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죠를 향해서 (7)
"딱 잘라서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최기석은 말을 하던 중 우연히 황기정과 눈을 마주쳤다.
황기정이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다만 황기정 선수는 저희 병원에서도 크게 신경 쓰고 있는 환자분입니다. 의료진들이 최선을 다해 수술할 겁니다."
"……."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송미나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하지만 더 이상 따지고 들거나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요즘 뉴스 못 봤어? 의진대 흉부외과가 실력이 좋다고 하잖아. 너무 걱정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심하게 하지 말라는 거지."
"하아…… 됐어. 더 말해 봐야 입만 아프지. 난 갈게. 선생님 수고하세요."
송미나가 인사하고 병실을 떠났다.
그제야 병실의 팽팽한 분위기가 풀렸다.
"휴우…… 선생님. 감사합니다."
황기정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씀 안 하셔도 되겠어요?"
"다 털어놓는다고 달라질 건 없잖아요. 어차피 중요한 건 수술 결과니까."
"맞는 말씀입니다만……."
최기석이 말끝을 흐렸다. 그가 오프였던 사이 황기정에게 새로운 질병이 발견되었다.
바로 기도협착과 식도암이다.
오늘 스케줄을 정리하던 중 추가된 그의 질병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좌심실류에 다른 질환이 더해지면 수술 난이도는 껑충 뛰어오른다.
"수술이 가까워지니까 더 초조해졌어요. 이제는 자는 것조차 힘들고요. 수술받을 때도 그렇게 눈 감았다가 다시는 못 깨어날 것 같아서."
"……."
"근데요. 전 건강해지고 싶고 미나랑 결혼하고 싶어요."
황기정이 말을 마치고 창가를 응시했다.
그의 모습에는 세상에서 누구보다 42.195Km를 빠르게 완주한 사내답지 않은 나약함이 깃들어 있었다.
"의진대 스태프들을 믿어 달라는 말씀 이외에는 드릴 게 없네요.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투정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기정이 힘없이 웃었고 최기석은 그대로 병실을 나왔다.
세상에 그 어떤 영웅이나 위인도 침상에 누우면 그저 환자가 되는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면서.
* * *
꿈이다.
이건 꿈속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현실이었던 꿈.
윤지혜는 옛 애인과 차를 타고 이동 중이다.
"오늘 날씨 좋다."
"정말. 이제 완전 가을이네."
대답하며 운전 중인 애인을 응시했다. 그런데 애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에 새까만 블랙홀이 자리 잡았다.
'아…….'
윤지혜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 사건 이후 애인에 관련된 것을 모두 지웠다.
그 때문인지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얼굴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래도 혹시 꿈속이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젠 정말 사라진 사람이 되었다.
"요즘 신경 못 써 줘서 미안해. 너도 알다시피 스케줄이 너무 바빴잖아."
"괜찮아. 이해해."
윤지혜는 정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두려움에 다리가 떨렸다.
손톱을 물어뜯기에 바빴다.
어느새 길옆으로는 보랏빛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이제 그 끔찍한 구간으로 들어왔다.
"저…… 저 차 왜 그래?"
애인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동시에 반대편에서 달리던 트럭이 중앙선을 넘어 돌진했다.
"안 돼!"
윤지혜는 재빠르게 운전대에 손을 얹어 핸들을 꺾으려 했다. 하지만 손은 허무하게 허공을 가를 뿐, 사고를 막지는 못했다.
쿵!
차가 찌그러지면서 강렬한 충격이 몸을 뒤흔들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애인의 몸이 엉망으로 찢겨 있었다.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한쪽 팔과 다리가 장난감처럼 구부러졌다.
"꺄아아아악!"
윤지혜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다.
사고 당시의 감정들이 살아나면서 공포감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한두 번 꾸는 악몽도 아니지만 매번 놀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쏴아아아아.
샤워를 끝내자 마음이 다소 가라앉았다.
윤지혜는 옷을 입고 인근 헬스 클럽을 찾았다. 운동하다가 시간에 맞춰서 출근할 생각이다.
"교수님. 오셨어요?"
"일찍 왔네?"
"일찍 잤더니 일찍 깼네요. 하하하하."
