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준비 (5)
최기석은 식당으로 돌아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휴우…… 안 되는 건가?'
윤지혜와 대화 중인 김태식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윤지혜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헬스클럽에 나가서 윤지혜를 봤으며 호감을 살 만한 행동도 자주했다.
하지만 윤지혜는 여전히 쌀쌀맞았다.
지난 두 달간 전혀 진전이 없다.
"화장실 갔다 올게."
윤지혜가 자리를 비우자 김태식이 한숨을 쉬며 잔을 비웠다.
"진짜 포기해야 하나?"
"윤 교수님이 워낙 강적이잖아요. 그래도 계속 찍다 보면 언젠가 넘어갈 거예요."
최기석이 김태식의 잔에 술을 채웠다.
"이러다가 내가 넘어갈 판국인데?"
"제가 보기에 두 분 잘 어울려요. 분명 잘 됩니다."
"한 잔 더 따라 줘."
김태식이 연거푸 잔을 들이키고 새 잔을 받았다.
"네가 보기에 나는 어때?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냐?"
"김 선생님은 충분히 멋있어요. 단지 윤 교수님이 마음의 준비가 안 됐을 뿐이라니까요."
"김 선생님. 윤 교수님 좋아하시는구나. 그럼 조금만 참으세요."
옆 테이블에 앉은 강하나가 대화에 껴들었다.
"참으면 답이 나와요?"
"네. 장해물이 곧 메이죠로 가니까요."
"강 쌤. 사람을 장해물 취급해도 돼요?"
최기석이 발끈했지만 강하나는 눈썹 하나 깜빡거리지 않았다.
"최 선생님은 뭔가 문제인지 모르죠?"
"……."
"최 선생님은 여자 스태프들한테 너무 친절해요. 그러면서 은연중에 여자 마음을 홀리고 다닌다고요. 피해자가 수두룩한데 본인만 모르잖아요."
강하나가 술잔을 비우고 눈을 흘겼다.
"제가요?"
"네. 딸꾹! 나도 피해자란 말이에요. 바보. 멍청이."
강하나가 무심결에 한마디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러던 중 갑자기 술병을 잡고 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강 쌤. 진정해요."
"이쒸. 놔요. 그냥 마시고 죽게."
"죽는다는 소리 함부로 하지 말고 빨리 내놔요."
최기석은 간신히 강하나의 술병을 빼앗았다.
"강 쌤은 제가 데리고 갈게요. 어차피 술도 못 마시는데 계속 있기도 뭐하고. 교수님. 강 간호사와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저는 두 사람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최기석은 신아름과 강하나를 부축해서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두 사람이 택시 타고 떠나는 것을 지켜본 후 식당으로 돌아왔다.
"교수님. 거기서 뭐하세요?"
으쓱한 공간에 윤지혜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말을 걸어도 대답 없이 벽만 응시했다.
"이런 데 있으면 안 좋아요. 저랑 같이 들어가요."
"내비 둬."
윤지혜가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회식 초반부터 달렸던 탓에 취기가 상당히 오른 모습이다. 서 있는 것조차 상당히 불안해 보였다.
"나쁜 놈."
"네?"
"넌 나쁜 놈이라고."
윤지혜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터진 눈물에 최기석은 어찌할 줄 몰랐다.
"혼자서 잘 지낼 수 있는데 날 흔들어 놨잖아. 너 때문에 자꾸 다른 사람들한테 기대고 싶어졌어."
"……."
"그런데 이제 와서 무책임하게 미국으로 떠나? 정말 너무하잖아."
"죄송해요."
최기석은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교수님이 그렇게 느끼고 계신 줄은 몰랐어요. 저는 단지 교수님이 얼음마녀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혼자 계신 걸 보는 게 싫었어요. 예전에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요."
"그럼 단순히 날 동정한 거야?"
"동정이 아닙니다. 단지……."
최기석이 말끝을 흐렸다.
[최 선생님은 여자 스태프들한테 너무 친절해요. 그러면서 은연중에 여자 마음을 홀리고 다닌다고요. 피해자가 수두룩한데 본인만 모르잖아요.]
