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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 닥터 최기석-160화 (159/407)

이별 준비 (6)

최기석은 대중교통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드디어 얻었구나.'

상태창에서 스킬북을 확인하고 미소를 지었다.

스킬북은 원하는 스킬의 레벨을 한 단계 올릴 수 있는 마법의 아이템이다. 어떤 스킬을 레벨업 할까 고민하던 중 히포크라테스의 눈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동안 가장 많이 신세졌던 스킬이자 지금의 그를 만들어 준 1등 공신.

그게 히포크라테스의 눈이다.

띠링!

[스킬북을 사용하여 히포크라테스의 눈을 레벨업 합니다.]

[히포크라테스의 눈 Lv.3]

- 의료인 또는 의료기사등, 환자의 상태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 레벨이 높을수록 더 많은 정보를 얻습니다.

- 진단명, 환자의 과거력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 상해 및 질병의 원인, 가족력을 추가적으로 파악합니다.

- 아픈 부위를 더욱 구체적으로 명시합니다. 암의 경우 병기까지 드러납니다.

- 치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요소가 모두 표시됩니다.

'자. 그럼 어디 확인해 볼까?'

최기석은 눈앞에 중년 남성에게 스킬을 사용했다.

체력: 3/10

주 증상: 기침 / 가래

아픈 부위: 오른위엽기관지

진단명: 천식

현재 상태: 비응급

경과: 양호

과거력: 폐렴

가족력: 부(夫) 폐암 사망

주의 요소: 페니실린 알레르기 / 지독한 흡연가

최기석은 남자를 살피고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스킬을 쓰면 병원 초진기록지에 버금가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환자의 의식이 없는 응급상황, 검사 결과 전 든든한 가이드라인이 되어 주리라.

이어서 새로 얻은 칭호를 확인했다.

[하트비트]

- 내 심장 소리를 들어 봐. 널 위해 뛰고 있잖아.

- 심장 수술 후 환자의 심장 회복력이 2배로 증가합니다. 기계판막과 조직판막을 사용할 경우 기대수명 및 효율이 1.5배 상승합니다.

오랜만에 얻은 칭호 효과가 마음에 들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도 내과적인 관리가 소홀해서 환자가 사망하거나 재입원하는 경우가 많다.

이 칭호는 그런 점들을 보완해 줄 것이다.

보상을 확인하는 사이 집에 도착했다.

"왈! 왈! 왈!"

"해가 서쪽에서 떴나? 네가 웬일이니?"

최기석은 꼬리치며 다가오는 장군이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장군이가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던 순간, 장군이는 그의 손길을 벗어나 밥통을 입에 물고 앞에 섰다.

아무래도 배가 고파서 알랑방귀를 뀐 모양이다.

허탈하게 웃으며 사료를 채워 주자 장군이가 식사에 나섰다.

이윽고 그릇을 비운 장군이가 햇살 드는 자리에 배를 깔고 누웠다. 그리고 '이제 너랑 볼일 없는데'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을 날렸다.

최기석은 장군이와 눈싸움하다가 캐리어를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짐 정리를 끝낸 후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의진대병원을 떠났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그저 오프를 받아서 잠시 집에 들른 느낌이다.

"바보같이."

쓴웃음을 지으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응급대기를 하다 보니 긴장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 병원을 떠난 후에도 편히 쉬지 못하고 있었다.

행여 콜이 올까 휴대폰이나 만지작거리고 말이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최기석은 책상에 USMLE 교재를 펼치고 공부를 시작했다.

다음 주에 USMLE 시험과 토플 시험이 같이 있다.

점수가 높아야 인터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

'기다려라. 메이죠!'

그의 눈빛이 뜨겁게 타올랐다.

* * *

다음 날 아침.

최기석은 백팩을 메고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정설화와 처음으로 1박 2일 데이트를 하는 날이다.

'잘 있지?'

반지함을 확인하고 가방을 후방 좌석에 두었다.

이윽고 차가 주차장을 떠났다.

하늘은 맑고 푸르렀으며 햇살이 쨍쨍했다.

전형적인 여름 날씨다.

정설화를 데리러 가는 길, 그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녀와 하룻밤을 보낸다는 사실은 기쁘지만 금방 또 그녀와 이별해야 하기에.