김태식이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의 너스레에 윤지혜는 속으로 웃었다.
김태식은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매일 같이 그녀가 운동하는 시간에 맞춰서 이곳을 찾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녀가 오면 운동하는 척하며 쳐다보기 일쑤였다.
그의 귀여운 행동에 윤지혜도 어느 정도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윤지헤는 몸을 풀고 본격적인 운동을 시작했다.
평소 쓰는 기구들을 차례대로 이용한 후 러닝머신을 뛰었다.
'아. 싫다.'
머리를 비우려 했지만 오히려 생각들이 넘쳤다.
최기석에 관련된 생각들이.
어제 장혁필을 통해 그가 곧 의진대를 떠나 메이죠 병원으로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갑작스런 이별 소식을 들은 후 가슴이 뻥 뚫렸다.
어쩌면 방금 악몽을 꾼 이유가 그 때문인지 몰랐다.
최기석으로 생긴 허전함을 옛 애인을 통해 메워 보려고 한 것일지도…….
'차라리 잘 됐어.'
윤지혜는 좌우로 흔들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최기석을 만난 후부터 다른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가 사라진다면 자연히 그 감정 또한 사라지리라.
이제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세상 속에 홀로 서 있던 때로 돌아가는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속도가 너무 빠르신 거 아니에요?"
김태식이 그녀의 곁에서 러닝머신을 뛰기 시작했다.
"그래야 운동이지."
"정말 대단하시네요. 전 지금 정도만 뛰어도 죽을 것 같은데."
김태식의 입에서 거친 호흡이 터졌다.
"운동 끝나고 병원 카페 같이 가실래요?"
윤지혜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태식이 세상을 다 가진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헬스장을 나와 병원 카페에 자리 잡았다.
"교수님은 쉴 때 주로 뭐하세요?"
"나? 딱히 하는 건 없는데?"
"그렇다고 계속 가만있지만은 않으실 거잖아요."
"으음…… 가끔 영화나 드라마 챙겨 봐."
"영화 좋아하세요?"
"그런 편이야."
"괜찮으시면 다음 주에 같이 영화 보실래요? 재미있는 영화 개봉하는데 교수님하고 같이 보고 싶어서요."
"상황 봐서. 잘하면 부모님을 뵈러 가야될 수도 있어."
"알겠습니다."
김태식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두 사람이 병원 이야기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익숙한 얼굴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바로 최기석이다.
"안녕하세요."
최기석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서 인사했고 두 사람이 인사를 받았다.
"교수님께는 말씀을 못 드렸는데 저 다음 주까지 일합니다. 송명진 과장님 콜을 받고 메이죠 병원에 가기로 했어요."
"알아. 들었어."
"죄송합니다. 괜히 윤 교수님께 폐를 끼쳐서."
최기석의 갑작스런 사과에 윤지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갑자기 왜?"
"제 대신 윤 교수님이 세이버 팀으로 들어가는 거 맞죠? 제 짐을 교수님께 넘기는 것 같아서요."
"그거라면 신경 쓰지 마."
얼마 전 장혁필이 그녀에게 부탁을 했다.
곧 최기석이 떠나서 세이버 팀에 공석이 생기는데 그 자리를 맡아 달라는 것이다. 만약 허락할 경우 윤지혜가 제1보조가 되고 김태식이 제2보조로 내려간다고 덧붙이면서.
그녀는 고민 끝에 장혁필의 제안을 수락했다.
"세이버 수술이 매일 있는 게 아니니까 그 정도는 도울 수 있어."
"그래도 죄송해요."
"됐어. 신경 쓰지 마."
"그건 그렇고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요? 으슬으슬 춥고 두통도 조금 있지 않으세요?"
최기석이 다가와서 이마에 손을 얹었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그녀의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이 자식. 교수님한테 뭐하냐?"
김태식이 얼굴을 찡그렸다.
"선배…… 아니. 김 선생님. 제가 괜히 그러는 게 아니고 확실히 열감이 있어 보여서."
"막 운동하고 샤워하셔서 그런 거야."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닌 것 같아요. 교수님, 어제 에어컨 틀고 주무셨죠?
"……응."