문득 자리를 떠난 강하나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어쩌면 모든 게 거기서부터 꼬였는지 모른다.
"교수님은 충분히 매력적인 분입니다. 이성으로 느낀 적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발전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전부터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최기석은 간신히 말을 꺼냈다.
가슴 아프지만 여기서 선을 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윤지혜가 더 상처 받으리라.
그의 선언에 윤지혜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러더니 비틀거리며 다가와 그에게 입을 맞췄다.
뜻밖의 키스에 최기석의 몸이 굳었다.
"네가 누구를 좋아하던 상관없어.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으니까. 내 마음은 내 마음대로 할 거야."
"……교수님."
"놔! 혼자 들어갈 수 있어."
윤지혜가 휘청대며 기어이 혼자 식당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회식이 끝났다.
스태프가 적은 흉부외과의 특성상 2차 없이 각자 흩어졌다.
"윤 교수님은 내가 집까지 바래다 드릴게."
"네. 부탁드려요."
최기석은 김태식과 헤어져 병원으로 향했다. 윤지혜와 나눴던 대화로 가슴이 심란했다.
'정신 차려. 지금은 메이죠만 생각하자.'
볼을 찰싹 두드리며 정신을 일깨웠다.
드르르륵.
병동 회의실에 들어가자 황지연이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아. 선배. 전화 주신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깜빡했네."
최기석이 의자에 앉자 황지연이 일어나서 그의 옆자리로 다가왔다.
아침과 달리 화장이 진했다.
검정 스타킹을 신은 채 다리를 꼬자 각선미가 드러났다.
"그래서 긴히 할 말이 뭔데?"
"사실…… 그냥 선배가 보고 싶었어요. 이렇게 단둘이 있을 기회 별로 없잖아요."
황지연이 눈웃음치며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잠깐만 그대로 있어 봐."
최기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장에 넣어둔 음료수를 꺼냈다.
쾅!
음료수를 테이블에 내려놓자 황지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거 마실래?"
"……."
"왜 못 마시겠어? 내가 먹던 거라서 찜찜한가? 그게 아니면…… 여기에 뭐를 타서?"
"서…… 선배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발뺌해도 소용없어. 네 수작은 이미 다 들통났으니까."
최기석은 황지연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 너 조태호 끄나풀이지?"
"아…… 아니에요. 전 태호 선배 잘 몰라요."
황지연이 휘휘 손을 내저었지만 최기석의 눈빛은 여전히 뜨거웠다.
처음 만났을 때 황지연은 최기석에게 ABGA를 부탁했다.
환자의 혈관이 잘 안 보인다는 이유로 말이다. 하지만 황지연은 그에게 부탁하기 전 환자에게 ABGA를 하지 않았다.
당시 깔끔했던 드레싱 카트가 그 증거다.
더 웃긴 것은 나중에 이영호에게 물으니 황지연이 이영호보다 ABGA를 더 잘한다는 것이다.
즉 ABGA는 핑계였던 셈이다.
이후 보여 준 노골적인 유혹 역시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얼마 전 상중이를 만났거든. 이야기를 해 봤더니 흉부외과 인턴을 판 게 너라고 하더라?"
"……."
"흉부외과가 싫어서 떠난 네가 흉부외과에 다시 왔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해. 네 뒤에 조태호가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내 말 맞지?"
"전 아무 것도 몰라요. 그저 선배가 좋아서……."
"헛소리는 이쯤하지?"
최기석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자 황지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태호한테 가서 전해. 그 대가리로는 평생 나를 감당 못 한다고. 그리고 너도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아. 앞으로 흉부외과 생활이 끔찍해질 테니까."
쿵!
최기석이 문을 닫고 회의실을 나갔고 황지연은 황망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
* * *
그날 저녁, 성형외과 휴게실.
조태호와 황지연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보낸 걸 들켰다고?"
"……네. 저에 관한 걸 모두 알고 있었어요.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서……."
황지연이 푹 고개를 숙였다.
"강준이나 너나 똑같네. 어째 내 주변에는 일을 똑바로 하는 인간이 하나도 없냐!"
쾅!
조태호는 얼굴을 찌푸리며 탁자를 내리쳤다.