"설화야! 여기!"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손을 흔들자 정설화가 그를 발견하고 조수석에 탔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나도 방금 막 왔어."

정설화가 방긋 웃었고 최기석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랜만이다.

한껏 꾸민 정설화의 모습을 보는 것은.

정설화는 다시 자란 머리에 살짝 파마를 했으며 머리가닥을 꼬아서 왕관 모양을 만들었다.

마치 여신 같은 모습이다.

거기다 오랜만에 한 화장과 베이지색 원피스가 무척 잘 어울렸다.

"완전 심쿵한데?"

최기석은 정설화에게 안전벨트를 해 주며 그녀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정설화가 부끄러운지 두 뺨을 붉힌 채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가…… 갈까?"

"그래. 가자."

내비게이션에 리조트 주소를 찍고 차를 몰았다.

일요일 이른 아침, 도로는 한적했다.

"모처럼 쉬니까 기분이 어때?"

"솔직히 별로야."

"왜?"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아.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최기석은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퇴직한 지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의사가 있을 곳은 병원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산책도 하고 번화가도 둘러봤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평화로운 일상은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쓸모없는 사람이라니. 절대 그런 소리 하지 마. 넌 언제나 최고니까."

"알아. 그냥 해 본 소리지."

"공부는 잘돼 가고?"

"어제 USMLE하고 토플 모의고사 쳐 봤거든? 합격은 문제없을 것 같아."

"점수가 어떻게 나왔는데?"

"USMLE가 95점. 토플이 110점."

"우와. 대박."

정설화가 놀란 토끼눈을 했다.

최기석이 송명진의 메이죠 콜을 받은 게 2주 전이다.

그런데 그사이에 짧게 공부한 것으로 최상위 성적을 받았다. 모의고사라는 점을 감안해도 경이로운 점수다.

"틈틈이 영어 공부한 게 도움이 됐나 봐. 병원도 안 나가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만점 노려야지."

"당연히 그래야지."

정설화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이 잠시 최기석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정면을 향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꺼낼 수가 없었다.

말을 꺼내면 그가 더 힘들어할 것 같아서.

'그래.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즐기자.'

정설화는 마음을 고쳐먹고 신나는 음악을 틀었다.

밝은 음악 속에 리조트가 어느덧 코앞이다.

길옆으로 새파란 바다가 펼쳐졌다.

백사장이 햇볕을 반사하며 보석처럼 빛났고 짠내를 실은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일광욕이나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경치 죽인다. 나 사실 이런 데 처음 와 봐."

"그래서 기대해도 좋다고 했지?"

"하여간 우리 자기가 최고라니까."

두 사람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리조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숙소로 들어갔다.

객실은 2인실로 7층에 위치했다.

세련된 인테리어와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마음에 들었다.

"여기도 대박이네."

최기석은 객실을 둘려보며 감탄하기 바빴다.

정해진으로 살 때는 이런 곳에서 여가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새로운 삶을 얻은 후에는 줄곧 병원생활만 했고 말이다. 모든 게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짐 풀고 나가자."

"어? 어."

두 사람은 팔짱을 낀 채 근처 정원을 걸었다.

햇살은 뜨거웠지만 시원한 바람이 불어 걷기 좋았다.

"나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어."

"뭔데?"

"오프 때 나랑 수영장에 갔었잖아. 그때 나한테 갑자기 고백한 이유가 뭐야?"

두 사람이 사귀기 전 정설화는 최기석에게 꽤 오랫동안 호감을 표현했다. 그런데 최기석은 늘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고백해 왔다.

"아…… 그게……."

최기석은 볼을 긁적거리며 머뭇거렸다.

결정적인 이유라면 한 가지 있다.

수영장에서 부모 잃은 아이를 만났을 때, 정설화는 아이를 친절하게 보살펴 주었다.

그 모습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포근함을 느꼈다.

더불어 이 사람이라면 의지하고 기댈 수 있겠다고.

두근거리는 감정으로 연예를 시작한 건 아니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

"글쎄. 뭐랄까?"

"……."

"그날이 딱 콩깍지가 씌었던 날인 것 같아. 널 놓치면 후회할 것 같아서 확 질러버렸어."

