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성 (1)
"으으음."
최기석은 신음 흘리며 눈을 떴다.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자 의식이 차차 맑아졌다.
창밖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곧 곁에 누운 정설화를 향했다.
정설화는 누가 엎어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잠들었다.
'하긴 피곤할 만하지.'
격렬했던 어젯밤을 떠올리고 웃음 지었다.
과거 그녀가 기대하라고 했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코스프레 복장을 두 벌이나 챙겨 왔으며 다양한 방법으로 그를 만족시켜 주었다.
어제의 황홀한 경험은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최기석은 조심스레 일어나서 물을 마셨다. 그리고 베란다에 서서 바깥을 응시했다.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눈부셨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신선한 공기가 온 몸에 가득 차는 느낌이다.
"벌써 일어났어?"
침실로 돌아가니 정설화가 부스스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일찍 일어나는 게 습관 돼서. 너는 더 자."
"나도 안 졸려."
정설화가 손으로 옆자리를 팡팡 두들겼다.
"이리 와서 누워 봐."
"네네. 알아 모시겠습니다."
최기석이 침대에 눕자 정설화가 그의 팔을 베게 삼아 눕고서 몸을 밀착했다. 그녀가 속옷만 입고 있었기에 풍만한 가슴과 부드러운 살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너무 좋다.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어."
정설화가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싫은데?"
"왜?"
"흠흠…… 그런 게 있어."
최기석이 헛기침 하며 손가락으로 특정부위를 가리켰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너무 가혹하지 않아?"
"변태. 내 낭만을 빼앗아 갔어."
정설화가 장난스럽게 쥔 주먹으로 최기석의 가슴을 두드렸다.
두 사람은 서로를 그윽하게 바라보다가 입맞춤을 나눴다.
가벼운 스킨십이 발전하면서 두 사람의 몸이 차차 엉켰다.
이윽고 폭풍 같았던 시간이 지나갔다.
"아침부터 이래도 돼?"
정설화가 발그레한 얼굴로 물었다.
"안 될 건 뭐 있어? 햇살에 비친 네 모습이 너무 예뻤던 말이야."
"치. 갖다 붙이기는."
정설화가 피식거리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데 나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어."
"뭐가?"
"어젯밤 이후로 뭔가 변한 것 같아. 뭐랄까. 우리 둘 사이에 있던 벽이 깨진 것 같아."
"벽? 우리 사이에 벽이 있었나?"
최기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보. 비유 같은 거야. 더 가까워진 것 같다고."
"그건 나도 그래."
"커플링 때문에 그런가?"
정설화가 손가락을 응시했다.
최기석이 선물한 금반지가 햇살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반지를 보고 있자니 어제 레스토랑에서 그가 했던 말이 머리를 스쳤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가슴이 벅차올랐다.
"외국에 있다고 빼면 안 돼. 불시에 검문한다?"
"당연하지. 잘 때도 끼고 있을 게."
"착하다. 우리 기석이."
정설화가 최기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슬슬 씻고 나가자. 시간이 별로 없다."
"응."
"먼저 씻을 게."
최기석은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의 온도를 맞추는데 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
"깜짝이야. 놀랐잖아."
"아. 미안."
"왜? 먼저 씻을래?"
"그…… 그게…… 아니라……."
정설화가 두 뺨을 붉히며 몸을 배배 꼬았다.
"굳이 따로 씻을 필요가 있나 싶어서."
"그…… 그것도 그러네. 들어 와."
최기석은 당황함을 감추고 정설화와 함께 샤워했다. 그리고 옷을 챙겨 입은 후 숙소를 나섰다.
오늘은 또 어떤 즐거운 하루를 보낼까.
* * *
시간은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다.
정설화와 1박 2일 여행을 떠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사이 최기석은 USMLE와 토플 시험을 치렀다.
시험은 한마디로 누워서 떡 먹기였다.
외국어 학습 능력 2배 상승 젬.
외국어 회화 능력 2배 상승 젬.
이 두 가지 젬에 최기석의 노력과 기본기가 더해졌던 탓이다.
