"네. 영광입니다."

두 사람은 스카이웨이를 통해 옆 빌딩으로 향했다.

이후 십 분가량 걷자 흉부외과 과장 전용 연구실이 나타났다.

연구실은 의진대 과장실보다 두 배 이상 컸다.

넓은 공간에는 각종 의료 서적이 빼곡하게 차 있었으며 인체 모형도 놓여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책상에 있는 명패다.

[Thoracic surgery, Head chief Dr. Song]

명패를 확인한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스승이 새삼 어떤 사람인지, 메이죠 클리닉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느낄 수 있었다.

"교수님. 정말 대단하세요."

"하하하. 대단할 것까지야. 중요한 건 명패가 아니라 실력이죠."

송명진이 먼저 소파에 앉고 그 맞은편에 최기석이 자리 잡았다.

"그럼 일정에 대해 말해 볼까요? 시험결과 나오는 게 이번 주죠?"

"네."

"채용 인터뷰가 다음 주에 있으니까 그때까지 서류와 인터뷰 준비해 둬요. 추천서는 내일 최 선생 메일로 보낼 게요."

"알겠습니다."

"인터뷰를 잘 끝내면 그 다음 주부터 정식으로 출근할 겁니다."

송명진이 차분하게 설명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근하기 전까지 텀이 기니까 최 선생을 좀 괴롭혀 볼까요?

책장을 뒤지던 그가 두꺼운 책 두 권을 꺼내서 내밀었다.

"받아요.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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