최기석을 엿 먹이기 위해 미인계를 준비했다. 그런데 이번 계획마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속이 타서 앞에 놓인 커피를 단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아침에 보고했을 때는 음료수 마셨다고 했잖아."
"먹는 척만 했던 것 같아요. 동기 말을 들어 보니까 수술실에서도 쌩쌩했대요."
"그러면 처음부터 의심했다는 소리인데……. 대체 일을 얼마나 개판으로 했길래……."
"죄송해요. 오빠. 다시 기회를 노려볼게요."
황지연은 두 손 모아 싹싹 빌었다.
병원장의 아들인 조태호에게 접근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를 사로잡는다면 앞으로의 병원생활은 고속도로와 다름없으니까.
그래서 최기석을 음해하는 계획에 직접 나섰고 말이다.
"꺼져. 이제 너랑 볼 일 없다."
"오빠. 제발요. 저 오빠 만나려고 남자친구랑도 헤어졌단 말이에요."
"그래서 어쩌라고? 엉?"
조태호가 눈을 부라렸다.
최기석에게 정체를 들킨 이상 황지연은 쓸모가 없다.
아니 오히려 짐 덩어리다.
"빨리 꺼져. 기분 더 잡치게 하지 말고."
조태호가 으르렁거리자 황지연이 다급하게 자리를 피했다.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조만간 최기석이 메이죠 병원에 간다는 것을 들었다. 꼴 보기 싫은 놈이 사라지는 것은 좋지만 그동안 녀석에게 한 방도 먹이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했다.
지이이잉.
가운에 넣어둔 콜폰이 울렸다.
응급실 콜이다.
"씨발. 또 어떤 머저리 새끼가 다친 거야?"
조태호는 쓰레기통을 걷어차며 휴게실을 나왔다.
* * *
의진대 병원에서 보내는 마지막 주.
최기석은 시간을 도둑맞은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만큼 시간이 빨리 갔던 것이다.
일과를 소화하며, 아지트에서 집도 연습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USMLE와 토플 공부에 집중했다.
도중에 로봇 공학 스킬을 Lv.2로 상승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토요일 아침이 찾아왔다.
의진대병원을 떠나는 날이다.
"참 나. 바보 같이."
캐리어를 끌고 나오던 최기석은 다시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리고 입고 있던 가운을 옷걸이에 걸었다.
"고생 많았다."
가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 가운을 입고 병동을 넘나들었던 것이 엊그제 같건만, 벌써 이별의 순간이 찾아왔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을 곰씹다가 발길을 돌렸다.
최기석은 병동을 돌며 흉부외과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작별 인사를 했다.
"최 선생님. 꼭 다시 오실 거죠?"
"선생님 없으면 무슨 재미로 스테이션에 있어요?"
간호사를 비롯한 모든 스태프들이 그와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환자를 위하는 마음.
스태프와의 협동심.
위기상황에서 대처하는 솜씨 등등.
무엇 하나 나무랄 것이 없었던 그였기에.
스태프와의 인사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한 병실을 찾았다.
드르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황기정이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어. 선생님. 오늘은 가운 안 입으셨네요?"
"이제 여기서 일 안하거든요."
"네? 갑자기 왜?"
"외국 병원에 일하러 갑니다."
"아……."
황기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입원한 후로 계속 초조하고 불안했는데 선생님 덕분에 잘 지냈어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최기석의 농담에 황기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최 선생님은 어딜 가시더라도 좋은 의사가 될 겁니다. 응원할게요."
"감사합니다. 건강하게 퇴원하시고 결혼까지 무사히 골인하세요."
최기석은 그대로 병동을 떠났다.
띠링!
[장기 임무, '메이죠를 향해서'를 완수하셨습니다. 보상으로 3,000 P.
P와 스킬북을 획득하셨습니다.]
병원 입구를 통과하는 순간 알림이 울렸다.
최기석은 피식 웃으며 병원과 멀어졌다.
그러던 중 출근길로 붐비는 거리에 서서 의진대병원을 응시했다. 홀가분한 기분, 아쉬운 기분이 섞여서 오묘한 감정을 만들어 냈다.
"잘 있어."
최기석은 병원을 향해 손을 흔들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