시험이 끝난 후 본격적인 미국행을 준비했다.
돈을 환전하고 필요한 물건을 사고 국제운전면허증을 신청했다.
그렇게 한 주가 끝나고 월요일이 찾아왔다.
드르르륵.
최기석은 캐리어를 끌고 인천국제공항 로비에 들어섰다.
각 항공사의 데스크, 비행편이 적힌 전광판,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자 한국을 떠난다는 사실이 비로소 피부에 와 닿았다.
지이이이잉.
몇 분 간격으로 휴대폰이 몸을 떨어댔다.
출국 시간에 맞춰서 의진대 스태프들이 보낸 응원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지난 1년 6개월간의 병원 생활은 헛되지 않았다.
최기석은 캐리어를 끌고 국제선 탑승 장소로 이동했다. 그리고 근처 카페에서 가족과 정설화에게 차례대로 영상통화를 걸었다.
본래 가족과 정설화가 배웅을 나오겠다고 했지만 일부러 물리쳤다.
배웅 받으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잠시 후 시간에 맞춰서 비행기에 탑승했다.
쿵. 쿵. 쿵.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메이죠에서 어떤 생활을 하게 될까, 얼마만큼 더 성장할 수 있을까.
우우우웅.
굉음과 함께 비행기가 이륙하기 시작했다.
창밖을 내려다보자 공항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비행기를 처음 타서 그런지 이런 사소한 일까지 신기하고 놀라웠다.
'9시쯤 도착하려나?'
최기석은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한국에서 로체스터 공항까지 가는 데는 대략 16시간이 소요된다.
공항에 도착하면 미국에서 새 아침을 맞는 셈이다.
창밖을 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매스꺼웠다.
아침에 잘못 먹은 것도 없건만…….
최기석은 본인에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하고서 쓴웃음을 지었다.
진단명이 멀미다.
비행기 안에서 뜻밖의 암초를 만나다니…….
멀미를 이기기 위해 뒤척거리며 잠을 청해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누군가가 젓가락으로 머리를 휘젓는 것 같았다.
울렁증도 갈수록 심해졌다.
"저기. 혹시 멀미해요?"
옆에 앉은 중년 남성이 말을 걸었다.
"아. 네."
"그럼 이거 붙여 봐요. 금방 나을 테니까."
중년 남성이 호주머니에서 귀밑에 붙이는 멀미약을 건넸다.
남성 역시 멀미약을 붙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최기석은 멀미약을 붙이고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자 두통과 울렁거림이 감촉같이 사라졌다.
사랑해요 귀밑에.
"덕분에 멀미가 완전히 가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요."
중년 남성이 손사래 치며 말을 이었다.
"로체스터에는 무슨 일로 갑니까?"
"병원에 취직하러 갑니다."
"허허. 의사 선생님이군요. 조금 고깝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미국에서 의사 생활하기 힘들 겁니다. 외국 사람은 병원 매칭을 잘 안 해 줘요. 무턱대고 왔다간 잡일만 해야 될 수도 있어요."
"걱정은 감사하지만 이미 다 알아보고 왔습니다."
"이미 매칭이 끝난 건가요?"
"지인이 메이죠 클리닉 흉부외과 헤드 치프를 맡고 있습니다. 추천서 받고 인터뷰만 잘 끝내면 큰 문제 없을 겁니다."
"와우. 메이죠라니…… 친하게 지내야겠는데요."
중년 남성이 농담조로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무슨 일로 로체스터에 가십니까?"
"아들놈이 미네소타에서 조그만 식당을 하는데 얼마 전 손주를 낳아서요. 손주 보러 갑니다."
"축하드려요."
"고마워요."
중년 남성이 시원시원하게 웃었다.
대화가 길어지면서 두 사람은 통성명을 나누었다.
중년 남성의 이름은 박재갑으로 한국에서 작은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건 그렇고 시간이 있으면 병원에 가 보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최기석이 화제를 돌렸다.
"갑자기 병원은 왜요? 난 건강한데."
"말씀을 드리자면 긴데……."