"내가 오래전부터 널 좋아했다는 건 알았지?"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그런데 강준이하고는 연락하고 지내?"

최기석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몇 번 연락 왔는데 다 씹었어. 굳이 더 보고 싶지 않아."

"다른 남자들은? 순환기내과 치프하고 종혁이 같은 애들은?"

"다 정리했어.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봐?"

"내가 없는 사이에 나쁜 놈들이 수작 부릴까 봐 그러지. 싹은 미리미리 잘라 둬야 된다고."

"귀여워."

정설화가 그의 볼에 입을 맞추고 팔짱 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기석이 너야말로 외국 가서 바람 피면 안 돼. 나 가만 안 있는다?"

"걱정 마세요. 공주님."

산책을 하는 내내 두 사람에게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 * *

숨 막힐 정도로 바쁜 하루였다.

두 사람은 야외 수영장, 볼링장과 사우나실 등을 들렀으며 전기 자전거도 탔다.

가장 압권이었던 것은 노래방.

두 사람은 처음으로 서로의 노래실력을 파악했다.

최기석이 음치에 익룡이었다면 정설화는 고음불가였다.

두 사람 모두 달달한 노래로 분위기를 잡으려 했지만 노래가 진행될수록 웃음만 터졌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밤이 됐다.

두 사람은 옥상에 위치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진짜 예쁘다. 그치?"

정설화가 창밖을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리조트, 그 속에서 빛나는 건물들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졌다.

"난 너랑 있어서 더 좋은데?"

최기석은 부드럽게 정설화의 손을 감쌌다.

"미안. 한국에 남았으면 이런 시간 더 자주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하다는 소리 그만해. 벌써 백 번은 들은 것 같아."

"그래도……."

"예전에도 말했잖아. 네 마음만 변하지 않으면 난 다 괜찮다고."

"고마워."

최기석은 뜸을 들이다가 미리 챙겨 온 반지함을 꺼냈다.

순간 정설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뭐야?"

"커플링. 손 줘 봐."

최기석은 함을 열어 정설화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비록 떨어져 있어도 우리는 항상 함께 있는 거야. 내가 널 사랑하는 마음, 네가 날 사랑하는 마음 평생 간직하자. 설화야. 사랑해."

최기석의 고백에 정설화가 고개를 푹 숙였다.

뜨거운 감정이 북받쳐 올라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최기석의 말에 진심이 담겼다는 것을.

"어? 울면 안 되는데"

당황한 최기석은 정설화의 옆으로 다가가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이윽고 정설화의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반지 정말 고마워. 너무 예쁘다."

"아무리 예뻐도 우리 설화만 하겠어? 다이아반지도 너한테는 상대가 안 된다고."

"바보. 다른 사람 들어."

정설화가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나도 앞으로 잘할 게. 믿어 줘."

"응. 믿어. 나도 잘할게."

식사를 끝내고 리조트 주변을 걸었다.

그렇게 경치를 즐기다가 객실로 들어와 최기석이 먼저 샤워했다.

"좋다."

최기석은 욕실에서 나와 침대에 누웠다.

오늘 하루는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완벽했다.

다만 앞으로 이런 시간을 자주 가질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데 정설화가 욕실에서 나왔다.

"나 어때?"

수줍게 서 있는 그녀를 보는 순간 마른침이 목젖을 스쳤다.

정설화는 치어리더 복장을 하고 있었다. 상의는 그녀의 몸에 딱 달라붙었으며 가슴부분이 패여서 풍만한 가슴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치마는 짧아서 속옷이 다 보였으며 허벅지까지 올라온 스타킹이 각선미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지금 이 순간 말은 필요치 않았다.

최기석은 벌떡 일어나서 정설화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촉촉한 입술.

인중을 간지럽히는 숨결.

갖가지 감각들이 그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잠깐만."

정설화가 최기석을 밀쳐냈다.

"왜?"

"흥분하지 말고 누워 봐. 빨리."

정설화가 보채는 통에 하는 수 없이 침대에 누웠다. 그러자가 정설화가 수줍게 그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얌전히 있어. 오늘은 내가 다 해줄 게."

정설화가 서서히 몸을 포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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