"온도를 너무 낮춰서 냉방병에 걸리신 것 같은데. 몸 관리 잘 하세요."
최기석이 그녀를 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쿵. 쿵. 쿵. 쿵.
얌전히 있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바보 같아. 정말!'
윤지혜는 최기석의 행동에 설레는 자신이 미웠다. 그를 잊자고 다짐한 게 불과 몇 시간 전이거늘, 어째서 이렇게 또 야릇하고 애틋한 감정을 가진단 말인가.
"이제 슬슬 들어가 봐야 될 것 같은데요?"
"그래. 가자."
세 사람이 나란히 카페를 떠났다.
시간이 흘러 오전 회의 시간이 찾아왔다.
케이스 발표, 입원환자 관리, 수술 스케줄 확인 등의 순서가 끝나자 조지환이 스태프들을 훑었다.
"오늘은 중요한 할 말이 있습니다."
톡. 톡. 톡.
조지환이 검지로 탁자를 두드리자 회의실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미리 소식을 들은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을 텐데. 다음 주부터 보건복지부의 서비스 평가가 시작된다는 소문이 있어요. 이번에는 작년과 달리 과별 점수까지 매긴다고 하니까 정신 바짝 차려요. 알겠습니까?"
"네!"
스태프가 동시에 대답했다.
병원 서비스 평가는 매년 보건복지부가 시행한다.
여러 가지 평가항목을 두고 병원별 등급을 매기는데 작년 의진대 병원은 종합순위 30위로 중간 등수를 차지했다.
"특히 질환에 대해 묻는 사람들을 조심해요. 그런 사람들이 평가자일 확률이 높으니까. 힘들겠지만 이번 삼 개월 동안만 CS(customer service)에 신경 씁시다."
조지환이 뜸을 들이고 최기석을 응시했다.
"최 선생. 메이죠 행은 완벽하게 결정된 거예요?"
"네. 스케줄까지 다 짜 놨습니다."
"생각보다 무책임하네. 본인이 좋다고 세이버 팀에 들어왔다가 금방 발을 빼다니.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겁니까?"
조지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죄송합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장 교수의 부탁도 있고 하니까 일은 다음 주까지 하는 걸로 해요."
"감사합니다."
"그럼 회진 돕시다."
조지환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스태프들이 그 뒤를 따랐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거냐고? 그게 당신이 할 소리야?'
최기석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 * *
그날 오후.
최기석은 수술 스크럽을 마치고 병동 회의실을 찾았다.
의진대 병원에서 하는 마지막 세이버 수술이 이틀 뒤로 다가왔다.
팀원들이 전부 모여 수술 계획을 짜기로 했다.
"먼저 오셨네요?"
"그래. 왔다. 인마."
김태식이 다가와 다짜고짜 장난스럽게 헤드락을 걸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그걸 몰라서 물어? 너 내가 윤 교수님 좋아하는 거 알지? 그런데 아침에 그딴 짓을 해?"
"감기는 걸린 것 같은데 근거로 댈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랬어요."
"칫. 이번만 봐준다."
김태식이 헤드락을 풀었다.
"아직 진도는 못 빼셨어요?"
"여전히 철벽이다. 얼음마녀가 괜히 얼음마녀는 아닌가 봐."
김태식의 입에서 한숨이 터졌다.
최기석의 도움을 받아 윤지혜가 헬스장에 가는 시간대를 알아냈다.
그런데 한 달째 마주치고 있음에도 관계에 진전이 없었다.
"그런데 선생님. 황기정 환자 수술 어떻게 해요?"
최기석이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뭐를 어떻게 해. 잘해야지."
"그런 게 아니라 기도협착에 식도암까지 발견됐잖아요. 이 상태에서 세이버 수술 할 수 있어요?"
"나도 그게 궁금하다. 원칙이라면 기도협착하고 식도암 수술을 끝내고 세이버 수술을 하는 게 맞는데 그것도 썩 신통치 않아 보이고. 장 교수님이라면 뭔가 대책이 있지 않을까?"
드르르륵.
대화를 나누는 도중 장혁필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귀가 간질간질한 걸 보니까 내 이야기를 했나 본데?"
장혁필이 두 사람을 보며 피식 웃었다.