멀미약을 준 보답으로 그의 건강상태를 체크해 보았다.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사용한 결과 그는 부정맥을 앓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어지럼증을 느낀 적이 있지 않으세요?"
"뭐. 있기야 하지만…… 그런 증상은 다들 겪는 거 아닌가요?"
"본래 사소한 증상이 발전해서 큰 병이 됩니다. 건강검진 받아 본 적도 없으시죠?"
최기석의 질문에 박재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한 반응.
부정맥은 병원에서 심전도 검사만 해도 발견할 수 있다. 본인이 부정맥인지 모른다는 사실은 그가 병원에서 제대로 진료를 받은 적이 없음을 뜻했다.
"최 선생한테는 미안한데 난 병원이 병을 키우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쓸데없는 검사를 한 다음에 무슨 수치가 높네 낮네 하면서 애꿎은 사람 환자로 만들고 말이에요."
"얄팍한 상술을 부리는 병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병원도 있습니다."
"애써 충고를 해 줬으니 생각은 해 보죠."
"아니요. 생각이 아니라 꼭 가셔야 합니다. 어르신과 가족분들을 위해서요."
최기석의 직언에 박재갑이 미간을 찌푸렸다.
"흠흠…… 이야기는 여기까지 합시다."
박재갑이 팔짱 낀 채 눈을 감았다.
대화가 끝난 후 최기석은 챙겨 온 서적을 꺼내 읽었다.
국내에서 발간된 메이죠 클리닉에 관련된 서적이다. 미리 읽어 두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멀미가 물러간 덕분에 책을 읽기 무척 편했다.
최기석은 어느새 책 속으로 빠져 들었다.
* * *
비행기에 탑승한 지 열 시간이 지났다.
최기석은 기내식을 먹고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문득 바라본 하늘이 새까맸다.
어두운 하늘은 맑고 푸른 하늘과는 또 다른 멋이 있었다.
최기석은 가만히 흉부외과 스태프들을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서지훈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당직을 서고 있을 것이다. 이영호는 회의실에서 봉합 연습하기 바쁘며 그 밖의 다른 스태프들은 응급 수술에 나섰을지 모른다.
문득 그리워지는 의진대 생활.
찰싹.
최기석은 가볍게 볼을 두드렸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수련을 끝낸 후다.
메이죠에서 심장외과와 폐식도외과 펠로우까지 마친다면 그 시점이 10년 후가 될 수도 있겠지만.
'최대한 단축해야지.'
그는 예전에 송명진이 말해준 하이어 시스템을 떠올렸다.
하이어 시스템은 메이죠 클리닉에만 있는 파격적인 진급 시스템이다.
이를 이용하면 배움의 길을 고속으로 뚫을 수 있다.
"저기요. 음료수 한 잔만 가져다주세요."
박재갑의 말에 여 승무원이 탄산음료를 가져다주었다.
"갈증이 심하신 가 봐요? 아까부터 계속 음료를 찾으시는데……."
"비행기 안에서는 담배를 못 피우잖아요. 대신 뭐라도 마셔야지."
박재갑이 음료를 단번에 비웠다.
최기석은 그를 지켜보다가 잠을 청했다.
저녁식사를 한 후라서 잠이 솔솔 쏟아졌다.
그런데 잠이 들려는 찰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여기 사람이 쓰러졌어요!"
여승무원이 다급하게 외치자 승객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화장실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박재갑이 쓰러져 있었다.
의식을 잃었는지 조금의 미동조차 없었다.
"진정해. 매뉴얼대로 하면 되니까. 넌 제세동기 챙겨 와."
"네."
여승무원 한 명이 자리를 비우고 다른 한 명은 흉부압박을 할 준비를 했다.
그사이 최기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박재갑에게 향했다.
"나오세요. 지금 필요한 건 흉부압박이 아닙니다."
"네? 누구시길래?"
"의진대 의사입니다."
최기석은 여승무원을 물러나게 만들고 박재갑과 가까운 위치를 잡았다.
기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
모두의 시선이 최기석에게 집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